한일회담이란 무엇인가?
현재 한일 양국은 경제, 외교, 문화, 관광 등 다방면에 걸쳐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강제동원문제, 일본군 '위안부'문제, 독도 문제, 그리고 이 칼럼의 문화재 반환 문제 등 과거사와 얽힌 역사인식문제로 인해 양국의 대립과 마찰이 부각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양국은 긴 세월 동안 우호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 왔다.
한일 양국이 지금과 같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60년 전인 1965년 6월 22일의 한일국교정상화가 그 출발점이다.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특명전권대사도 대사관도 없었고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없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일 양국은 광복과 한국전쟁, 패전과 GHQ의 점령이라는 국가적 대변혁기 속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과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을 통해 양국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회담을 개최했다. 이것이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이하, 한일회담)이다. 그리고 이 한일회담을 통해서 한일기본조약 및 4개의 부속 협정이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되면서 한일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한일회담에서는 ① 기본관계문제(1910년 이전에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과 협정의 효력 여부 등 논의), ② 청구권 문제(일제강점기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 보상 논의), ③ 문화재 반환 문제(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 논의), ④ 선박 문제(일본이 가져 간 조선적<朝鮮籍> 선박의 반환 논의), ⑤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문제(일제강점기 이래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한국인들의 법적지위 논의), ⑥ 어업 문제(전관수역<專管水域>과 공동규제수역, 평화선 등 논의)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한일 양국은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약 14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 만큼 한일 양국은 수없이 많은 회의를 거치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리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 및 4개의 부속 협정(상기 ② 청구권 문제~⑥ 어업 문제 중 선박 문제를 제외한 협정들)을 체결하면서 길고 긴 한일회담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 조약과 협정들이 이른바 '65년 체제'로 작용하면서 작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해 왔다.
이번 글 부터는 한일회담의 주요 의제였던 문화재 반환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중심으로 굴곡진 한일 관계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1차 한일회담: 한국 측, 정치적 해결을 통한 문화재 반환 요청
한일 양국은 1951년 10월 20일에 먼저 예비회담을 개최하고 이를 본회담으로 돌려 1952년 4월 15일까지 제1차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당시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 문화재 반환 교섭은 1952년 1월 9일에 열린 비공식 회담에서 처음 거론됐다.
당시 한국 측은 일본 측이 문화재를 반환할 경우 "그 자체의 금전적 가치에 비교할 수 없을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종류의 것은 약탈재산으로 다른 나라에는 반환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일본이 큰 희생을 치르는 일 없이 선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문화재 반환을 제안했다.

예비회담이 본회담으로 변경된 후 열린 제1회 청구권위원회(2월 20일)에서 한국 측은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한국측 제안'(이하, 대일청구권 8항목)을 제시한다. 이는 일본정부의 조선총독부 채무, 한국 내 법인의 재일재산, 국공채·일본은행권·피징용 한인 미수금 등 8개 항목의 반환을 요청하는 목록이었다. 문화재 반환 관련 항목은 '한국에서 가져온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지도 원판 및 지금과 지은을 반환할 것'이라는 제1항목이었다.
이어서 한국 측은 제2회 청구권위원회(2월 23일)에서 '대일청구권 8항목'의 취지와 법적 근거를 설명한다. 제1항목에 대해서는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등 국보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견지에서 한국에게 반환할 것을 희망한다. 원래 이와 같은 재물은 부자연스러운, 즉 탈취 혹은 한국의 의사에 반해 가져온 것인 바 그 법적 근거는 후에 설명하겠으며, 이 점을 잘 인식하고 대국적 견지에서 자진하여 반환해 달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한국 측은 일본 측의 문화재 반환 여부를 물었지만, 일본 측은 먼저 문화재 반출 시기와 문화재 항목, 반환의 근거 등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한국 측은 제3회 청구권위원회(2월 27일)에서 '한일간 청구권 협정 요강 한국측 제안의 상세'를 제출한다.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 있는 항목은 제1항목으로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서적과 박물관과 대학,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공예품이 실려 있었다.

