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디지털 플랫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에서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비대면 생활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가상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게임에 익숙한 1020세대들은 캐릭터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익숙하다는 특징도 작용했다. 타인을 만나고, 나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은 '디지털 정보 관리'이자 '디지털 놀이'가 되었다. 특히 디지털 놀이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가 스스로 나의 이미지와 역할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하는 '나'는 하나가 아닌 여러 명의 '나'로 구성된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경우 세컨드 계정을 가진 이용자도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2NE1 멤버 산다라박은 세컨드 계정을 만들었다며 팬들에게 공지하기도 했다. 산다라박은 세컨드 계정에서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공유할 것을 예고했다.
이처럼 아이돌 개인, 이용자 개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케이팝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케이팝 산업역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상품과 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팬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전략을 세우는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아이돌 역시 디지털 플랫폼 의례(ritual)에 맞게 계정을 운영하며 자신의 삶 속에 팬들을 초대하고, 라이브 방송을 통해 실시간 소통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가상공간인 메타버스에서 팬들을 만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기획사들은 비대면 공연이나 비대면 팬미팅을 진행했고, 케이팝 생산자, 팬들 모두 디지털 기술이 매개하는 공간에서 문화생산과 문화소비의 다양성을 학습하게 되었다. 복잡한 디지털 시스템과 기술 인프라는 인간의 주관성과 문화적 정체성 등 삶의 경험과 구조에 깊이 침투해 일상을 재조정하고 사회적 관계를 재편했으며, 재편된 사회적 관계는 아이돌과 팬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상아바타, 가상인간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는 이유도 디지털 환경이 우리의 사고와 삶의 경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2020년 데뷔한 SM의 걸그룹 '에스파'는 네 명의 멤버로 구성된 걸그룹이다. 기존 아이돌 그룹과의 큰 차이는 이들 멤버들이 자신의 가상 아바타를 소유한다는 점이다. 데뷔 시기, '가상과 현실의 공존'이라는 콘셉트만큼 이들은 가상아바타를 활용해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파의 아바타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이상화된' 신체 이미지를 지녀 오히려 현실 속 멤버에게 정형화된 틀이 될 수 있다는 비판적 의견도 등장했다. 제삼자가 아바타 캐릭터로 악의적 창작물을 만들 위험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팬들은 다양한 문화적 소비로서 가상아이돌을 보고 즐기는 체험에 빠르게 적응했고, 에스파의 가상멤버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에스파의 등장은 가상캐릭터만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지난 2023년 1월 MBC <쇼! 음악중심>에서는 가상아이돌이 출연해 공연했다. 음악방송에 출연한 아이돌은 4인조 가상그룹 '메이브'로, 이들은 첫 번째 싱글앨범 <파도라스 박스>의 타이틀곡 무대를 선보였다. 유튜브에서의 관심도 뜨거웠는데, 유튜브 데뷔무대 영상만 100만 조회 수를 넘었다. 2022년 8월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 멤버 제인이 YTN <뉴스라이더> 생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점차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이세계아이돌', '플레이브' 등의 가상 아이돌 그룹이 있다. 가상 아이돌 그룹의 오프라인 콘서트 활동도 활발한데, 2023년 진행된 이세계아이돌 오프라인 콘서트에는 1만 명 이상의 팬이, 플레이브 콘서트에는 5000명 이상의 팬이 참여했다. 케이팝 산업은 다양한 기술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고, 팬들은 충성도가 높아 관련 콘텐츠나 퍼포먼스에 빠른 피드백을 남긴다. 따라서 지금의 가상아이돌이나 메타버스 팬미팅 등에도 참여한다.
팬덤 역시 가상화하고 있다. 오늘날 팬들에게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문화를 통해 느끼는 만족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의 커뮤니티 형성과 소통, 그리고 문화체험과 향유 등이다. 스마트폰과 앱, 모바일 챗봇, 그리고 대화형 인터페이스가 갖는 관계의 비자발적 재편의 경험은 케이팝 산업 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팬덤 플랫폼이 기획사가 운영하는 팬덤 플랫폼으로 인해 그 힘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팬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운영돼왔던 무료의 팬 커뮤니티가, 기획사 자본이 만든 유료 기반 플랫폼에 흡수됨에 따라, 그 변화는 이후의 팬덤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팬들 역시 가상공간에서 아이돌 가수와 사적 메시지를 주고받고 라이브 방송에 접속해 아이돌 가수들의 '현재'를 함께한다. 하지만 이러한 참여와 체험은 소비자로서의 관계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기술이 매개하는 관계성에 적극적인 지금의 대중은 '체험적 소비'를 원한다. 즉, 지켜보고 지지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내'가 체험하고 직접 느낄 수 있는 '문화적 향유'를 선호한다. 음반구매를 통해 수집한 포토카드, 팝스토어에서 아이돌 굿즈를 구입하는 지금의 팬들은 체험을 위해 먼 곳을 여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공 지능이나 디지털 플랫폼, 메타버스 등의 기술은 다양한 문화적 환경을 팬덤에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사의 새로운 수익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상업적으로 고도화된 영역이기도 하다. 기술로 인해 아이돌 그룹과 팬들이 만날 기회는 오프라인을 넘어 프라이빗 채팅 플랫폼, 팬덤 플랫폼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에 맞춰 기획사들은 글로벌 팬덤의 기호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아이돌 그룹 전략이나 활동에 '오픈마인드'인 팬들에 비해 '케이팝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에서 팬들은 소비자라는 사회적 위치로만 머문다는 점에서 팬들의 피로감도 적지 않다. 디지털이 매개하는 아이돌 문화, 팬덤 활동이 점차 자본의 논리에 예속된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방안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대안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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