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이 하버드대를 졸업하지 않았다면

[오찬호의 틈새] 대학 서열화 타파, 과연 가능할까?

이과는 조롱하고 문과는 자조한다

"입만 터는 문과 놈들이 해 먹는 나라." 이국종 의사가 군의관 후보생들에게 강연 중 한국의 의료 실정을 비판하면 뱉은 말이다. 의료가 정치공학의 덫에 걸린 슬픔과 관료 행정의 경직성에 대한 분노였다. 대중들은 자기 위치에 따라 다르게 반응했다. 입만 터는 문과를 싫어하는 사람은 옳거니를 외쳤고, 입 터는 건 맞지만 문과가 해 먹은 적 없다는 사람은 속상해했다.

문과에 대한 빈정거림이 만연한 풍토가 없었다면 입 밖으로 튀어나왔겠는가. 입만 터는 문과 놈들, 이 말은 오래되었다. 문과생 스스로가 입이라도 잘 털자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맥락이 다르다. 문과생 들으라면서 노골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국종 의사처럼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힘들다는 신세 한탄이 아니다. 너희들 신세나 한탄하라는 조롱이 가득하다. 입만 터니 문과 놈들이 취업을 못하지, 입 터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저 모양 저 꼴이지 등등으로 쓰인다.

30년 전에는 없었던 분위기다. 20년 전에도 저토록 노골적이진 않았다. 문과는 늘 말이 많았다. 이거, 쉽지 않다. 도서관에서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야 한다. 적절한 단어를 찾는다고 밤새 끙끙거리며 글을 써야지만 가능하다. 이런 문과생을 향해 지금처럼 '평소에 토익 공부 안 하고 도서관에서 책만 보더니 꼴 좋다'는 식으로 비꼬는 이과생은 없었다. 존중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인정은 했다. 사회에 저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면서 문과의 속성을 이해했다. 너라도 사회를 비판해 달라면서 응원하는 이도 꽤 있었다.

20년 전에도 대세는 이과였고 문과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래도 문과생들이 이과 눈치를 보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때도 문과와 이과의 취업률 차이는 상당했지만, 이 기준으로 학문을 조롱하는 이과생은 드물었다. 좋게 말해, 상호보완적 관계로 굴러는 갔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이과는 과학의 혁신을 이끌었고 문화는 성장의 이면을 살피며 혁신의 속도를 조절했다. 낯간지러운 묘사지만, 대충 저리 믿고 자기 공부 열심히 했다는 거다. 다른 전공자를 깔볼 시간에 공부 한 자 더 했다. 내 전공을 부끄러워할 시간에 책 한 자 더 읽었다.

현재는 아니다. 이과는 문과를 이과 '아래의' 학문으로 취급한다. 나도,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에 지쳐서 대학 강의를 그만뒀다. 2018년도에 대학 강의를 할 때였는데, 과제를 너무 불성실하게 하는 공대 그룹이 있었다. 지적을 하니, 전공 숙제한다고 시간이 없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변명을 하는 거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몇 달 후,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이 적절하냐는 주제로 이루어진 토론대회에서 "인문계는 공부하기도 쉬운데, 자연계보다 공부하는 시간 총량도 훨씬 적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 거 아닌가. 자신들에게 D 학점을 준 강사가 심사위원으로 앞에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학생들이 꽤 많았다. 사회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충 공부해도 학점 잘 받을 거라면서 수강 신청을 하는 그런 학생들 말이다. 그 앞에서 강의하는 건 무척 고단했다. 나를 힘들게 한 이 분위기, 더 심해졌고 더 넓어졌다. 저 점수로 어떻게 이 학교 오냐, 문과 선택했으니 가능했지 따위의 말들이 직접적으로 오간다. 고등학생들도 같은 논리로 빈정거린다. 마치 시대정신이 된 것처럼 이과는 조롱하고 문과는 자조한다.

