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가 된 윤석열, 뉴라이트의 '타겟'은 '합리적 보수' 붕괴

[박세열 칼럼] '합리적 보수' 타파가 뉴라이트 세력의 목적

사실 뉴라이트들에게 역사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뉴라이트 대부 안병직은 경제학자였다. 안병직은 일제 식민지 시절을 연구해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기틀을 만들었다. 침략과 저항의 역사에 초점을 둔 기존 민족사학에 반해, 경제 시스템을 역사 해석의 근거로 둔 안병직의 연구는 80년대 한국을 일제와 미제의 식민지로 본 NL 운동권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골수 NL 운동권이 80년대 후반 서구 현실 사회주의 붕괴를 목격한 뒤 '뉴라이트 운동'에 투신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지독한 '유물론자'들이 뉴라이트식 '유물론'에 빠진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역사 재해석'을 무기로 들고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뉴라이트 관련 논쟁은 2008년에 정점을 찍었다. 그 무렵 <뉴라이트 비판>을 쓴 역사학자 김기협은 뉴라이트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뉴라이트는 수구 집단의 가치관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한 마디로, 모든 가치를 재물에 종속시키는 가치관이다. 예컨대 그들이 떠받드는 '자유'가 어떤 것인가? 그들은 자유를 내면화하지 않고 소유의 대상으로 객체화하며, 따라서 내 것을 주장하되 남의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실천의 과정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힘으로 빼앗고 돈으로 사는 물건이다. 이용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2008.10.21. 프레시안)"

김기협의 분석에 따르면 뉴라이트는 '역사관'이라고 볼 수 없다. 무릇 역사관이라 이름 붙이려면 상고시대부터 현재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뉴라이트는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최근 200년 정도 기간 성행한 '자본주의'를 통해 모든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는 치명적 오류를 안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뉴라이트'는 현실 사회주의 동구권 몰락으로 갈 곳 잃은 옛 극좌파들과, 독재 시대를 '화양연화'로 여기는 옛 극우파들이 새로운 깃발 아래 '정치 집단'으로 모인 뭉텅이를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자유주의 개혁에 치를 떨었던 이들은 냉전 체제를 고수하고자 이승만을 발견하고 건국 이론을 발명했으며, 재벌 체제 구축을 현대사의 성과로 치장했다. 친일 논란은 친미, 냉전, 반공, 재벌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논리적 완결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권은 뉴라이트 정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00년대 중반 깃발을 든 퇴역 이념가들은 '선진화 담론'의 외피를 빌려입고 정치세력화에 성공, '지긋지긋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끝내고 '경제적 실용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전경련 등 재벌 소속 연구기관의 자본력을 뒷배삼아 세를 불려 나간 뉴라이트는 교과서 수정을 시도하고, 친일파 복권에 열을 올렸다. 친미, 반공의 전선 구축을 위해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아주 유용한 상징 도구로 재발견됐다.

뉴라이트에 따르면 일본이 점령해 '자본주의'를 이식하기 이전의 한국은 문명사회라 볼 수 없다. 일본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룬 다음 이승만이 1948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다는 신화를 만든다. 이승만의 영도력으로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대한민국은 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자본주의 번영의 길을 닦는다. 한국과 미국과 이승만의 성 삼위일체와 일본의 수태고지를 믿는 광신도들은 좌파 운동권들의 '자학 사관'이 자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적 번영을 망친다고 본다.

하지만 뉴라이트가 추종한 '자본주의 만능론'과 '신자유주의'는 어느 순간 경제 관료 집단의 전문성에 밀려나게 된다. 심화되는 양극화 문제에 유권자들도 '경제민주화'의 당위성에 폭넓게 공감하기 시작했고, 보수 진영(국민의힘 계열)과 자유주의 진영(민주당 계열)은 번갈아 김종인을 영입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수정을 시도했다. 박근혜조차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집권했다. 뉴라이트 경제 이론이 자연스레 힘을 잃자 그 자리를 '이념 투사'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 뉴라이트 이론이나 운동은, 식민사관 옹호, 건국절 추진, 북한 혐오, 이승만 숭배 등을 내거는 '아스팔트 우파'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자본주의 만능론'의 원조 뉴라이트의 '물신숭배'에 비하면 지금 뉴라이트 '잔당'들은 귀여운 수준이다.

