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제26회 서울퀴어문화축제로 무지개 깃발이 14일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를 뒤덮었다. 전 국민이 함께 이겨낸 탄핵 정국 이후 열리는 첫 퀴어문화축제인 만큼 성소수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 모두가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개막과 동시에 60여 명의 목회자와 시민들은 입구 앞에서 축복식을 열고 성소수자 축복식을 열었다. 이들은 "우리는 똑같은 무게로 서로 존중하며 서로의 고유함을 존중해야 한다"며 "혐오가 아닌 사랑, 차별이 아닌 자비, 배제가 아닌 가능성과 희망이 가득한 세계를 꿈꾼다. 그 누가 뭐라고 떠들지라도 이 자리 모인 우리가 함께한다"고 기도했다.
개신교, 가톨릭교는 물론 불교도 축제에 참여했다. 대한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와 성소수자불자모임 '불반'이 부스를 차리고 목탁을 두드리며 이목을 끌었다. 조계종 위원장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차별과 혐오를 받는 집단 중 하나가 성소수자"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근본 취지 하에 성소수자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도 부스를 차리고 청년 성소수자들을 환대하는 '프리허그'를 진행했다. 장선영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는 <프레시안>에 "많은 성소수자 자녀들이 부모님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 엄마, 우리 부모님 같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위안을 주기 위해 꼭 안아주고 있다"고 했다.
포옹이 주는 위로에 일부 성소수자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10여 년 넘게 부모에게 성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30대 A 씨는 "부모님께 내 성 정체성을 밝혔을 때 나를 지지해줄지 고민이 있어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다"며 "여기서는 시간이 걸려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라고 말해주니 위안이 됐다. 우리 엄마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좋게 여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울음이 나왔다"고 했다.
축제 한 켠에서는 결혼을 바라는 성소수자들이 모여 혼인신고서 및 생활동반자신고서를 작성한 뒤 웨딩사진을 촬영했다. 행사를 주최한 공연예술인들의 모임 '마당극민중의부활'은 <프레시안>에 "성소수자들도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어야 정말 사랑하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생활동반자법이 국회를 통과한 상태를 가정하고 혼인서약, 축가, 웨딩사진 등의 결혼식을 간략하게 진행한 것"이라며 "하루만 환상의 날이 아니라 365일 성소수자들이 당당하고 해방된 상태로 살아가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 축제에는 역대 최초로 중앙행정기관이 축제에 참여했다. 질병관리청은 이날 HIV 감염 예방과 노출 전 예방요법에 대해 홍보자료를 배포하고 퀴즈를 푼 참여자들에게 경품을 제공했다. 질병관리청 관계자는 "청년의 날이나 에이즈의 날 등 연중 내내 HIV 예방을 홍보해왔다. 청년들이 많이 참여하는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현장 홍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와는 정반대로 매해 축제에 참여하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처음으로 불참을 선언했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서울퀴어문화축제와 성소수자 반대 세력 모두에 초대를 받자 '한쪽에만 참여하는 게 적절치 않다'며 입장문을 내고 축제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인권위 직원들은 모임을 만들어 축제에 참여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앨라이 모임' 이름으로 차린 부스에는 인권위 직원 40여 명이 참여했다. 최준석 인권위 성차별시정과 조사관은 "안 위원장의 발언은 혐오세력을 용인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인권위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인지 의문"이라며 "인권위가 성소수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직원들이라도 참여했다"고 말했다.

무대에 올라선 발언자들은 지난해 겨울부터 4개월간 광장을 지킨 성소수자들이 하루빨리 평등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영이 전국여성농민회 회장은 "남태령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투쟁에 (성소수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왔다. 윤석열이 파면되는 순간까지 농민들 곁에 성소수자 친구들이 함께해줬다"며 "여성농민들은 남태령에서 촉발된 농민과 퀴어의 만남을 연대로 만들어내고 낙인과 차별이 없는 존재와 삶을 지켜내기 위해 함께 투쟁해 나가겠다"고 했다.
309일간 크레인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연대하면 희망이 된다는 걸 저는 안다. 크레인 위에 고립됐던 제게는 퀴어버스가 큰 힘이었다"며 "광장의 열망과 눈물, 뜨거운 고백들과 환희의 깃발 위에 세워진 이재명 정부에 바란다. 차별과 혐오의 가장 큰 피해자를 빼고, 광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존재했던 성소수자들을 지운 채로 차별금지법을 감히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날 축제에는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 각국 대사관, 시민사회단체 등 77개 단위가 부스를 차리고 성소수자를 지지했다. 정치권에서는 정의당, 녹색당, 기본소득당, 진보당이 부스를 차렸으며 대선 후보로서 성소수자 지지를 천명한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표,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한 진보당 손솔 의원이 축제를 찾았다.
비슷한 시각 서울시의회 인근에서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등을 주장하며 성소수자 혐오 집회를 열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근처에서도 소규모 보수 개신교 시위가 있었으나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