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의 박기(69) 이장은 얼마 전 파밭의 파를 다 뽑았다. 임시주택 5동을 설치할 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아내가 파를 납품하려고 넓게 일군 밭이었다.
박 이장도 집 두 채가 전소된 이재민이다. 하우스 5채, 사과나무 500주, 묘목값으로 낼 현금 1000만 원, 각종 농기계까지 모두 불에 탔다.
지난달 24일, 사촌 1리엔 제일 먼저 박 이장의 밭에 8평짜리 임시주택이 들어서고 있었다. 콘크리트로 닦인 기반 위에 은색 철골 구조가 설치돼 있었다. 사촌1리 전소된 12채 중 집터가 여의치 않은 다섯 가구의 임시 거처였다 .
박 이장은 "5월 20일경 입주가 이뤄질 것 같다"고 말했다. 밭을 집터로 내놓은 이유를 묻자, 그는 "주민들이 갈 데가 없고 누가 땅을 제공해 주지도 않고,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는데, 그럼 내가 해야지"라며 "주민이 마을에 있어야지"라고 답했다.
점곡면은 의성군에서도 피해가 큰 지역 중 하나다.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뉜 사촌1리는, 윗마을은 한 집을 제외한 9채가 전소해 사실상 마을 전체가 없어졌다. 사촌1리 윗마을은 초록색 이파리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검게 탄 소나무 숲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시민 도움 손길에 "고마워 미치겠다"
임시주택이 이제야 건설되기 시작해, 의성군 이재민 330가구는 친척 집, 숙박시설, 체육관 등으로 아직 흩어져 있다. 점곡면 점곡체육회관에는 2~3평 들이 텐트 일곱 동이 남아있었다. 맞은 편엔 라면, 햇반 등의 식료품 박스가 십수 개 쌓여 있었다.
이날 홀로 텐트에서 쉬고 있던 주민 A 씨는 모두 농번기라 밭일을 나가거나 산불로 죽은 자두나무, 사과나무 가지를 베러 나갔다고 전했다.
A 씨는 인터뷰를 했던 10여 분 동안 울음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쉬고 다시 말하려 해도 곧 목이 잠겼고 눈물을 흘렸다. A 씨는 "(지난 고생은) 말도 마이소"라며 "어떻게 말을 더 못 하겠어요"라고 했다.
밭일 도중 잠시 체육관에 들른 주민 B 씨도 지난 한 달 생활을 얘기하다 목이 메어 여러 번 말을 삼켰다. B 씨는 주변의 도움과 지원을 얘기할 때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나서 고맙단 말도 못 했다"며 울먹였다.
"소를 하고 있는데 십시일반으로 짚을 막 실어줘요. 멀리서 막 트럭으로 한두 개씩 짚을 싣고 오는 걸 보는데... 와서 위로하는데... 어후... 내가 베풀 땐 몰랐는데 받아보니까 막 진짜... 어후... 고마워서 미치겠더라고... 가슴 아프죠."

'최대 3600만 원' 주거 대책에 분노 쌓인 현장
가장 필요한 게 뭐냐는 말에 B 씨는 "집이죠"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민들이 정부의 주거지원 대책에 가장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고 전했다. 재난안전법상 전소된 가구에 2000만~3600만 원까지 주거비를 지급하는 규정이다.
"저도 건축을 하는데, 평당 최하가 500만 원이라 해도 30평 같으면 1억 5000만 원 아닙니까? 근데 최대가 3600만 원이라는데 그 기준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요새는 신축하게 되면 내진설계를 한단 말입니다. 심하게는 비용이 2배 이상 차이 난단 말입니다. 이삼천 되는 걸로 뭘 할 수 있습니까?"
아직 지원대책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B 씨는 "이미 (기존대로) 다 정해놨겠죠. 우리만 모를 뿐이죠"라고 씁쓸히 말했다. B 씨는 "집을 안 짓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며 "지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희망도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농사 지원도 충분하진 않다. 당장 비료, 농약을 사야 하니 여유있는 농가는 저리 생활비 대출을 받지만, 1년 후 상환이라 빌리지 못하는 농가도 있다. 의성군은 일부 농기계에 한해 구매비 70%를 지원해주는 제도를 긴급 신설했다. B 씨는 "농사를 해야 하니 급한대로 사긴 하지만, 자부담 30%가 부담스러운 집들은 또 못산다"며 "기계 대수도 충분치 않아 농사가 제대로 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농기계 외 삽, 호미, 저울, 바구니, 공구 등은 제공되지 않아 모두 스스로 장만해야 한다. 피해 마을들에선 '중앙 행정기관이 전국의 중고 농기구들을 어떻게 조달해줄 순 없느냐'는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B 씨는 국회와 정부 등을 두고 "너무 무관심하다"며 "다 (대통령) 선거 때문에 난리부르스를 하는데 (이재민들) 진짜 요만큼도 생각 안 한다"라고 말했다. B 씨는 "그래도 우리 여기(체육관)는 호텔"이라며 "마을이 80%가 전소한 구계리 같은 동네는 마을회관에 여자방, 남자방 이렇게만 나뉘어서 다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여름 수해 걱정... 정치권 원망 가득 "사진 찍고 가면 끝이냐"
마을에선 산사태, 여름 장마, 홍수 등 추가 재난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실제 불이 난 산의 메마른 흙과 자갈이 산 아래로 계속 굴러 내려오는 광경은 마을에서도 자주 보였다.
사촌리에서 8km(킬로미터) 떨어진 구계리, 구계다리 인근에서 만난 주민 김아무개(60대) 씨는 홍수를 걱정했다. 김 씨는 "불난 나무들 벌목하죠? 비 오면 얘들이 개천을 타고 떠내려올 거다"라며 "이 다리 밑에 나무 3개만 걸치면 그냥 댐이 된다. 바로 물 넘친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집이 석면이 포함된 슬레이트 지붕을 썼기에, 김 씨는 "석면 누출이 이미 많이 돼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구계리도 포크레인으로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계리는 전체 120여 가구 중 80여 가구가 전소됐다. 임시주택은 아직 들어서지 않았다. 이날 구계1리 마을회관에선 주민 4명이 대형 비닐봉지 스무여 개에다 옷, 치약, 샴푸, 수건 등을 일일이 배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아파트 부녀회, 지역 협회 등에서 보내온 택배들도 회관 앞 정자에 쌓여있었다.
김 씨는 구계리 또한 턱없이 부족한 공적 지원을 염려하고 있다며 마을에서 얘기되는 슬픈 농담을 전했다.
"그럼, 대책이 뭐냐? 첫째, 일찍 죽어야지. 둘째, 요양원 일찍 가야지."
구계리에선 대책 준비 초동모임이 꾸려졌다. 주민의 의사를 공유하고 수렴해 정부와 지자체에 전달할 기구를 마련하려고 준비 중이다. 점곡면 일부 마을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박기 이장은 정부, 국회를 향해 "제발 정치(질만)하지 말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여기 내려온 국회의원들 아무도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도, 책임도 말하지 않았다"며 "사진만 찍고 가면 끝이에요?"고 질타했다. 박 이장은 "마을 재건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말했다.
"법을 만들어서 지원할 것이라고 말은 하는데, 내 죽고 난 뒤에요? 제발 생색내기 하지 말고, 진정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아 달라. 정치인들은 사진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내가 우리 주민들한테 '싸우는 건 내가 싸울게, 우리 정말 열심히 농사짓자'고 했다. 우리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주택 하나만큼은 돌아갈 수 있게 뭐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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