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스 게임이란 놀이가 있다.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간단한 내용으로, 선택지의 균형(밸런스)을 잘 맞춰서 고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묘미다. 인터넷에서 흔한 패턴 중 하나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가혹한 상황'과 '그냥 살기'의 대결이다. 검색해 보면 "10년 동안 초고급 오션뷰 아파트에 갇혀 살다가 100억 받기 vs 그냥 살기", "20년 동안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서 30억 받기 vs 그냥 살기" 등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선택의 핵심은 '돈'이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 돈 받고 저러고는 못 산다"던가, "저만큼 준다면 이 정도는 가능하지" 같은 댓글이 달린다. 늘 그렇듯이 돈은 우리가 뭔가를 내놓아야만 받을 수 있는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울질한다. 나의 노동과 시간과 혹은 상대의 진심 같은 것들도.
2023년 여름, 나는 우연히 '북극의 빙하가 2030년경이면 모두 녹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SNS 피드에서 북극곰을 도와달라는 환경단체의 후원 광고를 무성의하게 넘기면서도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사람이 있을까? 단지 그게 내 인생에는 일어나지 않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했을 뿐이다. 멸종이 북극곰의 문제가 아니었다니! 충격의 시간이 지나자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저 먹고 살려고 앞만 보고 달렸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나 악화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문제가 왜 이토록 해결이 어려운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80억 명이 함께하는 이 대규모 조별과제에서 나의 비중은 잘해봐야 1/80억. 나 혼자 아무리 난리법석을 쳐도 대세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바다에 물 한 바가지를 붓는다고 싱거워질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주기후예산시민조사단' 활동에 참여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나 혼자 열심히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이 바뀌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만 명이 각자 10씩 탄소를 배출해서 총배출량이 10만이라면, 내가 0이 될 경우 잔여 배출량은 9만 9,990이지만 모든 사람이 3씩 줄인다면 잔여 배출량은 7만이 된다. 심지어 혼자 0이 되는 것보다 다 같이 3씩 줄이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도 훨씬 수월하다. 누가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하느냐의 문제도 있다. 제주의 경우 2023년 기준 전체 건축물의 0.01%를 차지하는 대규모 호텔 등의 13곳이 전체 건물 에너지의 20% 이상을 소비한다.(삼다일보, "에너지 다소비 건물 13곳이 전체 에너지 22% 소비", 2024.08.20) 당연히 일반 가정집보다는 이런 에너지 다소비 건물을 규제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그러려면 정책이 필요하고 예산도 필요하다. 제주도는 국가와 지자체가 온실가스감축인지 예산제를 시행하도록 규정한 탄소중립기본법에 따라 2022년 '제주특별자치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 조례를 제정했다. 정말 제주도는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예산을 적절하게 운용하고 있을까?
예산에 기후 성적표를 매겨보자
올해 6월에 열린 기후예산학교(2024년 6월 22~23일 제주기후예산시민조사단과 제주녹색당이 주최·주관하고 재단법인 숲과 나눔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에서 지방재정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와 함께 '기후정의예산 분석틀'에 대해 배웠다. 기후정의예산 분석틀이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기후정의 관점에서 평가하기 위한 도구다. (1)재난적응 (2)생태적 회복 (3)불평등 완화라는 세 가지 부문지표를 기준으로 특정 정책 사업을 증액해야 하는지, 감액해야 하는지(개입지표) 등을 판단한다. 수업은 매우 흥미로웠다. 불용액, 이차보전금 등의 낯선 용어들이 등장했을 때는 잠시 당황했지만, 환경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예산에도 폭넓게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실전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배운 대로 실습하는 워크숍 시간에 나는 그저 덩그러니 빈칸만 바라봤다. 개별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협재리 행복한 삶터 조성사업'을 평가하려면 '행복한 삶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업들은 이름에서 추측한 것과 실제 사업계획서 내용에 차이가 있기도 했다. 지표 선택도 난관이었다. '그림자 조명을 활용한 범죄 없는 밝은 도시공원 조성'은 재난적응에 도움이 되는 사업일까? 아니면 생태적 회복과 연관이 있을까? 그도 아니면 불평등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을까? 불평등 완화와 관련이 있다면 이 사업은 증액해야 할까? 아니면 감액하거나 감시해야 할까? 망설이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척척 평가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다행히 분석틀은 참여하는 시민들의 목적에 따라 유연하게 변경할 여지가 있었다. 실제 활동에서는 제주도에 적합하면서도 나 같은 사람의 고민을 줄여주는 방식이 있을지 함께 의논해 보자!
