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참으로 할 일이 많다. 퇴직하고 정말 과로사할 정도로 일이 많다. 아내 말대로 돈 되는 일은 없다. 그냥 바쁜 것이다. 여기저기 강의 다니고, 글 쓰고, 아침에는 문자 전송하고, 정치 계절이 되다 보니 할 일이 또 생겼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로 어제는 아내와 홍성을 다녀왔다. 벌써 도로에서는 선거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홍성에서 당진을 통해 인천으로 오는 중이었는데, 저녁 7시 반이 넘었는데도 훤하다. 아내가 말한다.
(아내) 어머나, 정말 해가 길어졌네!
(나) 밤이 짧아진 거지.
아내와 전공이 같은 관계로 가끔 이런 말장난을 잘한다. 우리말은 참 재미있다. 해는 늘 같은 크기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 우리 마음대로 해가 커지고, 길어지고, 짧아지기도 한다. 밤이 짧아졌다고 하기는 하지만 ‘달이 짧아 졌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낮이 길어졌다’고 표현 하는 사람은 있다. 그렇다면 ‘해’와 ‘낮’은 동격인가? 참으로 재미 있는 우리말이다.
아내는 가끔 이런 말도 자주 한다.
어머나, 치마가 작아졌어.
그게 치마가 작아진 거야? 당신이 살찐 거지.
요렇게 필자가 한 마디 거들고는 얻어 터진다. 사실이지 그게 어디 치마가 작아진 것인가? 자신의 똥배가 나와서 작아진 것처럼 느낄 뿐이지, 절대로 치마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의미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언어(단어)의 의미를 자신에게 맞춰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기준)에 맞춰 단어의 의미를 풀이하려고만 한다. 일종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예를 들어 커피를 생각해 보자. 커피라는 것은 원래는 ‘커피콩’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적당량의 물과 적당량의 볶은 커피를 갈아서 넣은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거기에 설탕이나 프림(?)을 넣은 것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커피를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다. 자신만의 커피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양촌리 커피’(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시골 마을을 따서 믹스 커피를 그렇게 말한다.)를 생각하고, 우리 학생들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리로 있을 것이고, 필자의 아내는 ‘라떼’(? 커피에 우유를 넣은 것)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에스프레소’를 생각하기도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카푸치노’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커피라는 하나의 개념을 놓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 기호에 맞는 커피만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의미론이 필요한 이유다.
아버지가 목욕탕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아이고, 시원하다”라고 하면, 아이는 아버지 말만 믿고 ‘뜨거운 물’에 펄쩍 뛰어든다. 그리고는 “앗, 뜨거워” 하고 도로 나오면서 “요즘은 믿을사람이 없다니까……”하면서 투덜거린다. ‘시원하다’는 개념이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콩나물국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고 하고, 100도의 사우나에 들어가서도 ‘시원하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탁 트인 경치를 보면서도 ‘시원하다’고 한다. 이때 각각의 개념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아이고, 어렵다.
요즘은 필자의 바지도 허리가 작아지는 걸 어쩌나? 투덜투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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