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다시 그리워지는 시대

[다시! 리영희] 그가 밝힌 불빛이 꺼져간다

생전에 맺었던 인연을 중심으로 리영희 선생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펜을 드니 내 마음속 깊숙이 파묻혀 있는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아 나서는 탐험가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통해 그를 처음으로 만나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였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게 된 것이 나와 선생님의 첫 만남이었던 셈이다. 그 책의 초판이 1974년 6월에 출판되었는데, 내가 읽은 것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일 년이 더 지난 1976년 5월이었다. 초판이 나온 지 근 2년이 지나 발행된 5판을 읽은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서야 그 책을 읽게 되었을까?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대학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에 따라 대학원 2학년 학생으로 문리대 학생운동의 선배였던 나도 체포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다가 대학에서 제적됨과 더불어 강제징집을 당해 1974년 5월 제대할 때까지 최전방인 철원에서 보병 소총수로서 군복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덕분에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데다가 군 복무 기간 중 제적이 풀려 제대한 후 바로 복교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지만.)

매일 고된 훈련과 노역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전방 감시 업무가 끝나면 잠자기에 바빴던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책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복교한 이후에는 석사논문 쓰기에 바빴던 터라 논문 작성에 직접 관련이 없는 책들은 거들떠볼 처지가 되지 못했다. 1975년 3월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일주일에 한두 번 시간강사로서 강의한 것을 제하면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학창 시절 운동권 학생이 되면서 학자가 되겠다는, 대학 입학 당시의 꿈을 일찌감치 버린 터라 시간강사로 나간 것은 학자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경력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사회변혁에 이바지하는 실천인으로서 활동하고 싶었다. 이와 관련해 나는 대학원을 졸업한 1975년 3월부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된 1979년 3월까지를 지금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내 인생의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한다. 이 시기에 나는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다. 내가 1977년 여름 크리스천 아카데미 중간 집단 교육프로그램의 노동교육 분과 간사가 된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주로 노동자 활동가나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노동자들과 만나 얘기 나누는 데에 내 시간의 대부분을 바쳤다.

당시 나는 사회변혁에 기여하는 지식에 굶주린 환자이기도 했다. 사실 학창 시절 운동권 학생이 되면서부터 그런 지식에 굶주림을 지니고 있었지만 읽을 만한 책을 발견하는 일이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지식에 대한 굶주림은 노동자 활동가들과 만나면서부터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내 나름으로는 '좋은' 책이라 할 만한 책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이를 통해 어렵사리 구해 읽은 책 중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책으로는 파울로 프레이어의 <피억압자의 교육학>(영문판),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영문판), 베링톤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영문판)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자본론> 제1권(영문판)을 구해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내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한글로 된 책은 처음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예 독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는데, 이 점이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매우 늦게 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주위의 권고를 듣고 읽어보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그 책에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면서 나는 커다란 충격과 깊은 감동에 빠졌는데, 이와 관련해 나는 이후 리영희 선생이 엮은 <인간만사 새옹지마>(범우사, 1991)에 실린 '리영희론: 우상과의 싸움'이라는 글에서 그때의 충격과 감동을 전하려고 했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야만과 허위의식에 맞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싸운 한 지성인의 용기 있는 외침, 동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책, 한국전쟁 이후 한국 지성사의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튼 책, 한국 지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책으로 평가받을 만한 책이었다.

