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JD 밴스 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의 설전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확연한 인식 차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젤렌스키는 "침략자"이자 "살인자"인 푸틴에게 유리한 협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젤렌스키의 푸틴에 대한 혐오감을 협상의 걸림돌로 봤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는 러시아에 대한 전략 입장 차이가 강하게 깔려 있다. 유럽과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목표는 '러시아의 약화'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강력한 경제제재와 더불어 막대한 군사 지원을 통해 '승전'을 도모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트럼프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본다. 지금까지 미국이 단극체제를 유지하려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부었는데 세계 질서의 다극화는 불가피해지고 있고, 미국이 계속 여기에 매달리면 '손해 보는 장사가 계속될 것'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트럼프는 러시아가 다극체제의 한 축이 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한다. 러-우 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추구하는 것도 이러한 대러 전략 변화의 일환인 셈이다.
트럼프가 푸틴과 친구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역 키신저 전략'을 거론한다. 1970년을 전후해 닉슨 행정부가 대소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았던 것처럼, 앞으로는 대중 봉쇄에 집중하기 위해 대러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번지수를 잘못 짚은 분석일 수 있다. 우선 당시와 오늘날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60〜70년대에 중소 관계는 영토 분쟁을 벌일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면, 오늘날의 중러 관계는 역대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착되어 있다.
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닉슨 행정부가 대소 봉쇄를 강화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닉슨 행정부는 소련 및 중국을 상대로 '동시적인 관계 개선'에 나섰다. 중국과 관계정상화를 추구하면서도 소련과는 전략무기 통제 및 감축 협상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도 거뒀다. 미중 관계 정상화와 미소 데탕트가 닉슨·키신저의 목표였던 셈이다.
트럼프의 접근도 이와 닮아 있다. 트럼프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푸틴 및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만나 핵군축을 단행하고 국방비를 크게 줄이자고 합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3대 핵보유국이자 군비 지출 국가들인 미·중·러 정상들이 모여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해보자는 야망을 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닉슨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트럼프도 러-우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야 한다고 여긴다. 젤렌스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면전에서 면박을 주는 것도 모자라 군사 지원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을 둘러싼 갈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전후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가입이나 미국의 안전보장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나토의 동진이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이었다고 보면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나 미국의 안전보장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여긴다.

이렇듯 트럼프 행정부는 미·중·러 중심의 '지정학적 다극화'가 세계 질서의 불가피하고도 바람직한 미래라고 본다. 그런데 국제질서의 다극화는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전략적 목표이기도 하다. 기존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는 달리 트럼프가 이들 나라의 지도자와 친분을 내세우면서 거래를 시도하겠다고 밝히는 데에는 '다극화'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셈이다.
트럼프가 푸틴과 친해지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푸틴은 트럼프가 협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국, 조선, 이란의 지도자가 가장 친한 사람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이들 나라의 지도자를 상대로 거래를 시도할 때, 푸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트럼프는 동맹·우방을 상대로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경쟁국이나 적대국을 상대로는 '거래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 진영이 불만과 불안만 쏟아내고 있을 때는 아니다. 세계를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로 봤던 이분법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적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때이다. 이게 '각자도생의 시대'에 가장 현명한 생존 전략이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 신간을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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