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회계연도를 기점으로 유럽연합(EU) 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기후 목표 및 지속가능성 정보 공시를 의무화하는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이 시행되었다. CSRD는 기업에게 ESG, 즉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와 관련된 비재무적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다. 가장 먼저 EU 증권시장에 상장된 대기업 또는 EU 내 공익법인에 대해 우선적으로 공시가 의무화되었다. 비상장 기업이나 EU 외 지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이라도 EU 역내 고용 인원이 1,000명 이상인 경우에도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CSRD는 향후 점진적으로 강화되어, 2029년 회계연도 보고 시점까지 중소기업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기업군으로 적용 범위가 전격 확대될 예정이다.
CSRD는 환경(Environmental) 부문에서 탄소 배출량과 에너지 소비량, 물 사용량 및 배출량 등을 구체적으로 공시해야 하며, 대기·수질·토양 오염도와 환경 개선을 위한 기업의 실질적인 노력 등도 상세히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Social) 부문에서는 근무 환경 내 다양성과 평등, 포용성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를 비롯해 사업장 내 안전관리 체계 등을 공개해야 한다. 또한 근로자 재교육 투자 규모와 자기계발 기회 제공 현황, 고객 만족도 지표 등도 주요 공시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거버넌스(Governance) 부문에서는 이사회 구성의 성별 균형과 임원 보수 체계의 적정성, 기업 윤리 및 부패 방지 정책의 실효성 등을 설명해야 한다.
EU 당국은 이러한 규제가 기후 변화가 초래할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적 대비책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이번에 CSRD가 특히나 주목받는 이유는 이 규제가 EU 역외 기업까지 적용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어 글로벌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EU 기업들이 제품 생산에 투입되는 원자재의 원산지와 유통 경로, 제조 공정은 물론 최종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산출하여 공시해야 한다면 당연히 해당 EU 기업에 원자재를 공급하거나 물류 및 유통에 협력하는 외국계 기업들(한국 기업들 포함) 또한 CSRD 규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다.
CSRD의 범위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환경 관련 항목, 그중에서도 ‘탄소 배출량’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유럽 게임 산업계가 이러한 변화를 어떠한 관점으로 수용하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무형의 콘텐츠를 다루는 게임 산업이 실질적으로 배출하는 탄소량은 어느 정도일까? 과연 게임은 친환경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산업군일까? 게임은 과연 친환경적인가?
게임의 탄소 배출량은 어떻게 계산하는가
그동안 게임 산업이 기후 변화와 관련된 담론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임은 화학, 토목, 제조업 등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환경 오염을 (직접적으론) 유발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말마따나 컴퓨터만 갖추면 작업이 가능한 나름의 '저공해 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유럽 게임 업계 또한 스스로를 미래 산업으로 규정하며 오랜 세월 각종 환경 규제의 감시망에서 비껴나 있었다. 과거 게임 기업들의 ESG 관심 또한 환경보다는 근로환경과 기업 지배구조, 경영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준수하는 방향에 치중되어 왔다.
그러나 새롭게 적용된 CSRD는 디지털 상품의 개발 단계에서 발생하는 요소뿐만 아니라, 해당 상품이 서비스되는 모든 유통 경로에 대한 정보 공시를 의무화한다. 이는 가치 사슬(Value Chain) 전반을 포괄하는 Scope 3(기타 간접 배출) 규정에 따른 것으로, 하드웨어 제조 및 운송, 설비 운영은 물론 사용자의 기기 구동에 소요되는 에너지까지 모두 포함한다. 즉, 게임 제작 과정에서 투입된 리소스뿐만 아니라, 유저가 게임을 구매하고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환경적 영향을 산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게임 산업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예컨대 모바일 게임의 경우,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필수적인 스마트폰이 어디에서 부터 만들어지고 사용자에게 도달하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그 모든 것의 탄소 배출량을 감안해야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 게임 업계는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실질적인 대응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유엔환경계획(UNEP)의 지원 하에 출범한 글로벌 이니셔티브인 Playing for the Planet Alliance (P4P)는 2023년 "디지털 게임 산업의 탄소 복잡성 해소(Untangling the Carbon Complexities of the Video Gaming)"를 발간하였다. (관련 링크) 해당 보고서는 게임 개발부터 서비스에 이르는 가치 사슬 전반을 정리하고, 탄소 배출량 산정에 필요한 핵심 기준과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관련 링크)
P4P의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게임의 탄소 배출량은 해당 콘텐츠가 콘솔 및 PC 게임인지,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게임인지, 혹은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인지 등의 유형에 따라 산출 방식이 판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콘솔 게임의 경우, 가장 주요한 탄소 배출원은 게임 기기의 제조 공정과 최종 이용자 개개인의 기기 구동에 소요되는 에너지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온라인 게임은 네트워크 인프라와 데이터 센터, 서버 운영에 소비되는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친환경적 게임을 위한 노력들
앞서 언급했듯이 게임 산업의 탄소 배출량 측정은 산출 방식에 따라 데이터의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 또한 CSRD 공시 규정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워, 전문 인력을 상시 운용할 수 있는 대기업이 아닌 이상 이를 완벽히 준수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이 때문에 유럽 게임 업계는 배출량 데이터의 신뢰성을 확보하고자 학계와 긴밀히 협력하여 게임 산업에 특화된 탄소 배출량 산정 방법론의 개선 및 표준화, 간소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나아가 여러 게임 관련 협회와 시민단체, 교육 연구기관들이 EU의 지원을 받아 CSRD 실무 가이드라인과 교육 자료를 제공하는 등 다각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소 규모 개발사들의 관료적 부담을 완화해 주자는 취지다.