이틀 간의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지방재정, 즉 제주도의 예산에 대해 모니터링하는 '제주기후예산시민조사단(이하 '조사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예산을 모니터링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여러 의견이 오간 가운데 일단 교통항공국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제주도의 경우 온실가스 직접 배출량의 절반이 수송 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교통 예산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교통항공국은 택시와 교통약자 특별이동수단 중심의 '교통정책과(약 461억 원)'와 버스 중심의 '대중교통과(약 1,994억 원)'로 구성되어 있다. 즉 교통항공국 예산을 들여다보면 제주의 교통 예산이 얼마나 기후위기에 잘 대응하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모니터링에 앞서 기후예산분석툴의 적용 방식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먼저 A사업이 재난적응인지 생태적 회복인지 고민하지 않고 모든 항목을 전부 평가하되, 개입지표에 '해당없음'을 추가해 관련도가 낮은 지표를 제외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전환'이 필요한 사업이라면 결국 '감액'과 같다고 판단하여 '전환'을 삭제함으로써 평가 결과가 더 분명해지도록 했다. 이제는 실제 예산을 들여다볼 차례다. 부서별로 정책 사업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살펴봤다. 각자 사업계획서를 보면서 사업 내용을 파악하고 증액/감액/감시의 평가를 내렸다. 가끔은 모여서 같은 화면을 보면서 함께 평가하기도 했다.
서로 의견이 다른 항목에 대해서는 끝장 토론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사단은 서로의 눈높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논의는 더 풍부해졌다. "교통이 불편한 시골에서 택시가 대중교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면, 택시에 대한 지원은 교통약자에 대한 복지로 봐야 하지 않을까?" 혹은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이 불평등 완화 차원에서는 증액할 만 하지만, 생태적 회복 관점에서는 감액 대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와 같은 다양한 관점들이 등장했다. '불평등 완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사업이 '생태적 회복'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는 의견은 꽤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다. 기후위기는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먼저 당도하는 만큼, 불평등 완화는 꼭 필요한 지표이지만 그게 반드시 생태적으로도 좋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에서 두 지표는 충돌할 여지가 있었다. 우리는 모든 부문지표를 체크하기로 정했으니, 결과가 나오면 지표 간 대립도 분석해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조사단은 종종 만나서 함께 밥 먹고 조사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며 석 달의 시간을 보냈다.
제주의 기후예산은 몇 점일까?
모니터링 결과, 교통항공국 전체 125개 사업 중 약 60%가 '감액' 혹은 '감시'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어렵거나, 불평등하다고 판단한 사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셈이다. 교통항공국이 교통약자(교통정책과)와 대중교통(대중교통과)을 지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놀라운 수치다. 특히 교통정책과의 경우 '생태적 회복'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무려 81%가 감액 혹은 감시 대상으로 평가된 것이다. 예산을 살펴보니, 내연기관 중심의 정책을 지속했으며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전환하려는 노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상버스 등 대중교통 접근성 확대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콜택시 개념인 특별교통수단의 제공도 중요하지만, 휠체어를 타고도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장애인 이동권을 더 폭넓게 보장하고 온실가스 저감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제주의 유일한 대중교통인 버스를 책임지는 대중교통과는 어떨까. 생태적 회복과 불평등 완화에서 증액을 받은 사업은 40% 정도였다. 감시와 감액을 합한 비율은 35~40% 정도로 얼핏 보면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시민의 이동권도 보장하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대중교통이 아닌가. 생태적 회복과 불평등 완화 모두 증액이 8~90% 이상 나와도 놀랍지 않을 텐데, 현실은 절반 이하에 그쳤다. 준공영제라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버스 준공영제란 무엇인가? 제주에서 그것은 무려 1,100억 원을 "민간 버스업체의 손실 보상"에 사용하게 만드는 제도를 부르는 이름이다. 매년 소요 금액은 상승하는데 버스 이용률은 갈수록 저조하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점을 떠올리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투자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데 도민의 안전하고 편리한 이동을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덕분에 제주의 버스 환경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 지난 8월 제주도는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일부 버스 노선을 감차하거나 변경해 논란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주도의 온실가스 직접 배출량의 절반은 수송 부문에서 발생한다. 