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역사의식

한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1968년 12월 5일 제정, 이하 <헌장>)의 첫 대목이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 마지막 겨울 방학을 앞두고 담임 선생이 이를 암송하지 못하면 학교가 파함에도 귀가하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던 기억이 여전하다. 반세기가 넘어 다시 읽어보니, 젊은 시절에 가졌던 격한 반감이 다소간 의아스럽다. 국가주의와 능률주의, 특히 냉전적 시각이 거슬리나, 우리 사회의 민주화로 그것이 폐지된 후에도 2007년까지 국민의례라는 이름 아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라고 맹세했던 일과 비교하면, <헌장>의 표현은 차라리 절제되고 온건하다. 심지어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구절은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그 정치적 상부구조의 현실을 직시하기에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한 개인의 삶의 질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어느 집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으니 말이다. <헌장>이 격렬한 반발을 부른 일은 제정 및 추진의 독단성에 더해, 그것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핵심적인 상징의 하나가 되어 일체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에 송기숙 선생을 비롯한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그것이 "민주 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우리의 교육지표>, 1978년 6월 27일)라고 비판했고, 일부 구속되거나 전원 해직됐다.

누군가 다소간 풍자적인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난 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1) 맞는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조물주의 시간 세계에 내던져진다. 그 시간은 평평하고 일정하며 끝도, 매듭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냥 태어나지만, 우리는 그의 탄생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시간은 균질적이지 않고 매듭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울퉁불퉁하며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 수 있다. 시간성이 인간 정체성의 고유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은 20여만 년 전에 이 지구에 출현한 이래, 각자 평생 사귈 수 있는 지인의 수가 결코 150명을 넘을 수 없음에도 '신'이니, '인류'니, '한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자신보다 비할 데 없이 큰 실재를 상상할 수 있는 '뒷담화'의 능력을 부여받아, 선배인 네안데르탈인과는 달리 대규모 조직을 꾸려 지상의 패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인간의 시간 의식 역시 이 초월적 사고능력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2)

인간은 그런 능력을 유적 정체성의 일부로 갖고 있었지만, 수렵·채취 단계에서 '신석기 혁명'을 통한 농경 정착 단계를 거쳐 초기 문명의 탄생('청동기 문명')과 그 실패('암흑시대'의 도래), 이후 이를 극복한 철기 고전 문명의 등장('축의 시대', 기원전 900-200년)으로 극소수 지배층의 수취와 대다수 피지배층의 사회적 재생산이 양립 가능한 '평형상태'를 이룩해가는 위대한 여정에서 시간 의식의 가상 범위와 성찰 능력을 키워 역사의식으로 끌어올렸다. 고전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인류의 자기 정체성을 빚어냈고, 보편 고등종교는 전통 농업문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이 됐다. 이제 인류는 이승, 더 나아가 우주 속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잇고 그것에 초월자의 의지를 목적으로 세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극할 수 있게 됐다. 목적은 저승에 가서야 실현될 터라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명증성을 지녔고, 노동에서 유일하게 해방됐던 지배자든 이러저러한 온갖 형태의 예속상태에 처했던 무수한 민초든 미미한 기후 불순의 날갯짓만으로도 식량 생산의 파국을 부르곤 했던 폐쇄회로의 농업생태계 속에서도 일정한, 하지만 기존질서를 이럭저럭 유지 가능한 수준의 정서적이고 실질적인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다. 종종 예속의 사슬을 부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결국 낮은 생산력에 발목이 잡혀 해방의 외침만이 은밀히 후세에 전해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문명 세계 저편에서 비록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지만" 자유와 자존의 흔적은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상태였음을 입증하듯이 말이다.3)

유럽에서 근대세계의 떠오름

'위대한 농업문명'은 중국 송 대(960~1279)에 절정에 달했다. 송나라는 12세기 초에 1억 명 이상의 주민을 거느렸던 역사상 최초의 정치체며, 당시 세계 최대도시 킨사이(杭州)의 화려한 면모는 송이 멸망한 지 얼마 안 돼 현지를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가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 도시에 160만 가구가 살고, 다리가 1만 2,000개, 목욕탕이 3,000개소, 점포가 1만 2,000개에 달한다는 그의 전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달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에게도 믿기지 않아, 그는 걸핏하면 '백만'을 운위했기에 '떠버리'라는 의미로 '밀리오네'(Milione), 곧 '백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전통 중국 경제의 규모는 19세기 후반까지도 세계 최대였고, 유럽이 본격적으로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1800년 당시만 해도 유럽 전체 규모의 2.5배에 달했다. 하지만 전통 경제의 한계를 돌파한 것은 중국(또는 인도)이 아니라 유럽, 특히 북서 유럽이었다. 이 글에서 목표가 '근대성'의 역사적 위상을 가늠하는 일이라, 이른바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문제는 논외로 한다.4)

