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유가족의 이야기에서 한강의 소설을 떠올리다

[프레시안 books]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열다섯 살 중학생 '동호'는 친구 정대와 함께 사라진 정대 누나를 찾으러 다니다 별안간 총성을 들었다.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자 동호는 정대의 손을 놓쳤고, 정대는 계엄군이 쏜 총에 쓰러져 죽었다. 동호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도망쳤다가 불 꺼진 정대의 집을 보고 뒤늦게 자책했다. 동호의 발걸음은 시민군이 모인 도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어린 새' 한 마리가 빠져나간 듯한 주검들을 수습하던 동호는 결국 친구와 마찬가지로 계엄군의 총탄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202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채식주의자>보다 더 일독을 권했던 <소년이 온다>의 줄거리다. <소년이 온다>는 실존 인물인 5.18 희생자 고(故) 문재학 씨 이야기에 약간의 상상을 가미한 소설이다. 열다섯 어린 소년이 겪은 비극적 사건과 다양한 감정들-죽음을 마주한 두려움,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계엄군과 정부에 대한 분노-은 문학 작품으로 승화돼 현재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감동을 주고 있다.

요즘 워낙 '한강 읽기'가 유행이라서일까, 마침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일까. 최근에 발간된 어떤 책 한 권을 읽는 내내 <소년이 온다>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유가족 25명의 이야기를 기록한 구술집 <참사는 골목에 머무르지 않는다>(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펴냄)다.

'이태원 참사'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던 하나의 사건이 이 책에서는 '수빈이' 어머니의 이야기, '상은이'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각각의 사건으로 펼쳐진다. 개별자들의 증언은 '159명 사망'이라는 납작한 설명으로 끝나는 언론의 단신 보도보다 '이태원 참사'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마치 교과서 속 5.18보다 <소년이 온다> 속 '동호' 이야기를 통해 접한 5.18이 피부로 와닿는 것처럼 말이다.

▲22일 서울 중구 별들의집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기록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정인식 작가가 집필 동기 및 기획 과정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는 무엇일까. 2022년 핼러윈데이를 이틀 앞둔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로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사고? 유가족들은 이태원 참사는 '압사 사고' 그 자체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책 제목대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159번째 희생자 열여섯 소년 '재현이'는 그 '골목'에서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친구 두 명을 잃었다. 친구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2차 가해에 괴로워하던 재현이는 결국 친구들을 따라갔다.

"재현이는 퇴원한 길로 친구들의 장례식장과 봉안당을 들렀어요. 그러고 집에 왔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어요. 생긴 모습은 재현인데, 내가 알던 재현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중략)

재현이가 감정이 격해졌을 때 서너 번 정도 울면서 말한 적이 있어요. 온라인상에서 본 댓글 이야기를요.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연예인을 보러 갔네, 마약을 했네, 이런 글들을 대체 왜 쓰는 거냐고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 엄청나게 울었죠.(중략)

이태원 참사는 유독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향해 명예훼손이나 2차 가해성 발언들이 심해요. 고등학생이 이태원에 갔다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있잖아요. 그런 잘못된 시선, 잘못된 분위기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명확하게 말을 해줄 필요가 있었죠. 그런데 10월 29일 이후 재현이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 있었어요.(중략)

마지막이 자살을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재현이는 이태원 참사의 생존자였어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재현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부가 나한테 먼저 와서 잘못했다고 말을 해줘야 하는 게 상식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큰일인데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없어요? 우리 재현이가 정말 한덕수 총리 말대로 치료 관리가 안 돼서, 의지가 약해서 이렇게 가버린 아이라는 건가?"(재현이 어머니 송해진 씨 이야기)

놓쳐버린 친구의 손,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이어진 희생, 10대 소년의 이야기. 마치 <소년이 온다> 속 동호와 판박이 같은 재현이의 이야기가 마침내 겨누고 있는 것은 정부다. 158에서 그쳤어야 했을 사망자 수를 159로 만든 것은, 골목에서 그쳤어야 했을 참사를 골목 밖에서도 이어지게 만든 것은 정부였다.

희생자들의 유류품에 대해 마약 검사를 의뢰하고, 부검을 권유해 순식간에 희생자들을 '마약 용의자'로 만든 경찰과 검찰, '다 큰 자식들이 놀러 가는 걸 부모도 못 말려놓고 왜 정부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냐'고 한 정부 관계자, 유가족 동의 없이 위패도 영정사진 없는 분향소를 차려놓은 정부, 외신 기자간담회에서 사과는커녕 정부 책임을 묻는 질문에 농담 식으로 답한 국무총리….

정부가 주도한 이같은 폭력에 열여섯 어린 소년은 버티지 못했다.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재현이는 이태원 참사의 159번째 '희생자'로 기록된다.

참사는 159번째 희생자를 낳은 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서울광장 분향소에 대해 강제 철거를 시도하고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정부의 폭력이 계속되는 한 참사는 지속된다. '호균이' 아버지 문성철 씨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두고 "국가 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총‧칼은 사라졌지만, 국가 폭력은 또다른 형태로 여전히 은은하게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 누구라도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8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에 보면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얘기하셨어요. 참 멋진 말이라고 스스로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집회에 몇 번 참여했고요. 안타깝다, 부모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지만 제 공감은 거기서 멈췄고 일상으로 돌아가 잊어버렸죠.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면 그냥 아파할 뿐 거기 개입할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런 공감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단 걸 분향소에서 깨달았어요.(중략)

참사는 꼭 유가족이나 희생자, 피해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참사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됐을 때 우리가 다같이 안전사회로 갈 수 있는 거잖아요. 시민들이 조사과정에 참여한다는 건 그런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이기도 하겠죠"(애진이 어머니 김남희 씨 이야기)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냈다"며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고리에 관한 독특한 인식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구술집인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는 한강의 소설처럼 시적이고 실험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주제의식만큼은 한강 소설과 비견될 만하다. 유가족들이 참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길러낸 사유의 두께는 결코 한강에 뒤지지 않아 보인다.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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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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