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하는 '딥페이크 성범죄'가 지난 수년간 발생했음에도 대책 마련에 소극적이던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엄정 대응' 당부에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여성단체들은 그러나 부처마다 우후죽순 내놓고 있는 단발성 대책으로는 딥페이크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정부가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반(反)여성 정책 기조를 수정해 성평등 전담 부처를 강화하고 전 부처에 걸친 종합적 장·단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8일 여성가족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교육부·방송통신위원회·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각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들은 딥페이크 관련 현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발표하는 등 딥페이크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올해 1월 1일부터 8월 25일까지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로부터 딥페이크 피해 지원을 요청한 781명 가운데 36.9%(288명)는 10대 이하라고 이날 밝혔다. 피해자 열 명 중 세 명 이상이 10대 이하 청소년인 셈이다.
디성센터에 피해 지원을 요청한 미성년자는 2022년 64명에서 2024년(8월 25일 기준) 288명으로 2년 만에 4.5배가 됐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전체 피해 지원 요청자가 212명에서 781명으로 3.7배 증가한 속도보다 더 가파르다.
교육부도 이날 자체적으로 수집한 딥페이크 피해 현황을 발표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학생과 교사의 딥페이크 피해 건수는 총 196건이다. 196건 중 학생은 186명, 교원은 10명이며 이 중 179건은 수사당국에 수사가 의뢰된 상태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교육부가 파악한 피해 건수가 서로 다른 데 대해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학교와 교육청을 중심으로 조사한 통계다 보니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통계와)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해명했다.
교육부는 향후 대책과 관련해서는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학교 딥페이크 대응 긴급 전담조직(TF)'을 구성한다고 밝혔다. TF는 △매주 1회 학교 딥페이크 관련 사안 조사, △학교 구성원 피해사안 처리, △학교 구성원 심리 지원, △학교 예방 교육·인식 개선, △디지털 윤리 및 책임성 강화 등 분야별 대응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교육분야 성희롱·성폭력 신고센터'를 딥페이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개편하고, 관계부처 협의, 시도교육청 부교육감 회의, 전문가 자문단 운영 등을 통해 딥페이크 대응방안을 도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딥페이크 가해자에 대해선 "딥페이크 특성상 아주 고의적이고 피해가 클 가능성이 높아 처벌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대응 방침을 밝혔다.
딥페이크 성범죄 관련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공동 대응키로 했다. 양 부처는 상호 협력을 통해 올해까지 딥페이크 발전에 따른 디지털 성범죄 관련 법제 정비 방향과 딥페이크 성적합성물 탐지시스템 구축 방안 등의 대책 마련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강도현 과기부 제2차관과 신영숙 여가부 차관은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방문해 딥페이크 피해 예방 및 피해자 지원 방안을 살폈으며, 사진 한 장으로도 허위 영상물을 추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정부 관계 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도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태규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은 이날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텔레그램이 '비밀 채팅방'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일부 공개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삭제나 유통방지 등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또 "방통위가 삭제 및 차단 요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방심위의 시정요구에 대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방통위가 시정명령을 하고 형사고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신경 써서 (대책 마련을) 해나가겠다"고 했다.
방심위도 이날 긴급 전체회의를 열고 △딥페이크 피해 신고 배너 신설(신고전화 1377), △성범죄물 전문 모니터 요원 6명에서 12명으로 증원, △악성 유포자 즉각 수사의뢰, △텔레그램, 페이스북, 엑스, 인스타, 유튜브 등 해외 플랫폼과 협의체 구성 계획 등을 발표했다.
이날 방심위는 서울시와 시-지자체 최초 24시간 딥페이크 신고·삭제 지원 핫라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각 정부 부처 및 관계 기관이 이같이 일제히 딥페이크 대책을 발표한 배경엔 윤석열 대통령의 엄정 대응 지시가 있다.
윤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딥페이크 성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관계 당국에서는 철저한 실태 파악과 수사를 통해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아 주기 바란다"며 "건전한 디지털 문화가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교육 방안도 강구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한국 전 세대 남성들이 폭력 문화 젖어 들어…어쩌다 이런 집단 됐는지 질문해야"
이처럼 윤 대통령을 필두로 온 정부 조직이 '딥페이크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지만, 정작 이같은 사태를 부추긴 것은 윤석열 정부라는 지적이 여성계를 중심으로 나온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28일 논평을 내고 "취약한 여성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정부부처가 여성가족부"라며 '여성가족부 폐지(공약)'가 불러온 파장이 지금 사태에 미친 영향이 없다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전 세계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의 53%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다. 가해자의 76%는 10대"라며 "소라넷 세대, 웹하드 세대, 박사방 세대에 이어 이제 딥페이크 세대까지 한국사회 전 세대 남성들이 폭력문화에 젖어 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몰아가지 말라며 페미니즘을 욕하기 전에 어쩌다가 남성이 세대를 초월해서 성착취 거대 집단이 되었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여성민우회도 지난 26일 논평을 통해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과연 국가가 거대한 산업이자 문화로서 양산된 디지털 성범죄 및 여성폭력 문제에 관해 어떤 입장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를 없애려 하며, 수많은 여성들의 사회적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우회는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 및 여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평등 전담부처를 강화하고 전 부처에 걸친 종합적 장·단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또한 정부 및 국회는 국내외 인터넷사업자에 대한 책무를 부과하고 강화하며 현행법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범죄 및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공조체계 구축 및 관련 법제도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보안서비스 업체 '시큐리티 히어로'는 최근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를 공개하며 전 세계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의 53%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다고 밝혔다. 이들이 지난해 7월부터 8월까지 상위 10개 딥페이크 포르노 웹사이트와 유튜브, 데일리모션 등에 있는 85개 딥페이크 채널을 분석한 결과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등장한 인물 중 53%가 한국 국적이었으며 2위 미국(20%), 3위 일본(10%)과 큰 격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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