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1000일째 되는 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 억제와 관련한 국가 정책의 원칙을 개정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사용 사거리를 늘려주면서 이에 크게 반발했던 러시아가 대응을 위해 꺼낸 조치로 풀이된다.
19일(이하 현지시각) 러시아 매체 <리아노브스티>통신과 <스푸트니크> 등은 푸틴 대통령이 핵 억제 분야의 국가 정책 원칙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으며, 이 법령이 공식 웹사이트에 게시됐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법령에는 "핵 억제 분야의 국가 정책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라며 "러시아는 핵무기를 억제 수단으로 보고 있으며, 핵무기 사용은 극단적이고 강제적인 조치"라고 규정돼 있다.
이어 "잠재적 적의 러시아 및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억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 우선순위 중 하나"라며 "러시아 또는 벨라루스에 대한 공격이 발생하여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쿠르스크를 침공한 우크라이나와 관련, 당장은 아니지만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는 "러시아 또는 그 동맹국에 대한 공격은 전체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된다"며 "핵무기가 없는 국가가 핵무기가 있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또는 그 동맹국에 대해 침략하면 이는 공동 공격으로 간주된다"며 미국 및 서방의 무기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를 겨냥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자국 또는 동맹국에 대한 대량 살상 무기 사용에 대응하여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며 "러시아는 러시아를 적으로 간주하는 국가, 블록 및 동맹 등 잠재적인 적에 대해 핵 억지력을 행사한다"고 적시했다.
러시아는 "군사적 위험 및 위협에 대한 핵 억제력의 융통성은 핵 억제 분야에서 러시아의 국가 정책의 기초에 기인한다"며 "핵 억제에 대한 국가 정책은 핵 억지력이 충분한 수준에서 핵전력의 잠재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핵 억제력은 잠재적인 적이 러시아에 대한 침략 시 보복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배치된 핵 억제력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핵 억제력 원칙에 따라 시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지난 9월 우크라이나 측이 미국 등 서방에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무기 사용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예고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핵 억제 분야가 "현실에 맞춰 조정돼야 한다"며 핵을 가지지 않은 국가가 핵을 보유한 국가의 지원으로 러시아를 공격하면 지원한 국가도 공격자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새롭게 넣을 것을 시사한 바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사거리 300km의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의 러시아 내 목표물 공격 사용을 승인한 이후 러시아의 핵 교리가 변경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위험도가 한층 더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다음 정부인 트럼프 측은 현 정부의 이같은 결정에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한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은 18일 미 방송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의 조치가 "확전 사다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X'의 본인 계정에 "군산복합체는 아버지(트럼프 당선인)가 평화를 만들고 생명을 구할 기회를 갖기 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려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 방송 CNN은 이날 "미국의 미사일을 사용해 러시아 내부를 더 깊숙이 타격하는 것은 말처럼 매우 도발적인 일"이라며 "트럼프 당선인은 평화회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위험성이 훨씬 높아진 전쟁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러시아의 본토가 미사일 공격을 받더라도 푸틴 대통령이 바로 핵으로 반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군사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실비 코넬 대학교 교수는 푸틴 대통령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핵무기 공격으로 돌려받을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 도시에 대한 공격을 확대할 수 있지만 핵무기를 사용할지는 의문이라고 미 정치 전문 매체 <더힐>에 말했다.
미국의 사거리 확대 승인 시기가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러시아가 전장에서 핵심 역할을 할 중요한 전투기를 미사일 사정권 밖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번 조치가 전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로저 위커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날 성명을 통해 바이든 정부의 이번 조치가 "푸틴의 불법적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의회가 오랫동안 승인한 품목과 지원에 대한 정부의 고의적인 태만을 변명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2022년 처음으로 ATACMS 미사일을 요청했다. 미 정부는 이후 2023년 10월 우크라이나에 해당 미사일을 제공했지만 사거리에는 제한을 뒀다.
한편 드미트리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는 19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러시아 침공 1000일 행사에서 한국에 무기 지원을 거듭 요청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방한 예정인 우크라이나 특사단이 한국에 무기를 요청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방공 레이더나 방어 목적 미사일 등은 비교적 지원이 용이하며, 이 같은 장비들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KBS가 보도했다.
그는 "한국이 제공한 모든 지원에 감사하다"며 "그러나 이 같은 지원이 특히 군사 물자 측면에서 더 확대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해 방어용 무기 지원을 강조했다.
무기 지원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 특사단의 방한 일정에 대해 포노마렌코 대사는 "가장 적합한 일정을 제안하고 이를 발표하는 것은 한국 정부에 달려 있지만, 윤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에서 돌아온 이후 분명히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는 북한군의 러시아 투입 이후 단계별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번 미국의 미사일 사거리 확대 승인 조치가 러시아 쿠르스크에 진입한 북한군에 대한 대응으로 전해지면서, 한국이 북한군을 명분으로 무기를 지원하기는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이 우크라이나의 조기 종전을 언급하고 이를 대외 분야의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특사단 방한과 관련해 이날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소통 중이며 아직까지 언제 방문할지 구체적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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