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외교 대국화에 나서는 일본
한국에서 총선이 치러지던 4월 10일, 기시다 일본 총리는 미국을 국빈 방문해 미·일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양국 정상은 '미·일 정상 공동성명- 미래를 위한 글로벌 파트너' 라는 제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미·일 글로벌 파트너십의 핵심이 '미·일 안보조약에 기초한 양국 간의 방위·안보협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동중국해에서 중국의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 시도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공동성명은 먼저 2022년 12월 발표된 안보 3문서의 GDP 2% 방위비 증액, 적기지 반격능력 보유, 육·해·공 통합작전사령부 신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어 새로운 전략 이니셔티브로서, △지휘통제 체계 개편에 의한 양국 군사력의 통합작전능력 제고, △일본의 반격능력에 필요한 군사장비 개발과 운용을 위한 협력, △일본의 미·영·호주 오커스 필러2(AUKUS pillarⅡ) 프로젝트 참가 및 한·미·일 연례 연합훈련, △일본의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및 운용지침 개정을 통한 미·일 공동의 무기 개발·생산 등을 발표했다.
일본의 오커스 필러2 참가 문제는 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4월 8일에 오커스 국방장관회의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일본의 강점과 일본-오커스 3국 사이의 양자 협력관계를 고려해 오커스 필러2에 일본이 협력국으로 참가하는 것을 고려한다"고 이미 밝혔다.
오커스 필러1은 핵추진잠수함 분야의 협력 등 군사적 성격이 강하지만, 필러2는 수중전, 양자 기술, 인공지능, 사이버전, 정보 공유, 극초음속미사일, 전자전, 국방혁신 등 8개 분야의 첨단 군사기술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밖에도 이번 성명에서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비상임이사국의 의석 확대를 통해 유엔안보리를 개혁한다고 밝히면서, 개혁된 유엔안보리에서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바이든 대통령이 지지한다고 재차 밝히고 있다. 오래전부터 일본이 거부권 없는 형태로나마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해 외교 대국화를 희망해 왔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의 강한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미·일 양국은 이번 공동성명에 대해 "안보 3문서에 기초한 방위력의 발본적 강화로 미·일 방위관계가 업그레이드되어 미·일 안보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엠마누엘 주일 미 대사는 기시다 총리의 국빈 방문을 평하면서, 안보 3문서에 명기된 군사비의 GDP 2% 증액과 적기지 반격능력 보유를 위해 미국제 공격용 순항미사일 토마호크를 구매키로 한 점을 들어 "기시다 정권은 2년 만에 70년 동안 유지되어왔던 일본의 안보정책을 근저부터 뒤집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일본의 안보정책 대전환에 맞춰 기시다 총리를 미국 국빈으로 맞이했다. 이번 국빈 공식방문은 2015년 4월 아베 총리(당시)가 국빈 방문한 지 9년 만의 일이다. 두 차례 일본 총리의 국빈 방문은 일본 안보정책의 대전환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당시 아베 총리는 헌법을 위반하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내각 결의(2014. 7.)를 채택한 뒤 이듬해에 방미했으며, 기시다 총리도 역대 일본 정부가 헌법위반 문제 때문에 피해 왔던 적기지 반격능력 보유를 인정한 내각 결정(2022. 12.)을 내린 뒤 이번에 국빈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일 주도로 지역 소다자안보기구 추진
그렇다고 일본이 무조건 미국의 대외 전략에만 추종할 뿐 나름의 독자적인 안보전략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은 중국의 굴기에 맞서기 위해 이미 2006년 '자유와 번영의 호(弧)', 2013년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과 같은 외교안보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번 미·일 동맹의 군사 일체화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대외전략에 편승하는 방식이지만, 일본의 적극적인 대미 안보이니셔티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냉전 초기 미국은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전 세계에 지역안보기구들을 창설해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남아조약기구(SEATO), 중앙조약기구(CENTO) 등이다. 동아시아지역에서도 태평양동맹(Pacific Pact) 결성 움직임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이 발의하고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호응하면서 진전되는가 싶었지만, 국제정세 급변과 일본 참가 문제로 지지부진한 끝에 중단되었다.
