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경인본부 노안 담당자 강의 때 물어보았다. "여러분, 급식노동자가 일한 지 6개월 만에 디스크가 발병했어요. 산재가 승인될까요?" 다들 머뭇거렸다. 통상 허리디스크는 10년 전후의 근무력이 있어야 산재가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15년 전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일할 때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찾아왔다. 일한 지 6개월 정도 되었는데 산재가 불승인되어 소송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경험도, 지식도 없어 일단 부딪쳐 보았다. 우연히 소송 과정에서 신청한 현장검증이 받아들여져, 판사와 함께 그 식당으로 가보았다. 일반인보다 훨씬 왜소한 그 여성 노동자에게 식당의 물품과 도구들이 왜 그리 무겁고 힘들어 보였는지. 다행히 승소해서 그녀의 요추간판탈출증은 산재로 인정되었다.
그때 내 통념이 깨졌다. 현장의 모든 노동과정은 표준 남성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2015년 KTX 승무원 여성노동자의 성희롱 피해로 인한 우울증 산재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고객의 괴롭힘과 성희롱으로 인해 발병했지만, 회사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오랜 다툼을 통해 다행히 산재로 승인되었다. 5년이 지난 뒤 그녀의 입사 동기가 찾아와 같은 사유로 발생한 산재 신청을 원했다. 긴 시간이 지났으나 회사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선조치와 예방을 여전히 하지 않았다.
책 <일하다 아픈 여자들>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들이다. 이 책은 여성의 관점에서 산재를 말한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여성 노동자가 말하는 산업재해" 부분으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들의 경험과 언어로 남성 중심인 일터 현장을 생생히 고발한다. 표준 남성의 몸에 맞게 설계된 작업대에서 일하다 아픈 제조업 여성 노동자, 중량물을 착용한 채 밀폐 구역을 감시하는 조선소 여성 노동자, 형틀 목수로 일하는 건설업 여성 노동자, 라이더 일을 하다가 소비자에게 폭행당한 여성 노동자, 가정관리사로 일하면서 온갖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는 가사 노동자의 작업 현장 실상, 그리고 그들이 일하다 겪은 산재 경험과 고통이 생생히 전달됐다.
뇌병변 장애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의 인터뷰를 통해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장애여성과 성소수자가 노동 현장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도 드러났다. 서비스직 여성노동자 중 학교급식노동자(폐암), 제빵노동자(유산, 근골격계질환), 항공기승무원(유방암), 청소노동자(직장 내 성희롱, 괴롭힘), 사회복지사(직장 내 괴롭힘, 정신질환)들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이들의 노동과정에서 어떻게 산재가 발생하는지, 그 후 (회사 등에 의해) 어떻게 현실이 왜곡되고 대응이 방해받는지를 책은 생생히 보여준다.
산재 피해자로서 재해 발생 후 가족들이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도 파킨슨병에 걸린 여성노동자의 가족 인터뷰를 통해 그려진다.
2부는 "산재보상제도와 젠더공백"으로 산재 신청, 요양, 복귀 및 재활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노동환경 여러 요인의 성별 격차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는 제언으로서 이러한 산재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제시됐다.
이 책은 여성의 관점에서 산재와 노동안전보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외국학자들의 책은 간혹 있었지만, 한국의 구체적인 상황과 경험을 녹여낸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 노동안전보건과 보상에 대한 관점은 통상적인 노동자 또는 산재 노동자라는 평균적인 관점에 머무른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관점은 남성 중심의 안전보건 및 보상 체계와 관련 법률에 따라 제도화됐다. 자연히 여성은 이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배제되었다.
그 결과 일터의 모든 작업용 도구와 안전 장비들은 표준적이고 건강한 남성의 몸에 맞게 적용되어 왔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산재보상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산재 판정의 기준과 지침은 제조업, 건설업 등에 종사하는 표준 남성에 맞춰지도록 국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작업환경과 보건학 연구도 대부분 산재 다발 사업장 및 남성노동자에 치중되었다. 이 책은 이런 잘못된 관행과 제도에 이의와 고민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이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현장에서 더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의, 장애인의 관점으로 일터 환경을 보는 것이 일터 민주주의 문제이자 자본의 일방적 통제에 대응하는 중요한 과제임을 얘기한다. 표준화된 남성도 결국 산재사고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이 표준으로 삼고 있는 건강한 남성의 몸은 결국 노동 과정상에 발생하는 각종 질병과 사고를 고려하면 허상에 가깝다. 결국 다양한 '몸'에 연대하고 다름을 고민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이자 노동자의 안전에 중요한 매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노동자의 생생한 말과 경험이 수록됐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다양한 직종의 여성노동자와 장애인,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의 가족을 면담하고 기록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 현장의 안전 보건 현실이 구체적으로 여성의 몸을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배제하는지, 여성 노동자가 왜 산재를 신청조차 하기 어려운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 왜 드러날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책은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과 산재가 저평가되는 현실을 지적하고, 산재 신청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가를 이야기하며, 산재를 승인받은 이후 노동자의 사업장 복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생생히 독자에게 전달한다.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아쉬웠던 점도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주노동자의 노동 현실과 노동 안전으로부터의 소외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젠더 관점에 집중한 의도가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노동안전 문제에서 가장 소외된 분야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특히 이주여성 노동자들은 여러 관점에서 가장 많은 차별과 고통 아래에 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향후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과 고민이 있으면 좋겠다.
또한 책의 2부의 "신청, 요양, 복귀"의 장에서 보다 구체적인 성별 격차 문제가 드러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재 보상과 관련한 문제는 단순히 여성 노동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산재 보상 과정 전반에 걸쳐 축적된 고질적 문제라는 게 저자의 인식인 듯하다.
2023년도 업무상 질병 승인율은 59.5%다. 남성은 61.6%(1만4073명 중 8676명), 여성은 52.6%(4450명 중 2341명)로 9%포인트 차이가 있다. 8개 판정위원회 중 서울남부판정위원회를 제외한 7곳의 판정위원회에서 여성에 대한 산재 질병 승인율이 남성보다 현저히 낮았다. 판정위원회를 포함한 각종 판정 기구의 성별 구성을 짚고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뇌심혈관계질환 이외 다른 직업병 판정 기준에서도 성인지적 관점이 반영되도록 하는 등의 노력이 추가적인 과제로 논의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의 부록은 '노동안전보건의 관점으로 여성노동운동'을 짚었다. 오늘날 우리의 그나마 나아진 노동환경이 많은 여성 노동자의 피와 땀, 고통으로 쌓아 올린 소중한 것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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