'유럽의 대두'의 핵심 요인은 한마디로 말해 '자유로운 임노동'의 창출에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절대다수의 노동하는 자는 온갖 형태의 종속 아래에 있었고 자유는 극소수 지배층의 특권이었으니, '자유 노동'의 원리는 전통 시대로 보자면 그야말로 형용모순의 새 경지였다. 그것의 떠오름은 온갖 '경제외적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요청하기에, 단지 사회경제적 변화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질서의 전환, 더 나아가 그것을 떠받치는 온갖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변모를 아우르니, 가히 문명의 '대전환'에 값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산업 문명'이 등장했다.

이 새 역사를 일군 유럽이 문명의 토대 작업을 마친 것이 겨우 서기 1000년 전후의 일이니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위대한 농업문명들과 비교하면 늦둥이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축적'의 측면에서 제국적 질서를 일구기는커녕 작은 통치 단위로 분해되는 경향을 보였기에 처음에는 지진아로 보였다. 하지만 유럽은 유라시아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전통 시대(기원전 800년 ~ 기원후 1700년) 내내 군사적 우위를 차지했던 유목민의 침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이른바 '자생적 발전'이라는 역사적 행운을 누릴 수 있었고, 가톨릭교회가 제국의 구실을 다하는 문명 구조 속에서 '영토 국가'라는 독특한 정치적 축적을 키워갈 수 있었다. '자생적 발전'이란 역사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긴밀한 조응을 보이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문명의 각 차원이 구조적 동시성을 이룬다. 유럽은 이미 15세기 중엽에 자신이 역사 발전의 새 단계에 들어섰다고 믿어 이에 '근대'(modern)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는 이제 유럽이 다른 문명에 비견할만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며, 그 회복을 지중해 고전 문명의 '재생'(Renaissance)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유럽 스스로 정체성의 내용을 특정 종교로부터 더 보편적인 '문명'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은 1750년경에 이르면 아직 덩치가 작아 다윗에 불과하지만 역사 발전의 최선두에 있기에 조만간 골리앗(예컨대 중국의 청)을 눕히고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5)

이 문명적 전환의 모습이 막 드러날 즈음, 예민한 이들은 그것에 '근대성'(modernité; Balzac, 1823)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이 용어는 고대-중세-근대의 그 유명한 3시대 구분법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새 장르를 가리키다가 곧 '변화가 정상상태가 되는 일련의 문명적 특징'을 뭉뚱그리고 급기야 오늘날에는 산업 문명의 완성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리키는 '근대화'라는 용어가 이미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등장하여 19세기 마지막 4분기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음도 특기할만하다. 이 '근대성'의 정립을 유럽에 초점을 맞춰 역사화하면, 제1차 근대성(시기적으로 16~18세기, '근대 초'early modern)과 제2차 근대성(장기 19세기, '진정한 근대'modern)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근대성의 계기는 잘 아는 대로 르네상스(14~16세기), 종교개혁, 지리상의 팽창이다. 유럽 내에서 이탈리아, 독일, 이베리아반도 지역이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 시기 유럽은 타 문명과 어깨를 겨눌 정도로 성장했음을 자각하면서 가톨릭교회의 분열과 국민교회의 등장으로 영토국가의 근거를 마련했고 유럽 차원에서 국제질서의 토대를 놓은,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으로 장기적으로 대서양 경제권을 일구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다른 '위대한 농업문명'(중국, 인도, 이슬람 등)에 맞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몸집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대전망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북서유럽을 최정점에 위치시킨 '생계양식'(mode of subsistence)에 입각한 경제발전 단계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기획으로서 근대화가 탄생한 것이었다.

제2차 근대성의 역사적 계기는 흔히 '이중혁명'으로 일컫는 '산업혁명'(영국, 1760~1830)과 '프랑스혁명'(1789~1799)이다. 유럽은 1800년을 전후로 자본주의 세계질서와 그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세계 제국이 아닌) 복수의 근대국가와 이를 기본 단위로 하는 '국가간 체제'(inter-state system), 그리고 국가 내부에서 자유로운 시민단에 의한 자기 통치라는 근대세계의 기본구조를 빚어냈고, 이후 경제와 인구의 절대적 성장, 생활수준의 향상과 철도·증기선을 통한 공간의 압축, '소통망'으로서 시민사회의 등장과 정치계급의 규모 확대, 계몽의 확산과 '국민문화'의 함양 등은 성장-정체-퇴행의 되돌기를 반복하곤 했던 전통 농업문명의 포락선을 돌파하여 '변화가 정상상태가 되는' 파천황의 경지를 열었다. 이 변화, 자칫 군주제만이 아니라 지배층 전체가 공멸할지도 모를 이 돌이킬 수 없는 근대성을 향한 흐름을 길들이기 위해, '국가 통계'와 '사회과학', 근대국가('지식국가') 욕망의 투사로서 근대 대학('교육과 연구의 결합'),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3대 이데올로기, 온갖 차원의 '운동'(movement), 심지어 반혁명 등이 새 문명 장치로 떠올랐다.6)