끔찍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다. 대학 서열화의 역사가 곧 한국 교육의 역사이니 말이다. 서열화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 따위로 보는 천박한 인식이 넘쳐났으니,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걸 줄 세우려는 의지는 강해졌다. 대학이, 전공이, 기업이, 심지어 사는 지역조차 수직적으로 촘촘하게 분류되고 구분된다. 도태되어도 마땅한 하위권을 향한 혐오는 일상이 된다. 어느 순간 "입만 터는 문과 놈들"이라는 표현은 해도 되는 말이 된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열린 정치 분야 TV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대가 10개든 0개든,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교육 공약은 큰 틀이 비슷하다. 교육으로 불평등이 해결되어야 하고, 또 교육이 불평등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대학 서열화 타파를 앞세우며 이것저것 청사진을 짠다. 기호 1번은 지역거점국립대학(지거국) 지원을 강화해 서울대를 10개로 만들겠다고 한다. 2번은 서울대와 지거국 공동학위제를 제안한다. 4번은 이 둘 사이에 상호 학점교류제를 추진할 의향이다. 상호지만, 당연히 지거국 학생들이 서울대로 가서 수업 듣는 형태다. 5번은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자는 게 좀 다르지만 지거국 지원을 파격적으로 한다는 건 같다.

온통 서울대다. 서울대를 말하지 않고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보아서인데, 제일 중요한 게 빠져있다. 서울대 때문에 대학 서열화가, 교육 불평등이, 계급 대물림이 생긴 게 아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갔는데' 대학 서열화가, 교육 불평등이, 계급 대물림이 왜 문제냐는 인식이 주범이다. 그게 공정하다고 믿는 곳에선, 서울대 10개를 만드는 걸 서울대에 대한 차별로 인식한다. 공부 못해서 지방대 간 학생들에게 서울대 졸업장을 주는 게 말이 되냐고 한다. 어찌 정책이 순항하겠는가.

학력주의에 찌든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는 게 마땅해도 보인다. 하지만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끔찍한 분류표에 따라 그 짓을 할 다음 주자는 늘 대기 중이다. 서열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곳에서 지역의 몇몇 대학이 서울대급이 되었다고 하자. 그 순간, 이 대학과 지역의 다른 대학은 더 이상 지역이라는 이름으로도 묶이지 않는다. 둘 다 모두 지방에 있는 대학이지만 한쪽은 지방대가 아닌 지방대가 될 것이고 한쪽은 지방대 중에서도 한참 아래의 대학, 이른바 지잡대의 오명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거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지역에도 서울대 같은 학교를 만들자는 주장에는 늘 '카이스트나 포항공대(포스텍)를 지방대로 보지 않는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지방을 서울 '아래'의 개념으로 보는 사회에선, 지방대로 불리지 않을 대학 하나가 생기는 순간 나머지들은 지방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도태되어도 마땅한 존재만 될 뿐이다. 그러면 입만 터는 문과 놈들이란 표현이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허구한 날 지방대 차별만 외쳐대는 지잡대 말종이라는 말도 자연스러워진다. 그 세상에선, 국토균형 발전을 하자고 하면 '지방 사는 게 유세냐'면서 조롱한다. 대기업이 독식하는 기업생태계를 바꾸자고 하면 '중소기업 다니는 게 벼슬이냐'면서 우롱한다.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지라면서 온갖 근거를 찾는 사회를 공동체라고 부르긴 어렵다. 배움을 갈망하는 것과 능력주의의 강박에서 허우적거리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는 건 많이 다르다. 한국인들은 더 배울수록 더 멸시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괴상한 여정을 집요하게 추적해, 모든 변수들을 따지고 수정하고 파괴해야 한다. 이 고민이 없는 교육 공약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서울대가 10개든 100개든 아니면 0개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다.

역대 최악의 토론으로 기록될 대선 후보 3차 토론을 보면서 이준석 후보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하버드대 졸업만 아니었다면 저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을 거다. 하버드대가 빈정거리는 법을 가르쳐 주진 않았을 거다. 그 대단한 학교의 이름이라면, 한국에선 뭘 해도 일단 껌뻑 죽어주니 자신이 괴물이 된 것조차 모를 뿐이다.

정치인의 학력은 억지로 알려는 사람에게만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이준석은 무슨 논쟁만 시작되면 자신이 하버드 출신이란 걸 어떻게든 드러낸다. 하버드 '아래'가 감히 알 리가 없다는 뉘앙스로 말이다. 그런 방식이 통하면 안 되는데, 한국에선 너무 효과가 좋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논리적이라고 착각한다. 토론의 달인이라는 확신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다 저 지경이 된 거다. 모두의 잘못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민낯들>(2022),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등이 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