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무림사건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숱한 국가폭력이 벌어진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현장을 훼손했다는 이유에서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기리는 시민단체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0일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존하는 유일한 국가폭력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훼손한 이재오 이사장은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故) 김근태 고문 사건,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민주 인사에 대한 국가폭력과 인권 탄압 사건이 자행됐던 장소다.
단체 주장에 따르면, 지난 2018년 문재인 정부가 경찰청 소속 인권센터로 운영되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관리 주체를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하면서 민주인권기념관 설립을 위한 당국과 시민사회의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 때인 지난 2023년 이재오 이사장이 취임하자 논의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국가폭력 현장을 훼손하지 않기로 합의한 원칙을 깨고 전시·소통공간으로 설계했던 옛 대공분실 6·7층이 업무공간으로 바뀌었다.
단체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총책임자 박처원의 집무실이 있었으며 고문 수사관들이 체력을 단련하던 공간을 전시공간으로 두지 않는 기념관의 결정이 "원형복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입장이다. 박종철 열사와 친구 사이인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배우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게 기념관의 취지인데, 이를 사무공간으로 바꾸면 취지에 맞는 기능을 할 수 있겠느냐"며 "우리가 항의하자 인근에 사무공간을 임대하겠다더니 사전 통보 없이 6·7층에 입주하고, 다시 항의하자 개관식 후에 보자고 한다. 우리를 끝없이 기만하는 이재오는 물러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1981년 학림사건으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이덕희 씨 또한 "학림사건으로 26명이 928일간 이곳에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느끼는 장소였고 이것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며 "국가폭력의 현장을 그대로 잘 보존해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피해가 일어나지 않고 전 세계에 교훈이 될 수 있게 만들자는 게 우리들의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기념관 측은 직원들의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임시로 업무 공간을 설치했다는 입장이다. 기념관 관계자는 <프레시안>에 "옛 대공분실이 아닌 다른 건물에만 사무실을 두는 것으로 단체와 합의했었으나, 사무 공간이 협소해 외부 건물에 사무 공간을 확보할 예산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옛 대공분실 6·7층을 활용하기로 이사회가 의결했다"며 "지난해 말부터 시민사회에 양해를 구했으나 단체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해당 층을 전시실·휴식공간으로 둬야 한다는 의견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기념관 조성을 기념해 옛 대공분실 건물 앞에서 개관식을 열었다. 개관식 기념행사에서 경과보고를 발표한 이 이사장은 단체의 사퇴 촉구에 관련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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