드디어 유럽의 선두에서 영국은 아편전쟁(1840~1860년)을 통해 자신보다 인구나 영토 면에서 수십 배나 큰 청나라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은 이 승리의 강렬한 목격자였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에 의하여 모든 민족을, 가장 미개한 민족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넣는다.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싼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重砲)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요청하는 선언이 부르주아지의 송가로부터 출발했음은 이제 근대성이 전(지)구적인 기획으로서 압축적 면모를 지니게 되었음을 웅변한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19세기 마지막 4분기에 이르러 전 지구를 분할하여 직·간접으로 식민화했고, 내부적으로 초등교육을 보편화하여 국민교육으로 끌어올리고 남성 노동자층 일부를 '국민'으로 포섭하고 보통선거권과 의회제를 결합하여 군주제, 공화국 등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는 공통의 정치적 조절 장치인 자유민주주의 단계에 이르렀다. 이로써 (산업)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공식·비공식)제국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문명국가'의 규준이 등장했다.

이제 '망하고 싶지 않거든'이라는 정언명령은 유럽 주변부와 비유럽의 민족들에게 '문명국가'의 정립이라는 매우 어려운 역사적 과제를 부과했다. 각기 근대성을 세우려는 이 필사의 거대한 노력이 한 세기를 지나면서 미국이 냉전기 원조 강령으로 내걸었던 '개발근대주의'가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그 근대성이 다종·다기, 혼합·착종적임을 확인하게 됐지만, 그것은 굳건히 유럽적 기원과 근거를 갖는 것이라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문명이원론으로 쉽게 길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근대화가 곧 서구화라고 강변할 일은 아니다. 다만 비유럽 세계의 인민들이 당혹함 속에서 마주쳤던 근대성이 제1차 근대성이라는 오랜 전사를 갖는 것이어서 특정의 역사적 조건을 운반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토 국가의 논리요, 그 기반인 국민(민족) 정체성의 형성이니, 민족주의가 계급·젠더·인종·종교의 분할선을 넘어 강력한 해방의 구호가 되었던 것은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이런 역사구조 탓이었다.7)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8)

19세기 마지막 4분기에 유럽의 각국은 대중민주주의의 도래에 즈음하여 민족사의 서술에 애썼다. 그것은 '국어'의 도입과 함께 국민 정체성을 보듬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었다. 공통의 과거는 언어의 공유 못지않게 시민들의 공감 능력을 함양하여 국수주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막 등장한 민주주의의 착근에 중요한 거름이 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유럽 각국의 민족사는 실제로 프랑스혁명에 버금가는 정치혁명을 대부분 겪지 않았음에도 예외 없이 근대를 여는 적극적인 역사적 계기로서 '혁명' 또는 '혁명적 과정'을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도입하였다.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용어상의 변화와 함께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새로운 인식이 과거를 새롭게 보도록 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촉발한 것 역시 '혁명의 본고장' 프랑스였다. 기조(François Guizot) 등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혁명의 격동이 일단 가라앉은 1820년대부터 혁명사 서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면서 맑스에 앞서 '부르주아혁명론'을 구축하는 한편, 프랑스혁명과 유사한 사건이나 역사 현상을 찾는 가운데 영국인들이 '대반란'(1642~1651)과 '명예혁명'(1688~1689)이라고 부른 것을 '영국혁명'으로 재발견하고 프랑스와 영국의 두 혁명이 1세기 이상의 시간적 차이에도 역사 발전의 같은 단계를 이룬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후 유럽 각국의 연구자들은 혁명을 근대성의 고유한 일부로 격상시켜 '지방화'하는 가운데 비유럽 세계가 역사 발전 압축의 기획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이 토대 위에서 트로츠키(Leon Trotsky)는 '불균등 결합발전'의 논리를 세워 '연속혁명'을 통한 역사의 도약을 일구고자 했다.9)