▲김세균 오성숙 결혼식 사진. 주례를 맡은 리영희 선생이 뒤에 보인다. ⓒ김세균

선생이 내 결혼주례를 맡다

1975년 12월 하순 어느 날 광화문 한 빵집에서 당시 나의 절친이었고,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장명국과 그의 처 최영희와 함께 이후 나의 아내가 된, 최영희의 대학 후배인 오성숙을 처음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나를 소개해 주기 위해 오성숙을 데려 나왔을 것이다. 알고 보니 오성숙은 이화여대 학생 운동단체인 새얼의 핵심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고, 민청학련 이화여대 대표로 활동한 관계로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 일 년간 도피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오성숙은 민청학련 간부로서 당시 경찰에 잡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경력보다 그녀가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새얼에서 활동할 당시 노동 현장에 가 일한 경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그녀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이후 2년가량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사귀는 동안 그녀는 처음 일 년 정도는 한 주간 신문사에서 주로 노동문제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후 일 년은 부평 한 섬유공장에 취업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다가 노조결성을 눈앞에 두고 퇴사해 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녀가 부평공장에서 근무하기 위해 공장 인근에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할 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녀가 퇴근할 무렵 부평 자취방을 찾아가 함께 근처를 산책하거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결혼을 앞두고 누구에게 결혼주례를 부탁할 것인가를 두고 얘기 나눌 때 그녀는 선뜻 리영희 선생께 부탁하자고 내게 제안했다. 리영희 선생이 주례를 맡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일면식도 없고 해서 내가 직접 부탁드릴 처지에 나는 있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그녀는 새얼 활동 당시 동료들과 함께 리영희 선생을 찾아가 얘기를 듣기도 한 사이이므로 부탁드리면 수락할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추진하기로 했다. 그녀가 리영희 선생께 결혼주례를 부탁해 승낙을 받은 후 결혼하기 직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 그녀와 함께 찾아가 선생님을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첫인상은 선생이 지성인의 풍모와 전사의 풍모를 함께 지닌 분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리영희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1977년 10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한 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리영희 선생이 내 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께 누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삶의 좌표 중의 하나가 되었다.

결혼 후 독일 유학을 갈 때까지

주례를 선 지 얼마 후인 1977년 11월 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리영희 선생의 두 번째 투옥이었다. 이에 따라 결혼한 후 아내와 함께 한번 찾아가 인사드린 것을 빼면 선생님을 직접 뵐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1979년 3월 이른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나는 이우재, 신인령, 한명숙, 황한식, 장상환, 정창렬 등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근 한 달간 이런 저런 고문을 받는 등 생고생하다가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이후 1심에서 3년 선고를 받았지만, 무엇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사태 덕분에 2심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1980년 1월 출소할 수 있었다. 출옥 후에 나는 리영희 선생이 같은 무렵 2년 형을 마치고 만기 출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나와 리영희 선생은 근 10개월 간 같은 감옥 생활을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아 서대문교도소에 있었고, 리영희 선생은 판결 확정 후 이감되어 광주교도소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서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이와는 달리 리영희 선생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리영희 선생의 아내 윤영자 여사는 양심범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남편은 물론 다른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민주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내가 수감되었을 때 내 아내 역시 나와 내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활동하는 거리의 투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출옥 이후 들으니 윤영자 여사와 내 아내는 같은 싸움의 현장에서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는 내 아내가 리영희 선생 부부와 더 많은 인연을 맺었다고 하겠다. (참고로 나는 2018년 11월 내 아내와 사별했다.)