그런 뉴라이트 후예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건국 신화를 이리저리 조립하고 자화자찬 품평회를 여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컬트적 신앙을 공적인 자리로 끌고오면 보통의 상식(common sense) 가진 사람들에겐 해괴한 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작금의 '뉴라이트 논쟁'은 그런 꼴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으로 촉발되긴 했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뉴라이트 잔당 세력'의 약진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현실세계에서 '권력'을 획득한 보수 정당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국정원 영내 신영복 글귀가 쓰인 돌덩이를 없앤다거나, 홍범도 흉상을 육사 교정에서 치우려 하는 '반달리즘'을 실천하는 것은 황당하고 불길한 일일지언정, 큰 의미를 부여할만 한 행위는 아니었다. 자신들은 이런 '반달리즘'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겠지만, 보통의 유권자들에게는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그에 동조하거나 끌려다니는 '보수정당'의 무능함은 그 유권자들에게 선거 패배로 창피를 당했다.

그러나 선거 패배를 감당하는 건 국민의힘의 몫일 뿐, 뉴라이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념의 '이'자도 모르는 윤석열 대통령을 숙주 삼아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정부 산하 이른바 '국내 3대 역사 기관'에 똬리를 틀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자리에 이런 인사들이 침투했다는 건 쉽게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8.15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독립기념관장에 김형석 교수를 임명한 데서 정점을 찍는다. 이들은 온갖 수정주의 역사 가설로 기존의 역사관을 흐트뜨리기 위해 대체적으로 합의된 역사적 해석을 야금야금 공격해, 결과적으로 그 신뢰성을 저하하는 게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연탄가스론'처럼 잘 들어맞는 비유도 없다.

이런 토양을 만든 건 두말할 나위 없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석열은 2021년 6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정치 도전을 선언했고, 같은 해 11월 5일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됐다. 2022년 3월 1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3.1절 103주년을 맞아 현충원을 방문했을 때 누가 함께했는지 그 명단을 나열해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장손 김진 씨와 증손인 김영 씨, 매헌 윤봉길 선생의 장손녀 윤주경 전 의원, 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 전 의원, 최병규 선생의 손자 최재형 전 감사원장,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 윤석열 후보는 임시정부 선열 5명의 동상에 헌화·분향하고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묵념했다. 유족이 없는 선열을 모신 무후선열제단,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도 참배했다.

이랬던 윤 대통령의 지금 행동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든 이 모든 사람들을 욕보이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조만간 대통령의 '멘토'이자 죽마고우의 아버지인 이종찬 광복회장도 쫓겨날 것이다. 이미 이종찬 물러나라는 소리가 국민의힘 담장 밖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 뉴라이트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죄다 본질을 벗어나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류의 보수 언론이 뉴라이트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진보-보수 진영 논쟁' 프레임으로 포장하는 건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다. 진보 보수 싸움이 아니라 보수의 정신 분열로 접근해야 많은 게 설명된다.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고 강변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의 자기 부인은 우스꽝스럽지만, 이 역시 논쟁의 본질을 흐리는 일종의 '기만 전술'이다. 뉴라이트 논란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뉴라이트 문제는 보수를 망치는 문제고 보수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이들 뉴라이트 잔당 세력의 목적은 '합리적 보수'의 태동을 봉쇄하는 것이라고 했다.

"뉴라이트의 목적은 진보 진영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의 봉쇄다. 그람시가 말한 '문화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를 보수 진영 내에서 장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화 헤게모니의 구축을 위해서는 '상식' 체계의 확립이 필요하다. 진보와 경쟁해 국민을 설득하려는 것이라면 진보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실제로 문화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보수 진영의 기존 조직인 한나라당 내에서일 뿐이다." (2008.10.17. 프레시안)

보라. 뉴라이트가 지금 집중 공격하는 건 이종찬 광복회장이다. 합리적 보수가 "일본 극우의 기조(신지호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로 매도당한다. 제도권 보수가 재집권에 성공하려면 '내부 투쟁'이 선행돼야 한다. 이승만을 숭배하고 피식민 경험을 축복으로 포장하는 건 그들이 가진 사상의 자유겠지만, 보수 정당이 그들에게 공적 영역을 허락하는 건 보수의 자생력을 갉아먹고 '수구'의 이미지를 덮어쓰는 일이다. 문제는 한동훈 대표다. '뉴라이트' 출신들에 둘러싸여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파동'에 사실상 입을 다물고 있다. 그가 보수의 '새로운 깃발'을 들고 정권 재창출의 토양을 만들어내길 바란다면, 이 낡고 우스꽝스러운 세력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합리적 보수 세력은 당장 뉴라이트를 공적 영역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보수 정당에 희망이 생긴다. 한동훈은 '운동권'과 싸우기에 앞서 '뉴라이트'를 먼저 물리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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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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