돌이켜 볼 때, 혁명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파동이나 주기의 양상을 보였다. 이는 근대세계가 구조적으로 '국가 간 체제'를 정치적 상부구조로 갖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까지 혁명은 유럽이나 유럽 지배하의 아메리카에서 일어났다. (제1차 '혁명의 시대', 1765~1850년) 그것은 유럽에서 대체로 이미 형성된 국민 정체성의 기반 위에서 입헌적인 부르주아 질서의 수립으로 이어졌지만, 아메리카에서는 식민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 그치기에 십상이었다. 바꿔 말하면 유럽의 여러 나라는 혁명을 통해 제2차 근대성을 이룩하여 어렵지 않게 '문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아메리카의 신생국가들은 출발부터 국가 건설의 매우 어려운 과제를 떠안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조차도 '남북전쟁'(1861~1865)을 거치고서야 제2차 근대성을 일굴 수 있었고, 멕시코는 독립(1821) 후 멕시코혁명(1910~1940)을 포함하여 거의 연속혁명에 가까운 노력을 보여야 했으며, 중남미의 적지 않은 나라는 여전히 '실패 국가'의 면모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역사상 전 지구에 걸쳐 독립적인 정치체의 수가 50개 정도로 가장 적었던 시기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나라가 100개에 달하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가히 영토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다. 세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세워 17세기 말엽까지도 유럽의 턱밑을 위협했던 오스만 튀르크나 중국 역사상 최대 강역과 인구를 자랑하는 청나라조차 유럽 열강의 반식민 상태로 떨어졌다. 유럽 열강과 비유럽 세계의 마주침은 무엇보다도 후자의 역사 발전과정을 교란, 왜곡, 심지어 단절시켜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기왕에 민족적 정체성이라고 할만한 것을 지녔던 곳은 그래도 일정 기간의 학습 과정을 거쳐 대응태세를 갖춰갈 수 있었으나, 아프리카처럼 현지 사정을 알 길 없는 열강의 지배자들이 베를린의 회의 탁자에서 삼각자로 마구 분할을 일삼거나 중동처럼 열강의 땅따먹기 대상지로 전락한 경우, 그 분할선이 독립 후에 그대로 국경으로 굳어졌기에 그 결과는 가히 파국적이었다.

유럽과의 접촉이 상당 기간 지난 뒤, 그나마 '주체'를 세울 역사의 밑천이 있던 반식민의 제국 후예들이 혁명을 통해 근대성을 길들이고자 하는 본격적인 시도를 개시했다. 1905년의 러시아혁명, 1906년의 이란 입헌혁명, 오스만 튀르크의 '청년 튀르크 혁명'(1908), 멕시코혁명(1910), 중국의 신해혁명(1911)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에 앞서 에스파냐 제국의 쇠퇴 속에서 그것이 구축했던 연계망 덕분에 쿠바(1895~1898)와 필리핀(1896~1898)에서 거의 동시에 민족 항쟁이 터져 나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시도는 에스파냐와 미국의 임무 교체로 당장에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마르티(José Martí)와 리살(José Rizal)은 각기 서반부와 동반부에서 역사 도약의 시도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 1917년의 특히 러시아 10월혁명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상 처음 등장했으나, 독일혁명(1918)의 실패로 '일국 사회주의'로 갇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10월혁명의 성공으로 본보기 혁명이 프랑스혁명에서 러시아혁명으로 바뀌었고, 이는 그만큼 역사적 도약대의 높이가 더 높아졌음을 뜻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열강의 제국 장악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간전기(1919~1939)에 세계는 뚜렷한 방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사이에서 망설였다.10)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2차 혁명의 시대'(1945~1992)가 열렸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속에서 탈식민과 독립, 통일과 민주화, 더 나아가 사회혁명을 위한 일련의 혁명이 전 지구적으로 분출했다. 종전 직후 공산주의의 높은 도덕적 권위 아래 혁명운동이 그리스, 말레이, 버마, 필리핀 등지에서 실패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북한,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성공하여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첫 번째 흐름, 1945~1949) 이후 탈식민 정치독립의 시도가 많은 경우 혁명의 이름 아래 종종 전쟁, 충돌, 대규모 학살과 암살을 수반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대거 벌어져 성공을 거두었고, '제3세계'에 관한 낙관적 분위기를 일구었다. 냉전기 두 번째 혁명 흐름(1959~1968)은 쿠바혁명(1959)이 촉발하여 알제리혁명(1962), 베트남전쟁(1960~1975)으로 이어졌다. 중남미에서 쿠바혁명을 본보기로 하는 일련의 혁명 시도가 벌어졌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로 시작된 세 번째 흐름(1974~1980)은 성공적이었다. 혁명가들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포르투갈 식민지, 인도차이나와 이란, 중남미의 그레나다와 니카라과 등지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필리핀과 중남미 여러 지역에서 혁명운동이 등장 또는 재등장했다. 그리고 뜻밖에 '동구혁명'(1989~1992)이 터져 나왔다. 당시 많은 이들은 어리둥절했다. 혁명을 역사 발전의 견인차로 본다면, 이는 분명 역설적인 사태 변화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혁명의 제도화를 해체하여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봉인하는 듯했고, 진정 혁명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2011년에 돌연 '아랍혁명'의 물결이 일면서, 청산해야 할 '구체제'(앙시앵 레짐)가 있는 한 사회혁명론과 같은 보편 이데올로기와 본보기(혁명의 '형판') 없이도 혁명이 얼마든지 터져 나올 수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11)

