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광장은 승리했다. 시민들은 엄동설한 속에 촛불을 밝혔고, 비선실세에 휘둘리던 무능하고 타락한 정권을 몰아냈다. 그야말로 '촛불혁명'이었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권은 촛불의 열망을 제대로 실현해 내지 못했다. 노동자와 소수자·약자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시민들은 학습했다. 정권 교체만으로 나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8년 만에 다시 기회가 왔다. 또 한 번의 조기 대선을 앞두고 시민들은 새 정부가 과거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한 바람을 담아 시민들은 겨우내 광장에서 '윤석열 퇴진'과 더불어 사회 대개혁 구호들을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시민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윤석열 퇴진 집회를 주도했던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지난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온라인을 통해 시민들이 바라는 사회대개혁 과제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차별금지와 인권보장' 31%, '민주주의와 정치개혁' 23%, '돌봄과 사회안전망' 8%, '노동권과 일자리' 7%, '평화와 통일' 7%, '기후위기 대응' 7%, '경제와 민생 안정' 6%, '교육' 5%, '생명존중’ 4%' 순으로 나타났다.
<프레시안>은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위 순서에 따라 분야별 개혁 과제들을 짚어본다. 새 정부가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두 번째 편으로 여성 인권 과제를 살펴본다.
'빛의 혁명'의 주역, 그 이름은 '청년 여성'
지난 겨울 탄핵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봉'은 민주주의 수호세력의 주축이 청년 여성으로 교체됐음을 보여줬다. 평소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기 위해 준비한 응원봉으로 광장을 형형색색 물들인 청년 여성들에게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들도 찬사를 보냈다. 청년 여성들이 이끈 응원봉 문화는 순식간에 광장 전체에 번졌고, 결국 이번 탄핵광장을 상징하는 이름은 '빛의 혁명'이 됐다.
청년 여성들은 왜 계엄이라는 압도적 폭력에 굴하지 않고 광장으로 모였을까. 지난해 여의도에서 윤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기 시작해 남태령에서 밤샘 시위를,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키세스 시위대'로 5박 6일 시위를 한 대학생 송채연(22)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초등학생 때 세월호 참사를 지켜봤고 중학교 때 N번방과 버닝썬이 터졌으며, 대학생이 되자 이태원 참사로 또래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딥페이크가 공론화됐지만 국가는 우리를 또다시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2030 여성이 일어나는 것이 신기하다고요? 아니요.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우리는 국가의 태만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고 절대 가만히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당함에 무릎 꿇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남태령에 갔고 밤새 서로를 지켜줬습니다."(2025년 1월8일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밤샘 농성 연대 발언)
<프레시안>이 만난 20대 여성 5인도 송 씨와 같은 이유로 광장에 나섰다. 이들은 "끝없이 벌어지는 여성혐오 범죄와 교제폭력에도 윤석열 전 대통령은 여성혐오 기조를 보여왔고, 이에 분노해 목소리를 내왔던 청년 여성들이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맞서 큰 연대를 이뤄냈다"고 입을 모았다.(☞관련기사 : "부끄러워서", "후회하기 싫어서" 청년 여성들은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광장이 만들어낸 대선, 광장 이끈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웠다
부당함에 무릎 꿇지 않고 서로를 지키며 결국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여성들은 이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죽지도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외친다. 이에 윤석열 퇴진 집회를 주도한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12개 사회대개혁 분야 중 하나로 '모두의 존엄과 공존을 위한 성평등·인권사회'로 내세웠다. △여성가족부 강화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 포괄입법 △비동의강간죄 개정 △성착취산업 해체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 등이 여성들이 새 정부에 바라는 핵심 과제다.
'여성가족부 해체'를 내세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교제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끊이지 않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1년간 언론 보도를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친밀한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 살인미수 등으로 생존한 여성은 374명이다. 디지털 합성 기술 '딥페이크'와 신원 파악이 어려운 플랫폼 '텔레그램'을 결합한 성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여성은 온라인에 얼굴 사진을 올리는 것조차 걱정해야 했다. 대낮에 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 의해 벌어지는 여성 살해도 계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품에 남성을 비하하는 상징을 넣었다는 남초(남성 중심) 커뮤니티의 억지 주장은 여성들의 일할 권리마저 빼앗았다. 자신이 그리지 않은 집게손 그림으로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겪은 '넥슨 집게손 마녀사냥' 피해자 A 씨는 19일 <프레시안>에 "해당 사건의 여파로 지난해 말 직장에서 나왔다"며 "업계에 소문이 났을 텐데 어디서 애니메이터로 일할 수 있을까 걱정해 구직 활동도 망설이게 됐다"며 막막함을 드러냈다.
대선주자들은 민주주의를 지켜낸 여성들의 호소를 공약에 반영하고 있을까. 송 씨는 19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아쉽다"라는 말과 함께 탄식을 반복했다. 후보 대다수가 주요 공약에서 여성정책을 내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정책을 내세웠다가 표가 갈릴 수 있다는 우려는 이해해요. 그래도 광장에 나와 탄핵을 주도한, 지금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성들의 의견도 많이 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줘라'고 호소하는 게 아니에요. 인권적이고 도의적인 측면에서 비동의강간죄는 너무나 필요한 제도거든요. 표 때문에 당연한 정책들을 덮어두는 건 한국이 인권 측면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요?"

"여성을 '민원인' 취급하는 현실 정치 모욕적"
현재 대선 후보 가운데 여성가족부 강화, 임신중지보장법 도입 등 여성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한 제시한 주요 후보는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뿐이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여성전문군인을 확대하는 '여성희망복무제'를 공언한 것 외에 여성 관련 정책이 전무하다. 한 술 더 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1호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제시해 여성정책의 퇴행을 예고했다.
탄핵 광장을 일컫는 '빛의 혁명' 정신을 잇겠다고 천명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여성 정책도 한계가 뚜렷하다. 이 후보는 고용평등 임금공시제 도입, 교제폭력 대응 강화 등 일부 여성정책을 제시했으나 여성가족부 강화, 임신중지보장법 도입, 비동의강간죄 도입처럼 일부 반발이 예상되는 정책은 공약에서 모두 제외했다.
민주당의 경우,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을 외면한 청년 남성의 눈치를 보느라 여성정책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정책을 포함한 민주당의 모든 대선 공약은 중앙선대위 정책본부가 결정한다. 민주당 정책본부 관계자는 지난 12일 10대 공약 발표 이후 기자들과 만나 "여성에 대한 보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또래 남성들이 상처를 많이 받고 있다"며 "남성들에 대한 존중도 챙겨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비동의강간죄' 도입 등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반감을 예로 들며 "이런 것들이 참 어렵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고민이 필요하다"고 헀다.
결국 여성들은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고도 대선주자들에게 '여성정책을 확대해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형국이 됐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프레시안>에 여성 정책이 대선 후보들의 주요 공약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 "의사결정과 국정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그룹에 여성의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권김 소장은 "계엄 이후 정치를 여기까지 만들어낸 청년 여성들이 꽤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 정국에서 젠더 의제가 사라졌다는 건 기존 기득권이 여전히 바뀌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권김 소장은 의사결정구조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면서 정책 수립을 호소하는 '민원인' 위치에 가두는 현 정치제도가 여성들에게 "모욕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대표될 수 있고, 현실 정치에도 이어질 수 있는 정치 환경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이 사회 미래를 고민하는 의사결정구조에 여성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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