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오션, ESG 보고서에 원청 책임 강조해놓고 현실 속 하청 노동자는 외면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공급망 실사 ② 한화오션의 두 얼굴

"한화오션이 협력사-하청지회 간 단체교섭 관여하는 것은 협력사의 독자적인 경영권과 인사권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 한화오션은 협력사들의 독자적인 경영권 및 인사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협력사들과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간 교섭의 장이 마련될 수 있도록 당사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을 적극 검토하고 있습니다."

한화오션이 지난 1월 10일 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참고자료 내용이다. 아무 이벤트도 없이 그냥 발표한 자료는 아니다. 올해 1월 7일부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이 한화오션 본사 앞에서 단체교섭 타결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하자 지회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낸 것이다.

한화오션이 보도자료에서 3~4회에 걸쳐 강조한 단어는 '협력사 독자적 경영권·인사권'이었다. 만일 하청지회 단체교섭에 관여하면 이걸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원청과 하청 사이에 선을 확실히 긋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내용 상반된 2개의 한화오션 문서

하지만 이 보도자료와는 맥락을 완전히 달리하는 한화오션의 다른 문서가 있다면 어떨까. 아래 문장은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한 뒤 작년 5월에 한화오션 이름으로는 최초로 발표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Sustainability Report) 2023(이하 보고서)>에 실린 내용이다.

"한화오션은 자체적으로 신규 협력사 및 협력사 신입사원 등을 위험 발생 가능 그룹으로 분리하여 집중 관리하고 그에 필요한 사항을 지원함으로써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보고서 52쪽)

앞의 보도자료에서는 협력사 경영권·인사권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놓고, 이 보고서에서는 노동안전·산업안전 실현을 위해 신규 협력사와 협력사 신입사원을 '위험 발생 가능 그룹'으로 집중 관리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야드 내 안전 실행력 향상을 위해 조선소장을 비롯해 생산·HSE 임원과 관련 직원, 협력사 대표 등이 여러 조로 나뉘어 사업장 구석구석에서 위험요인을 찾아내고 개선해 나가는 Area Audit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보고서 48쪽)

이 대목에서는 원청인 한화오션과 협력사 대표들이 여러 개의 조로 편성되어 합동으로 사업장 위험요인 발굴과 개선에 나서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협력사와 아무 관련 없다고 선을 긋고, 다른 쪽에서는 인사권·경영권을 넘어 원·하청이 마치 한몸처럼 움직인다고 발표한다. 대체 어느 쪽이 한화오션의 본모습인 걸까.

세부 항목에 점수까지 매겨 200개 협력사 평가

그뿐이 아니다. 보고서 64쪽(아래 그림)에 따르면, 한화오션은 200개에 육박하는 사내·외 협력사들에 대해 4가지 항목, 즉 생산(30점), 품질(20점), 안전(20점), 재무(30점) 부문에 100점 만점으로 점수까지 산정해 매년 1회 이상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도 공개한 바 있다.

▲ 한화오션, <지속가능경영보고서(2023)> 64쪽.

한화오션이 이렇게 세부적으로 배점까지 하여 점수를 매기는 일을 시간이 남아서 하는 건 아닐 것이다. 2023년의 경우 191개의 협력사(사내 127개, 사외 64개)를 평가해 점수가 제일 높은 그룹에는 S 등급을, 점수가 가장 낮은 그룹에는 D 등급을 매긴다. 이미 '리스크가 높은 협력사'로 2022년에 28개, 2023년에 27개가 평가된 것으로 나온다.

점수가 높은 협력업체에는 상이 주어지지만 "2회 이상 D등급으로 평가될 시 거래를 해지하는 페널티"가 기다린다. 아, 정말 무시무시한 일 아닌가. 생산·품질·안전·재무는 협력사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인사권·경영권에 해당하는 영역인데, 이걸 평가해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는 제도를 운영하면서 협력사 인사권·경영권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니?