2세기에 걸친 전구적인 혁명의 흐름은 무엇을 남겼나? 근대세계에서 대규모 인명 손실을 부른 정치 현상을 꼽자면 단연 전쟁, 혁명, 건국이다. 사실 혁명은 이 셋을 아우르며, 더욱이 혁명의 이름을 얻지 못한 반란, 봉기, 운동이 얼마나 많았던가! 역사상 최대였던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민간인 포함하여 물경 7천만~8천 5백만 명의 사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혁명 과정에서는 이보다 더 큰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이해할 길 없는 집단학살도 있었겠지만, 혁명운동에 투신한 이들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인간해방과 자주독립의 기치 아래 역사의 진보에 헌신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적어도 미국이 '9·11'(2001) 이후 '구조적 폭력'(곧 구체제)을 해체하려는 모든 행위에까지 '테러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말이다. 이 엄청난 이들의 희생에 근대세계는 제대로 값했는가?12)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다고 감히 평가한다. 성과가 있었음을 애써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토 제국주의의 유지 비용이 엄청난 규모로 증가한 탓인지, 구미 제국 열강은 독립과 건국의 요구에는 이권 세력의 저항이 없진 않았지만, 순순히 응한 편이었다. 전후~ 1950년대에 아시아, 1960년대에 아프리카, 1970~1989년대에 일부 지역과 특히 대양과 카리브해의 섬, 1989년 후에는 소련 및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른바 '국민국가'가 200개에 달했다. 이는 현재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가 150여 개에 달하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립한 아메리카의 20여 개 나라를 합하면 170여 개에 이른다.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상부구조로서 '국가 간 체제'가 이제 전구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신생 국민국가는 상당수가 '결손국가'에 속한다. 예컨대 '아랍의 봄'을 이끌었던 나라들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곧 반혁명(이집트)과 내전에 처하거나 '실패 국가'(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의 모습을 보였고 독재정권을 축출했던 튀니지조차 최근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이렇게 된 데는 일부 외부의 간섭도 작용했다. 이전의 식민 본국이나 미국은 탈식민 민족해방은 대체로 용인했지만, 특히 토지소유권의 광범위한 이전이나 국유화를 꾀하는 사회혁명의 시도는 좌시하지 않았다. 쿠바가 혁명을 수출하려고 했을 때, 워싱턴 정부는 심지어 쿠데타를 동원하여 그 시도를 무산시키곤 했다. '하나님은 너무 멀고, 미국은 너무 가까웠다.' 유럽 열강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의도적이고 집단적으로 개입하여 특정 국가를 '실패 국가'로 전락시킨 예도 있었다.

아이티(Haïti)는 놀랍게도 노예들이 오랜 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한 나라였다. ('아이티혁명', 1791-1804)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라는 아프리카 출신의 걸출한 지도자도 있었다. 아이티혁명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의 식민제국 재건의 꿈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의 정치적 자존을 입증하여 대서양 노예제의 더 이상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했다.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보다도 노예 해방을 노예 자신이 이룩하여 이제 노예제 유지가 엄청난 정치·사회적 비용을 요구한다는 새로운 현실이 그 폐지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새로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피부색의 경계(color's line)를 세워 계급의 형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근대세계의 새 담당자들에게 아이티는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프랑스, 독일, 미국의 세기에 걸치는 집요한 위해 공작은 결국 아이티를 세계 최빈국으로, 통치 자체가 불가능한 '실패 국가'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혁명으로 당시 대서양 경제 최고상품인 설탕의 생산지가 생도맹그로부터 쿠바로 바뀌었다. 쿠바의 완강한 혁명사에는 아이티혁명의 경험과 기억이 짙게 배 있다. 미국은 이 사실을 결단코 잊은 적이 없었다.13)