대표적인 예로 핀란드에서 발족한 Sustainable Games Alliance(SGA)를 들 수 있다. 핀란드는 아직 단일 사업장 기준 1,000명 이상의 게임사가 없어 CSRD에 의거한 ESG 정보 공시 의무를 실행하는 곳은 없다. (핀란드 최대 게임사인 슈퍼셀의 인력이 최근 900명을 넘어선 만큼, 곧 임박할 것으로 보여지긴 한다.) 그러나 규제 적용 전부터 산업계와 학계가 연계하여 선제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SGA는 특히 중소 게임사를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으며, CSRD 공시 의무가 중소기업까지 확대되는 2029년 전까지 최대한 많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역량이 부족한 소규모 기업들도 규정을 준수하게 하여 과징금 부과나 영업정지와 같은 리스크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게임사 대부분이 직원 수 1-20명의 소규모이고 끊임없이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순환해야 생태계가 유지되는 핀란드 게임 산업의 특성상, 이러한 대응은 산업의 생존과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핀란드 현지 업계에서는 에너지와 자원을 최소화하여 효율적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코드 최적화 등을 통해 고사양 하드웨어 없이도, 적은 전력 소비로도, 독창적인 메커니즘과 서사만으로 충분한 재미를 전달하는 게임을 제작하자는 움직임들도 포착된다. SGA는 이를 위해 유니티, 언리얼 등 주요 게임 엔진에서 활용 가능한 저전력 플러그인을 제공하고 있다. (관련 링크)
독일 게임 산업 협회(Verband der deutschen Games-Branche)도 마찬가지로 게임 업계 종사자들이 실제 근무 환경에서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에너지 및 난방 절약, 친환경 전력 사용, 분리수거 방법 등을 열거한 가이드 자료를 온라인으로 무료 배포하여 독일 내 중소 게임 스튜디오들도 동참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관련 링크)
스웨덴게임산업협회(Dataspelsbranschen), Game Habitat 등 스웨덴 게임 관련 여려 단체들은 2024년 “Code, Climate, Creativity” 보고서를 공동으로 발간해 최근 스웨덴 게임업계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현황을 정리하였다. (관련 링크) 나아가 스웨덴 게임업계에서 실천할 수 있을 만한 여러 팁, 관련 문의나 리소스를 찾을 수 있는 곳들을 주욱 열거해 놓았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데이터 기준, 스웨덴 대기업들의 탄소 배출량은 약 2,275 tCO2e로 추산되었다. 이는 스웨덴 전체 산업 배출량의 0.0015% 수준으로, 스웨덴 게임산업의 매출 규모를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탄소 배출량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상한 바와 같이 계산 범위를 하드웨어 제조, 운송, 설비 운영 및 기기 구동에 소요되는 에너지 등 가치 사슬 전반(Scope 3)으로 범위를 확장할 경우 산출되는 탄소 배출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특성도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렇듯 EU의 ESG를 향한 강력한 의지는 실질적인 산업 규제들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규제들의 영향력도 과거 산업계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던 수준을 넘어, CSRD와 같은 강제성 있는 의무 조항이 확대되면서 게임을 포함한 디지털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현지 언론들은 최근 급격히 경색된 미국과 EU의 관계가 다국적 디지털 서비스 기업을 겨냥한 ESG 규제 강화로 더더욱 번질 것으로도 전망하고 있다. EU 입장에선 유럽 시장을 장악한 실리콘밸리 기반의 거대 기술 기업들을 견제하고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안보 장치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 소비자들 또한 이러한 새로운 규제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이다.
일부는 과도한 규제로 인해 EU 시장이 고립되는 '갈라파고스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아무래도 최근 몇 년 사이 유럽 내 자연재해 빈도가 급증하며 기후 위기를 실감하게 된 현지 여론은 조금 더 강제적인 환경 규제 도입의 필요성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양새다. 마찬가지로 유럽 게이머들도 게임 기업의 지속 가능성 확보 노력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유럽 게임 산업 현장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규제에 신속히 적응하는 것만이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소비자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규정 준수 여부가 곧 사업의 존속과 직결되는 만큼 좋든 싫든, 공시 규정은 지켜서 사업을 유지해야 하진 않겠는가?
우리도 이제 '먼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한국을 포함한 해외 게임사가 북유럽 기업과 퍼블리싱이나 아웃소싱 등의 협업을 진행할 때, 해당 파트너사가 CSRD 준수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CSRD 규정에 의거하여 한국 회사들도 탄소 배출량 산출을 위한 구체적인 실증 데이터를 제출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게임 서비스 분야에 국한되지 않으며, 게임 하드웨어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을 수출하는 한국 경제 전반에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결국 '게임은 친환경적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관념적인 이상을 넘어, 구체적인 수치와 데이터로 증명해야 하는 실무적인 영역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장 당면해야할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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