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던 다수 나섰다'…독일서 극우 정당 반대 1백만 시위

'AfD 정치인 이민자 추방 모의 참여' 보도 뒤 시위 이어져…독 정치권, 집회는 적극 지지·해산 요구엔 '신중'

지지율 2위에 올라서며 인기가 치솟던 독일 극우 정당이 해산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에 부딪혔다. 소속 정치인들이 이민자 추방 모의에 연계됐다는 이유다.

주말 독일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극우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일부 지역에선 참석자가 너무 많아 시위가 조기 종료되기까지 했다. 이번 시위를 계기로 극우의 득세에 위기감을 느낀 '침묵하던 다수'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은 독일 전역 약 100곳에서 열린 AfD 반대 시위에 19~21일(이하 현지시각) 3일간 14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최측을 인용해 보도했다. 21일 수도 베를린에서만 10만 명이 모였고 같은 날 오후 오후 남부 뮌헨엔 10만 명 가량이 몰려 안전 문제로 조기 해산했다.

19일 북부 함부르크에서도 당초 예상보다 많은 5만~8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며 안전 문제로 조기 해산이 실시된 바 있다. 21일 서부 쾰른에도 적어도 수만 명 이상, 주최측 추산으로는 7만 명이 모였다. <로이터>는 이날 AfD 지지율이 높은 동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에서도 집회가 열렸다고 전했다.

시위는 지난 10일 독일 탐사보도매체 <코렉티브>가 지난해 11월 포츠담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이민자 추방을 논의하는 극우 모임에 AfD 소속 정치인들이 참여했다고 폭로하며 시작됐다. 매체에 따르면 해당 모임에선 이민자 추방을 뜻하는 극우 쪽 용어 '재이주(remigration)'가 자세히 논의됐고 설사 이민자가 독일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피부색이 다르거나 독일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지 않은" 이들은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구상이 나왔다. AfD 쪽은 해당 모임은 당과 관련 없는 모임이었다고 선을 긋고 알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가 모임에 참석한 개인 고문 롤란트 하르트비히와 결별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시위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21일 영국 스카이뉴스 방송은 베를린에서 시위 참여자들이 "인종차별주의는 대안이 아니다", "나치는 물러나라"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AfD 해산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시위에 참여한 달릴라는 매체에 "두렵다. 모든 곳에서 우경화가 점점 더 진행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여자 우비는 "늘어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일 3만5000명 가량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집회에 참여한 사회 상담사 슈테피 키르셴만도 <로이터>에 이번 집회가 "우리가 아무 비판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라고 말했다.

함부르크 시위 조직자 중 하나인 카진 아바치는 미 CNN 방송에 시위가 "매우 강력한 우파 극단주의와 네오나치 네트워크와 상대하고 있다"며 "정치인 뿐 아니라 사회 한가운데서 민주주의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다시금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신념을 가지고 AfD에 투표하는 핵심 지지층도 있지만 (정부에) 항의를 위해 AfD에 투표하는 유권자들도 있다"며 "우리가 저항 세력이 아닌 우파 극단주의 정당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독일 온라인 청원 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AfD 해산을 요구하는 청원엔 70만 명 이상이 서명하기도 했다.

독일 집권 정치인들도 시위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은 14일 동일 주제로 동부 포츠담에서 열렸던 시위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숄츠 총리는 19일 영상 성명을 통해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우리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있다"며 독일 전역의 시위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우파 극단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벨레는 낸시 패저 독일 외무장관이 20일 현지 풍케미디어그룹과의 인터뷰에서 <코렉티브>가 보도한 극우 모임이 1942년 나치 지도자들이 베를린 외곽 반제에 모여 유대인 학살을 모의한 "반제 회의의 끔찍한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며 "'재이주'와 같은 일견 무해해 보이는 용어 뒤에 있는 것은 인종적 배경이나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사람을 집단 추방하려는 생각"이라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독일에서 AfD는 제1야당 기독민주연합(CDU) 다음으로 지지율이 높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여론조사를 보면 이달 5일 기준 AfD 지지율은 23%로 기독민주당(32%)에 이은 2위다. 반면 집권 '신호등 연정'의 사회민주당(SPD), 녹색당, 자유민주당(FDP) 지지율은 각 15%, 13%, 5%에 머물렀다. 2021년 총선에서 AfD가 10.3%를 득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몇 년 만에 지지율이 두 배로 뛴 것이다. 특히 AfD는 베를린을 제외한 구동독 대부분의 지역에선 지지율 30%를 넘기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반이민 정서로 기반을 다진 AfD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로 인한 연료비 및 물가 상승으로 불만이 쌓인 가운데 정부가 신규 건물에 석유·가스 난방 시스템 설치를 금지하는 에너지·기후 정책을 발표하자 치솟은 불만에 편승해 지지율을 올렸다. 지난해 중순엔 집권 사회민주당 지지율을 추월하고 2위로 올라섰다.

공공정책전문대학원 베를린 허티스쿨 교수인 안드레아 룀멜레는 <뉴욕타임스>에 "이번 시위가 반드시 AfD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며 "하지만 이는 침묵하는 다수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중요한 신호"라고 평가했다.

다만 지지율이 높은 AfD 해산에 대해선 역풍을 우려한 신중론이 많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12일 기독민주연합 대표인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현지 언론에 AfD 금지 주장에 반대하며 "지지율이 30%에 달하는 정당을 간단히 금지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이는 현실에 대한 무서운 억압"이라고 반문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도 AfD가 금지될 경우 오히려 연대론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기독민주당 필립 암토르 의원이 18일 "민주주의의 적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억압이나 금지가 아니다"라며 "더 나은 논쟁, 좋은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독일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훼손하려는 정당을 금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해당 법에 의해 나치당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에 1952년, 독일공산당에 1956년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21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의 의회 건물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휴대전화로 빛을 밝히며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반이민 논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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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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