사실상 많은 수의 신생국에게 제1차 근대성의 역사적 조건 자체가 불비했다. 유럽이 개척한 근대성의 경로가 유일한 길이라고 강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일본이, 그리고 한참 뒤에 한국이 제2차 근대성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무섭게 경쟁적인 자본주의 세계질서 안에서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자본주의가 뚜렷한 경향성을 보이게 마련인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길들이기 위해 민주주의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제2차 근대성의 정립에 국민국가의 역사적 조건인 주권자로서 국민이 공유해야 하는 영토적,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 곧 '국민적 정체성'은 참으로 불가결했다. 이 정체성은 '상상의 공동체'이기는 하되, 단지 '가상'(假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형성물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다. 이 근거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실재를 '이야기'를 통해 구성해내는 호모 사피엔스의 인식 능력이다. 이 정체성은 전통 시기에 일정 영역의 주민들이 장기간에 걸쳐 공통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성된다. 이론적으로는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성립하지만, 실제로는 나라(전통국가)가 국민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열강들이 그은 분할선을 영토의 경계로 물려받은 신생국은 그야말로 달리기의 출발선에 서 있는 격이다. 우리에게 38선이나 휴전선이 특히 그어졌던 당시에 뼈아프게 느껴졌던 까닭이 예에 있다. 분단 극복은 여전한 우리의 과제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함이 떨어지는 일은 정체성이 껴안고 있는 공감 능력이 약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14)

국민 각자는 주권자이자 통치의 대상이다. 통치(정부)는 국가, 곧 '상태'가 유동화하는 것을 막을 정도로 강력해야 하지만, 각 개인을 억압할 정도로 강력해서는 안 된다. 통치의 대상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의 역설적 면모를 가장 잘 포착한 이는 바로 루소(Jean-Jacques Rousseau)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계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하여 일반의지의 최고 지도 아래 맡기고, 우리는 단체로서 각 구성원을 전체의 분리 불가능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이 결사 행위가 성립하는 즉시 계약자인 개인들 대신에 하나의 정신적이고 집단적인 단체가 형성된다. 이 단체는 집회가 갖는 투표권과 같은 수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며, 이 결사 행위로부터 통일과 공동의 자아, 그리고 생명과 의지를 받는다. 이처럼 모든 개인의 결합에 따라 형성된 공적 인격은 옛날에는 도시국가(Cité)라고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공화국(République) 또는 정치체(corps politique)라고 부른다. 구성원들은 그것을 수동적일 땐 국가(Etat)라고, 능동적일 땐 주권자(souverain)로, 그리고 유사한 것과 비교할 땐 권력(puissance)이라고 부른다. 구성원에 대해서는 집단으로서는 인민(peuple)이라고, 주권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는 시민(citoyens)이라고,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자로서는 신민(sujets)이라고 한다." 아울러 루소는 예리하게도 각자는 시민인 동시에 소유권을 갖는 이중적 존재임을 지적한다. "사회계약을 통해 인간이 잃는 것은 자연적 자유와, 그를 유혹하고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다. 그가 얻는 것은 시민의 자유(liberté civile)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는 평등의 문제에 직면한다. "기본계약은 자연적 평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이 설정한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불평등을 도덕적이고 정당한 평등으로 대체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힘이나 재능에서는 불평등할 수 있어도, 합의를 통해 권리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리고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쁜 통치 아래에서 이 평등은 겉치레이고 기만일 뿐이다. 이런 곳에서 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비참한 상태로 놔두는 구실이며, 부유한 사람들이 계속 남의 것을 침탈하도록 하는 구실이기도 하다. 사실상 법률은 언제나 가진 자에게 이롭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에게는 해가 된다. 이로써 다음 결론이 나오는바, 사회상태는 모두가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고 누구도 너무 많이 가지지 않는 한에서만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다."15)