대중교통, 즉 버스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과 투자 없이 도로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조사단은 준공영제 예산이 생태적 회복과 불평등 완화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감액' 대상이라고 평가했다. 반대로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는 공영버스 지원 예산에 대해서는 모두 '증액'으로 결정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읍면지역 노선을 지자체가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버스의 공공성 확대로 장기적인 온실가스 저감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산으로 말하는 진심
'교통비 절약카드' 비상…환급액 부담 수백억 '눈덩이'(한국경제, "'교통비 절약카드' 비상…내년엔 환급 못 받나", 2024.10.15 기사 일부 발췌)
올해 초부터 도입된 'K-패스'와 '기후동행카드' 등 교통 할인 제도의 예산액이 부족하여 환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수요 예측에 실패한 지자체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서거나 추가경정 예산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중교통에 대한 행정의 태도는 매번 이런 식이다. 지하철도 버스도 늘 만성 적자고, 공공에서 운영해서 경쟁력이 부족하며, 아무튼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공공교통 확대를 외치면 그 세금은 어디서 나오냐는 으름장이 이어진다.
하지만 한국의 수송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체 순배출량의 15%로 세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며(KOSIS 국가통계포털, 국가온실가스통계, 국가 온실가스 분야별 배출량 추이, 2021년 기준), 대중교통의 활성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대중교통 요금을 올려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년 내로 요금 인상 효과가 사라지며, 요금 인상 자체가 물가 상승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대중교통 요금을 할인하면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얘기도.(국회의원 김진애, 책임연구원 김상철 공공교통네트워크 정책위원장, 공공교통 정책의 새로운 문제설정-어떻게 교통정책은 사회정책이 되는가, 2020-정책보고서)
탄소세 혹은 승용차 억제 정책을 도입하여 확보한 세수를 대중교통 재원으로 사용하는 정책 실험은 언제쯤 진행될까. 온실가스를 효과적으로 저감할 수 있는 방법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른 척하는 것일까. 전 세계 온실가스 누적배출량 13위, 온실가스 감축 속도 166위에 빛나는 한국의 현실이다.(연합뉴스, 한국 온실가스 감축 속도 최하위권…180개국 중 166위, 2024.06.07) 제주의 행정도 이런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km당 450억 원이 드는 '수소 트램'은 중앙정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투자할 가치가 있지만, 도민의 발이 되어줄 버스 공영화에 투자할 돈은 마련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시 밸런스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돈은 자주 진실을 말한다. 제주도는 올해 '2035 탄소 제로' 비전을 발표했지만, 직접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송 부문에 대한 대책 마련은 요원하다. 대중교통 활성화는 녹색성장 기본계획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예산 목록이 말하고 있다. 제주도는 탄소 제로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온실가스를 저감하겠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고. 행정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할 생각이 없는 사이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저울질당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곧 닥쳐올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행정이 말하고 있다. 너의 미래는 그렇게까지 투자할 가치는 없다고. 그렇다면 행정은 대체 무엇에 투자하고 있는 것인가?
이번 활동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앞서 '생태적 회복'과 '불평등 완화'가 대립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실제로는 두 지표의 평가 결과가 일치하는 경우가 5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반면 감시를 제외하고 '증액 vs 감액'으로 완전히 대립한 결과가 나온 경우는 10% 미만에 불과했다. 나머지에 해당하는 감시 항목을 조정할 경우, 일치율이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 적어도 교통 부문에서는 생태적 회복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 불평등 완화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저울질할 필요 없이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 생물종의 보존과 마찬가지로 버스 이용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과 지구에게도.
이 글은 생태적지혜연구소와 <제주투데이>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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