한일 양국은 이를 바탕으로 문화재 목록, 반출 시기, 강제성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일본 측은 제1항목에 대해 구체적인 고서적 목록의 제출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구체적인 목록은 나중에 논의하고 아래와 같이 일본 측이 먼저 법적 해결이 아닌 정치적 해결을 통해 문화재를 반환할 것을 요청했다.
"제안 요강에 시기를 한정하지 않은 것은 국보 반환에 있어 한일 양국의 친선 관계를 확립하겠다는 일본 측 성의에 기대하여 의식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또한 한국 측도 이를 권리로써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를 부탁하는 것이므로 우리들의 의사에 반해 옮겨 간 것을 현상으로 돌려 한일 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대일기본정책요강에 의하면 탈취 혹은 강박에 의한 취득으로 그 취득 형식을 규정하였으나, 여기서는 법률적으로 보다 정치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운반된 것을 전면적으로 표현한 것이니 간혹 유효・합법적으로 취득한 것도 있을 것인 바 개인 소유 등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반환할 수도 있을 것이며, 될 수 있으면 취득 형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고 반환 방법은 이제부터 쌍방 교섭에 의하기로 하고, 그냥 반환해 달라는 것이다"
제2차 한일회담: 한국 측, 문화재 반환 목록 제출
제2차 한일회담은 1953년 4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개최된다. 문화재 반환 교섭은 비공식 회담(1회)과 청구권위원회(2회)에서 진행되었다. 한국 측이 제출한 문화재 목록의 조사 여부와 일본 소재 문화재의 사실관계를 검토하는 회의체 구성에 대해 주로 논의했다.
한국 측은 청구권 문제에 관한 비공식 회의(5월 24일)에서 군인군속 문제, 징용 한국인의 미지불금 문제, 그리고 문화재 반환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 일본 측은 정당하게 구입한 문화재나 아주 오래전에 들어온 것도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논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한국 측은 고서적과 미술품 등이 기재된 '한국 국보 고서적 목록 일본 각 문고 소장', '일본 소재 한국 국보 미술공예품 목록'을 일본 측에 건넸다.

이어서 한국 측은 제2회 청구권위원회(5월 29일)에서 문화재 목록 조사 현황을 물었다. 일본 측은 해당 목록들을 조사하고 있지만 그 양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답변했다.
제3회 청구권위원회(6월 11일)가 열리자 일본 측은 고서적 담당자에게 개괄적인 조사를 의뢰했으며 조만간 이를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측은 문화재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문화재의 소재지 등을 확인하는 비공식 회의를 제안했고, 일본도 이에 동의했다. '한국관계문화재조사'라는 비공식 회의는 결과적으로 개최되지는 않았지만, 제5차 회담에서 한국 측의 요청으로 개최된 문화재 전문가들의 '전문가 회의'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 회의로 이어졌다.
제3차 회담: 일본 측, 법적 의무로 반환할 문화재는 없다
제3차 회담(1953년 10월 6일~10월 21일)은 개최 약 2주일 만에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 수석대표가 '산림 녹화, 철도 건설, 논 개간 등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조선이 발전했다'는 취지로 일본이 한국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이른바 '구보타 발언' 때문이었다. 이 여파로 인해 문화재 반환 문제를 비롯한 다른 의제들의 교섭도 모두 멈춰버렸다.

한국 측은 제2회 청구권위원회(10월 15일)에서 '한국 국보 고서적 목록(제2차분)'을 제출한다. 일본 측은 문화재 목록을 조사했지만 정당한 수단으로 일본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 반환의 법적의무 문제를 둘러싸고 아래와 같은 대립일 발생했다.
· 일본 측: 일본은 의무로 반환하는 것이 아니라, 청구권 문제와는 별개의 기초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문제는 문화협력의 내용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한국 측: 일본 측에서 이제 새삼스레 이 문제에 대한 태도를 고쳐 의무적으로 반환할 것은 전혀 없다. 전부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여기서 한국 측도 법적 견해를 분명히 주장하겠다.
한일 양국은 반환의 법적의무를 둘러싼 인식의 괴리가 컸다. 기본적으로 한국 측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적이고 강제적이었고 그 상황에서 이루어진 문화재의 반출도 역시 불법적·강제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일본 측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한 일은 합법적이었고 문화재 반출 또한 정당한 수단으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의 괴리는 문화재 반환 문제를 둘러싼 마찰과 대립의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일본 문화재보호위원회가 문화재 반환 반대
초기 한일회담 당시 일본 내에서는 문화재 반환 교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때 한국 측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외무성과 문화재를 보호·관리·조사하는 문화재보호위원회가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문화재보호위원회는 문부성의 외국(外局)으로 문화재 반환 문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외무성은 자체 조사를 통해 일본 측이 약간의 국유 문화재를 적당히 선택하여 기증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보호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기본적으로 문화재 반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조선에게 반환하는 일은 가능한 한 회피하고 싶다"
"외무성 측이 외교상의 수단으로 중요한 문화재를 양여하기에 이르지 않을까 매우 우려되며, 목록 작성을 좀처럼 수락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약간의 국유 문화재를 기증해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외무성과 당시 기증조차도 반대했던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입장 차이는 문화재 반환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없었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참고문헌
한국정부 및 日本政府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국성하,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협상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2005.
류미나, '한일회담 외교문서로 본 한・일 간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역사연구> 제30호, 2009.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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