ESG 보고서와 공급망 실사가 만나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과 공시를 상장기업 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상대로 의무화하고 있는 유럽연합이나 브라질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 보고서 작성이 기업 자율에 맡겨진 상태이다. ESG 보고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보고서는 기업이 환경·안전·인권 관련 국제규범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의무도 아닌데 왜 한화오션은 이런 보고서를 작성하고 공개한 걸까? 그건 ESG(환경·사회·거버넌스) 지표가 기업의 투자기준으로 활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화오션만이 아니라 현대차·삼성전자·카카오 등 웬만한 국내 대기업들은 모두 이 보고서를 작성·공개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공급망 실사' 원리와 ESG 보고서가 만나면, 대기업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공급망에 위치한 협력사들까지 국제규범을 이행하고 있는지 내용을 담게 된다. ESG와 공급망 실사 모두 팬데믹 시점을 전후해 국제적 트렌드로 자리잡힌 것이다. 따라서 이들 보고서와 내용들 역시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화그룹은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한화오션으로 기업 명칭을 바꾼 직후인 2023년 10월, 중대재해 제로, 환경규범 100% 준수 등의 내용이 담긴 '안전·보건·환경(HSE)' 경영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한화솔루션·한화시스템 등의 계열사들은 2021년부터 ESG 보고서를 공시하기 시작했는데, 한화오션은 작년에 처음으로 보고서를 공개한 것.

협력사에도 ESG 행동규범 요구

"상생경영을 위해 협력사들에게 ESG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핵심 협력사 대상 ESG 평가 비율을 100%로 제고하고자 합니다. 또한 2024년에는 협력사들이 지켜야 할 인권, 안전·보건, 환경, 윤리, 경영관리 내용을 포함한 ESG 행동규범을 모든 협력사들이 동의하고 준수할 수 있게 신설할 계획입니다." (보고서 63쪽)

한화오션의 ESG 보고서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협력사들에게도 ESG 행동규범을 부여하고 이행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직 그 행동규범이 무엇인지 공개된 바는 없다. 하지만 참고할 만한 중요한 자료가 있다. 한화오션보다 일찍부터 ESG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한화솔루션·한화시스템의 경우 모두 '협력사 행동규범'이라는 자료를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화솔루션 협력사 행동규범> 일부

한화솔루션과 한화시스템의 '협력사 행동규범'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한화오션이 신설할 ESG 행동규범 역시 대동소이할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보면 협력사들은 소속 노동자에 대해 성희롱·학대·강압·폭언을 해선 안 되며, 성별·인종·연령·종교·신분상 이유로 차별을 해서도 안 된다.

아울러 협력사 행동규범에는 협력사 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과 집회·결사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단체교섭에 개입하는 것은 협력사 인사권·경영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주장해온 한화그룹이, 다른 계열사에서는 협력사에 이러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공급망 우두머리의 사용자책임

"협력사에 잦은 산재사고를 막기 위해 원청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업무."

"협력사의 부족한 역량을 지원하려는 원청기업의 선의."

"리스크 관리 차원이지 인사·경영권 침해 아니야."

벌써부터 이런 볼멘소리와 항변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오해 없으시길. <인사이드경제>는 한화오션이 협력사의 인사권·경영권에 개입했다고 비난할 의도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사 인사와 경영에 개입하는 것이 옳다.

게다가 '공급망 실사' 원리가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잡히고, 머지않아 한국 역시 ESG 보고서 작성·공개의 법적 의무화 역시 확실시된다. 그렇다면 국제규범으로 인정된 인권과 환경 지침을 이행하기 위해 공급망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원청 기업들이 협력사들 인사·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협력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불가피하다. 즉, 원청 기업들은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협력사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책임을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사·경영권 개입이 불가피하다면 사용자로서의 책임도 함께 지라는 것.

한화오션의 ESG 보고서에는 '협력사'라는 단어가 무려 100회 넘게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부문은 '안전보건'과 '공급망 관리' 파트였다. 그래서일까? 대우조선해양 시절 '노동안전' 의제에 대해서만큼은 하청지회에 대한 사용자책임을 원청 기업도 부담해야 한다는 중노위 판정도 있지 않았던가.

여기에 '공급망 관리'가 더해진다면 한화오션 ESG 보고서엔 원청의 사용자책임을 입증할 증거가 차고 넘친다. 노조법 2조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공급망 실사 원리라는 글로벌 트렌드를 도입하면 하청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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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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