독일 서베를린에서의 만남

나는 1982년 3월 유학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두 아들 –당시 첫째는 세 살이었고 둘째는 한 살이었다– 을 데리고 독일(당시 서독) 유학길에 올랐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원장이었던 강원룡 목사가 독일의 한 교회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 주셔서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비기독교인이었는데, 기독교인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다른 목사들과는 크게 차이를 보인 강원룡 목사의 남다른 덕목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출옥 이후 경찰의 감시 등으로 자유로운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감시 하에서 지내기보다는 유학을 가 읽고 싶었지만 국내에서는 읽기 어려웠던 책들이나 실컷 읽고 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도 유학길에 오를 결심을 하는 데에 크게 작용했다. (신원조회에 걸려 출국 불가 통보를 받아 유학을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김지하의 주선으로 지학순 주교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때 나를 도와준 고 지학순 주교께 지금이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나는 독일에서 처음 6개월간 서독 북서부 소재 노르트팔렌 주 중부에 있는 광공업 도시인 보훔에서 나를 초청한 재단이 제공한 숙소에 거주하면서 어학 공부를 하다가 서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게 돼 1982년 9월부터 귀국한 1988년 2월까지 근 5년 6개월을 서베를린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전두환이 내가 유학 간 달인 1982년 3월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전두환 정권의 퇴장을 강제한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이 있었던 사실에 비춰보아 내가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한 시기는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세력이 광주 민중항쟁의 아픔을 딛고 다시 눈부시게 성장·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나의 유학 생활은 격동에 찬 싸움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점은 유학 생활 내내 내게 커다란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내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는 한국 유학생의 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군부정권의 유학 자유화 조치에 힘입어 1984년부터는 한국 학생들이 대거 독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일의 거의 모든 대학에 한국 유학생들의 수가 최소 백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와 더불어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에 힘입어 이전에는 반독재민주화운동 등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던 많은 인사들이 유럽으로 여행 나오게 되었다. 유럽으로 온 이들은 독일을 반드시 들렸는데, 이들이 가장 많이 찾아온 집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이해동 목사 댁과 서베를린의 내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이해동 목사 댁은 ‘해동 여관’으로, 그리고 서베를린의 내 집은 내 첫째 아들의 이름이 청진이라는 점에 착안해 ‘청진옥’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아와 1985년 여름에는 근 3개월간 연속해서 손님을 받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여름 어느 날 독일의 한 교회 소속 연구소의 초청으로 독일에 와 있었던 리영희 선생이 아내와 함께 서베를린에 있는 내 집을 찾아왔다. 손님 접대로 지쳐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리영희 선생의 방문만은 나는 물론 내 아내에게도 뛸 듯이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내가 리영희 선생과 사적으로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더욱 좋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나는 한국에서 온 분 중 내가 아는 한국 유학생들과 재독 한국인들께 소개해 주고 싶은 분이 오면 이들 한국 유학생과 재독 한국인들을 내 집으로 초대해 그분과 만나 함께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는데, 리영희 선생이 왔을 때는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내 집을 찾아왔다. 서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도 내 집에서 리영희 선생과 첫 상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서베를린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었던 윤이상 선생이 리영희 선생과 만나고 싶다는 기별을 다른 사람 편으로 전해왔다. 이 사실을 알리니 리영희 선생도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을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송두율 교수와 함께 리영희 선생을 모시고 서베를린 서쪽 큰 호수 근처 숲속에 있는 윤이상 선생 댁을 찾아갔는데, 그 집에서 윤이상 선생과 리영희 선생 두 분이 만나 얘기 나누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1989년에 발간된 <리영희 선생 화갑기념문집>의 표지와 목차. ⓒ리영희재단

귀국 이후

독일에서 나는 아무래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야 할 것 같아 귀국하기 전 2년 정도 연구에 집중해 1988년 2월 초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학위를 받자마자 나이도 들고 해서 바로 귀국해 일 년 정도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시간 강의를 하다 다음 해인 1989년 3월 모교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채용될 수 있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수가 되는 꿈을 버렸지만, 돌고 돌아 결국 교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쟁취해 낸 한국 민주화 과정의 덕분이었다. 이런 면에 비춰보면 나는 민주화 과정에 의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이후 나는 이 점을 항상 마음에 새기면서 활동하려고 했다.

교수로서 생활하는 동안 활동 분야가 달라 가끔 문안이라도 드리려고 찾아뵌 것을 제외한다면 리영희 선생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가 쓴 다른 책들은 열심히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 점과 관련해 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전>과는 구분되는, 리영희 선생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규명해 보는 책을 써보고 싶은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나는 1989년에 발간된 <리영희 선생 화갑기념문집>에 '한국전쟁과 미국의 외교·군사정책'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나의 전공 분야는 정치사상·이론 분야였기 때문에 한국전쟁 관련 논문을 쓰는 것은 내겐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쓴 것은 일차적으로는 내 전공 분야의 글을 리영희 선생의 화갑문집에 싣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였고 더 중요하게는 당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비망록이 기밀 해제되어 그 복사본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그 비망록에서 찾아낸 것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2010년 12월 리영희 선생이 작고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고, 내 결혼주례를 맡아 내겐 더욱 특별한 존재였던 리영희 선생이 별세한 것이다. 내 슬픔은 매우 컸다. 이후 내가 존경했던 분들이 한 분씩 한 분씩 별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들이 별세함과 더불어 그들이 추어올렸던 깃발들이 내려지고 있고 그분들이 밝혔던 불빛들이 하나씩 하나씩 꺼지고 있는 것 같다. 물신숭배가 만연해지고 신흥 권력층의 출현으로 권력 숭배가 더 확산하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들이 지칠 대로 지쳐가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누가, 그리고 어떻게 깃발을 다시 나부끼게 하고 불빛을 다시 밝힐 것인가? 지금은 우상과의 싸움에 온 몸을 던진 리영희 선생이 더욱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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