이러한 루소의 통찰은 제2차 근대성의 핵심적인 원리인 '자유 노동'이 갖추게 될 현실적인 구조와 질서를 예시해 주었다. 인간은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이 되며, 그는 '시민'으로서 특정 국가의 주권자로서 권력의 형성에 참여하는 동시에 '노동하는 자'로서 그 산물을 자기 것으로 삼고 누릴 수 있는 권리, 곧 소유권을 갖는다. 그는 시민으로서 권리에서 평등하지만, 노동 주체로서 힘과 재능에서 불평등하다. 예서 자유 노동이 한껏 펼쳐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시민'으로서 특정 국가권력의 일원이 될 일을 요구한다. 유럽의 국가들도 19세기의 대부분의 시기에 그렇지 못했지만 결국 참정권이 보편적 권리가 되어 민주주의를 내부 권력의 규율 원리로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루소가 날카롭게 인식했던 대로 시민사회에서 여러 원인으로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생겨난다. 루소는 이 불평등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 '자유 노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적 주체성으로의 인간의 존재성, 곧 민주주의가 이 불평등을 규제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인류사에서 근대 혁명은 제1차 근대성이 탈피하지 못했던 '경제외적 강제'를 청산하여 '자유 노동'이 만개할 수 있는 제2차 근대성으로 전환하는 일을 수행한다. 이 혁명은 예외 없이 산업사회로 전환하기 전의 농업사회에서 벌어졌기에, 경제외적 강제의 청산은 무엇보다도 '토지개혁'의 요구로 터져 나오게 마련이었다. 사실 국민 정체성의 형성 여부가 제2차 근대성으로의 도약 여부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면, 정치독립의 쟁취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토지개혁의 성공 여부가 혁명의 성취 여부를 가르는 관건이었다.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 이는 한편으로 '자유 노동'의 원리가 펼쳐질 수 있는 사회·경제 생태계의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 소농경제의 성립을 통해 어린이를 가계노동으로부터 해방하여 보편적인 초등교육에 끌어들일 수 있어 민주화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었다. 신생국이 설사 국민 정체성을 보듬을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가졌더라도 결정적인 단계에서 이 실질적인 성취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예컨대 필리핀처럼 지난 1세기 반에 걸쳐 완강하게 독립전쟁과 일련의 혁명을 벌였음에도 진정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이룩하기 어려운 것이다.16)

보편적인 교육과 복지, 깨끗한 물과 공기, 지속 가능한 도시 인프라와 공정하고 신속한 사법부를 공공재로 갖는 문명국가는 한 세기에 걸치는 전 지구적인 혁명의 물결과 이를 통해 많은 신생국이 대두했음에도 여전히 19세기 말에 제2차 근대성을 이룬 지역을 넘어 확산하기는커녕 그 지역에 고착한 듯하다. 흔히 혁명은 민족사에서 딱 한 번 벌어진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제2차 근대성이 이룩되면 이후 해당 정치체는 정치발전의 지속 가능한 단계에 접어들기에 더는 '일반 위기'로서 혁명에까지 내몰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서 딱 한 번 벌어지는 일은 역사적 계기로서의 혁명일 뿐, 역으로 해당 국가가 그런 지속 가능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혁명적 상황을 반복하는 역사적 고통이 계속될 수도 있다. 특히 새 정치체의 수립을 위한 '창설적' 혁명은 제2차 근대성을 위한 '사회혁명'의 절호의 기회임에도 토지개혁 등의 실질적인 성취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정치적 악순환을 부를 수도 있으며, 여전히 많은 신생국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 발전이 그야말로 '경로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흔히 한국은 식민지 경험을 가진 '영토 국가'로는 최초로 '선진국'에, 말하자면 제2차 근대성에 진입했다고 한다. 우리는 왕조 국가 아래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정체성을 기반으로, '창설적' 혁명은 없었지만 19세기 중엽까지 올라가는 혁명 전통과 가까이는 혁명에 버금가는 뜨거운 민주화를 통해 현재 지속 가능한 정치체제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중요하게도 남한은 북한 토지개혁(1946)의 압력과 당시 자립경제 건설이라는 세계적 추세 속에 위치하고 있었고, 미군정이나 우익 정치세력조차 이에 반대하지 못하는 드문 여건에서 유상분배의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토지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적어도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인하여 장기적으로 앞에서 말한 제2차 근대성을 위한 자생 발전의 선순환을 이끈 듯이 보인다. 진짜 문제는 제2차 근대성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절합이 지속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기는 식민제국의 잔존 속에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1929~1939)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통하여 보여주었고, 결국 자본주의는 영토 제국주의를 스스로 해체하고 '현실 사회주의'와의 냉전 속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동반자로 구함으로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서방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형해화했으며, 30여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마치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상황처럼 분절화하면서 '블럭경제'의 양상으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우리 사회 역시 최근 급격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보이면서 정치적 양극화를 불러 그간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를 위협하고 있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제2차 근대성이 바로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역시 그에 따르면, 위기는 단순히 붕괴나 파괴의 순간이 아니라, 대전환의 잠재력을 내포한 기간이다. 인류는 '자유 노동'의 부분적 해방을 넘어 맑스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지만, 그 과정이 어떠한 양상을 보일지, 우리의 제한된 상상력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제2차 근대성의 허들을 식민지 경험의 '영토 국가'로서 유일하게 넘었다고 평가받는 우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과업은 세계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지방 지식'으로 전락한 우리의 '전통 지식'을 복원하여 되살리는 일이다. 16세기 이래 유럽의 팽창은 전 지구적으로 전통 문명의 지식이 지방 지식으로 전락하고 많은 부분이 망실되는 일종의 '홀로코스트'였다. 고등교육의 물적 기반을 갖춘 우리로서 학문분과의 발본적 개편을 시도할만하다. 과거와의 화해는 우리의 문명적 감수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식민지 극복의 첫 '문명국가'로서 그 경험을 새로운 보편 지식으로 끌어 올려야 하는 책무를 갖는다. 식민제국은 이제껏 누구도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았으며, 국제법은 글로벌 남·북의 문제에 무심하다. 우리는 '글로벌 남'과 소통하며, 일제 청산의 문제를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이 세계와의 화해는 우리의 민주적 감수성을 크게 키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업은 문명적 수준의 위기를 넘어서는 데도 일정하게 작용할 것이다.17)