1949년 장개석 군대가 패배해 대만으로 쫒겨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또한 미군 점령 하에 있던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에야 주권을 회복하였다. 반공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안보기구 논의에 일본은 빠져있었다. 그러던 일본이 이제 본격적으로 소다자 지역안보기구의 창설을 주도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인도양과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호주와 군사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비핵지대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뉴질랜드는 미 핵추진 항모의 입항 거부 문제로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에서 탈퇴해 호주만 잔류했고, 대만(臺灣)은 1954년 제1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하자 그해 12월 미·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으나, 1978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직후 미국이 대만에 일방적으로 조약 파기를 통보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지만, 1991년 화산폭발로 인한 클라크 공군기지 해체와 1992년 필리핀 의회의 요구에 따른 수빅만 해군기지 폐지 등으로 주둔 미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1999년 양국은 '방문군 지위협정(VSA)'을 체결해 양국 연합훈련을 재개했으며, 2014년 4월 '미-필 방위협력증진협정(EDCA)'을 체결해 미군의 순환 배치와 임시 미군기지 건설에 합의했다. 이 협정에 따라 2015년 8개 임시기지가 건설되었고, 2023년 4월부터 4곳이 추가 건설되었다.
이처럼 필리핀이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본격 재개한 가운데, 작년 11월 3일 기시다 총리가 마닐라를 방문해 2022년에 집권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일본자위대와 필리핀군의 상호 파병을 쉽게 하기 위하여 방문군지위협정(VSA)과 유사한 성격의 '상호접근협정(RAA)'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양국이 각각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과의 3국 안보협력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합의한 3국 안보협력은 이번 미·일 정상회담 다음날인 4월 11일에 열린 미·일·필리핀 3국 정상회담에서 실제 착수되었다. 3국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남중국해 어디서든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적용할 것"이라며 남중국해 영토분쟁에서 필리핀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한 3국 정상은 스프래틀리 군도가 있는 남중국해에서 합동순찰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작년 6월 미국, 일본, 필리핀 3국이 해양경비대 차원의 연합훈련을 실시하던 것을 해군 차원으로 격상한 것이다.
한반도와 지역 정세의 안정이 최우선 과제
여기서 우려되는 부분은 새로운 인도·태평양 지역질서가 일본의 이니셔티브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미·일을 중심으로 호주, 인도가 참여하는 4개국 안보협의체(Quad)가 창설된 데 이어 미·일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개국 안보협의체와 미·일·필리핀 3개국 안보협의체가 발족하게 되면서, 향후 지역질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허브-스포크(Hub & Spokes) 관계에서 미·일을 중심으로 한 허브-스포크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유엔안보리 개혁을 구실로 미·일은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마저 실현될 경우 일본은 군사와 외교의 강대국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유엔안보리가 제 기능을 찾기 위해서는 변화된 국제 역관계를 반영한 개혁이 되어야지 어느 특정 국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트럼프 미 행정부 당시 G7을 G11로 확대하려고 했으나 한국의 외교력이 강화되는 것을 견제한 일본이 강력히 반대해 무산된 바 있다.
오늘날 일본의 군사 외교 대국화 움직임은 중국의 굴기에 따른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의 굴기와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가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을 흔들고 역내 국가들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한·미·일 3국 안보협의체나 제안이 올 경우 오커스 필러2에 참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중국발 지정학 리스크가 장기적인 것이고 아직 중국의 위협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가 미·일에 편승해 과도하게 대응하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을 겨냥한 집단 군사행동에 동참하는 것은 남북이 분단되고 북한의 군사위협이 엄중한 우리 현실에서 오히려 우리의 안보를 해칠 수 있다. 그보다는 남북관계 정상화를 통해 한반도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정세관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또 그래야 우리 한국이 지역정세 변화의 이니셔티브를 잡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 국제안보정세 속에서 맨 먼저 추진해야 할 일은 남북대화의 복원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국회나 시민사회의 1.5트랙이나 2트랙 차원에서라도 이를 추진해야 한다. 국회 또는 국회-시민사회 연대로 초당파적인 '남북관계 특위'를 만들고 산하에 '긴장완화 소위'와 '북핵 소위'를 두는 것도 한 방안이다.
어떤 추진체가 됐든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를 우선 몇 가지 추려볼 수 있다. 남북대화 재개와 이를 통한 '9.19군사합의' 복원, 북한 핵미사일 위협 해소와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한다. 기존의 한미동맹을 견지하되 '한·미 워싱턴선언'의 핵협의그룹(NCG)은 존치하면서도,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미 핵공격 잠수함의 수시 기항은 자제하도록 한다.
또한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은 당장 중단하기 어렵다면 우선순위와 규모 및 속도 조절을 통해 바로잡아 나가도록 촉구한다. 또한 1.5트랙 또는 2트랙으로 '북방경제 특위'를 만들고 국가별로 소위를 구성해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도록 노력한다.
한국과 같은 분단 상황의 중견국가는 강대국 간의 진영논리에 휘말려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국제정세를 피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남북대화의 재개를 통해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나아가 주변국들과의 관계개선으로 국제정세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관계보다 관여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언제나 상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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