ⓒ연합뉴스

미주

1) https://namu.wiki/w/국민교육헌장 (검색일: 2024년 11월 6일).

2)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2014)>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

3) 고든 차일드,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 (1951)> (김성태·이경미 공역, 주류성, 2013)은 출간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가히 고전이라 할만하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2007)>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10); Agnes Hellet, A theory of histor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2), 특히 3~35쪽; 마지막 인용은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65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제1권, 172쪽.

4)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1298)> (김호동 역주, 사계절, 2000), 12, 특히 152~153장, 374~396쪽; '대분기' 논쟁에 관한 간편한 소개로는 Ross E. Dunn, Laura J. Mitchell, & Kerry Ward, eds., The New World History (Oakland, Ca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6), 제7장 (357-420쪽)의 편자 서론과 Kenneth Pomeranz, Joseph M. Bryant, Jack A. Goldstone, Prasannan Parthasarathi의 글 참조.

5) 최갑수, '제국에서 근대국가로: 유럽사에 대한 하나의 조망', <세계정치> 제26집 1호 (2005년 봄·여름), 121-148쪽.

6) Göran Therborn, European Modernity and Beyond: The Trajectory of European Societies, 1945-2000 (London: Sage, 1995);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91)> (성백용 옮김, 창비, 1994).

7)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김세균 감수, 최인호 번역, 박종철출판사, 1991), 404쪽; W. W. 로스토오, <경제성장의 제 단계 (1960)> (이상구·강명규 공역, 법문사, 1961) 당시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신속한 번역은 이례적이었으며, 그 부제가 '반공산당 선언'임도 유의할 대목이다; 장경섭,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2022)> (박홍경 옮김, 문학사상, 2023).

8)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1992), 88쪽. 당시 기관차는 지금으로 보자면 반도체 칩에 해당하는 '근대성'의 첨단이었다.

9)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930)> (볼셰비키 그룹 옮김, 아고라, 2017).

10) 베네딕트 앤더슨, <세 깃발 아래에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 상상력 (2005)> (서지원 옮김, 길, 2009).

11) Jack A. Goldstone, ed., The Encyclopedia of Political Revolutions (Washington, DC: Congressional Quarterly Inc., 1998); James V. DeFronzo, ed., Revolutionary Movements in World History from 1750 to the Present, 3 Vols. (Santa Barbara, California: ABC-CLIO, 2006); Immanuel Ness, ed., The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Revolution and Protest, 1500 to the Present, 7 Vols. (Malden, MA: Wiley-Blackwell, 2009).

12)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 (검색일: 2024년 11월 11일).

13) 최갑수,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편, '근대국가', '민주주의', '혁명' 항목, <역사용어사전>(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288~300, 721~733, 1895~1907쪽 참조; 최갑수, '불행한 만남과 위대한 전복: 대서양, 흑인, 혁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편, <스무 살, 인문학을 만나다> (그린비, 2010), 419~436쪽; 시 엘 아르 제임스, <블랙 자코뱅 (1938)> (우태정 옮김, 필맥, 2007); 로런트 듀보이스, <아이티 혁명사: 식민지 독립운동과 노예해방 (2004)> (박윤덕 옮김, 삼천리, 2014).

14) 최갑수, '리바이어던의 등장: 절대주의 국가에서 국민국가로의 이행', <서양사론> 82호 (2004), 71-94쪽.

15) 루소, <사회계약론 (1762)> (김영욱 옮김, 후마니타스, 2018), 25~26, 30, 34쪽; (이태일 옮김, 범우사, 19750, 30~32, 35, 39쪽. 두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여 일부 수정했음. 강조는 원문의 것임.

16) 아쇼카 모디, <두 개의 인도 (2023)> (최준영 옮김, 생각의힘, 2024).

17) Clifford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New York: Basic Book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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