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 차를 여자가 몬다고? "하면 어떤데요"

[나, 블루칼라 여자] ⑥ 레미콘 운전기사 정정숙씨

'힘' 좀 써야 한다는 노동 현장, 그곳에도 여자가 있습니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노동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마저도 이겨낸 이들이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블루칼라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기술직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적인 현장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버텼습니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현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했던 무시와 젠더폭력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당당하게 '기술직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간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성들은 건설 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먹매김 노동자, 건물 뼈대를 이어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부품을 염색하는 도장노동자 등 <프레시안>이 만난 블루칼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건설 현장은 다양한 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하는 공간이다. 포크레인부터 화물트럭과 지게차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다양한 건설 중장비들도 서로 뒤엉킨다. 그 중에서도 건설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물차가 있다. '통'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미콘 차다.

레미콘은 'Ready Mixed Concrete'를 줄여 만든 말로 굳지 않은 상태의 콘크리트를 말한다. 액체상태의 콘크리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레미콘을 운반하는 차의 동그란 적재통은 운반중에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건설현장에서 형틀목수가 거푸집을 만들면 그 위에 레미콘 기사가 운반한 콘크리트가 타설되고, 콘크리트가 굳으면 단단한 건물이 세워진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 씨를 만났다. 취재진은 정숙씨의 레미콘 차를 타고 두 탕을 함께 뛰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숙 씨는 자신의 몸집보다 50배가 족히 넘어보이는 레미콘 차를 능수능란하게 운전했다. 그는 레미콘 회사로부터 레미콘을 받아 싣고, 타설이 필요한 건설현장으로 레미콘을 운반해 부었다. 레미콘을 운반하자마자 레미콘이 흐른 자리에 붙어 굳지 않도록 통로를 긁어냈다. 그러고는 레미콘 회사로 돌아와 적재통을 세척하고, 레미콘을 받아 또 다른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 씨를 만났다. ⓒ황지현

정숙씨는 이 일을 시작하기 전 부산에서 택시를 몰았다. 배 타던 남편을 만나 아이 셋을 낳은 정숙 씨는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4년 동안 밤낮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부산 지리에 익숙해졌다. 지리에 훤해졌다는 이유로 레미콘 기사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정숙 씨는 "처음엔 이렇게 큰 차를 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1998년도를 회상했다.

상선을 오래 탔던 정숙 씨의 남편이 중고 레미콘차를 4500만 원에 사서 기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와서 건설업에 타격을 입자 레미콘 운전으로 월 300만 원을 벌던 남편의 수입이 3분의 1로 줄게 됐다. 남편은 상선을 타고 '달러'를 받았는데, 달러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남편은 다시 상선을 타러 나갔다. 구매했던 레미콘 차가 골칫거리가 됐다. 다시 중고로 팔려니 4500만 원이던 차 값이 1200만 원으로 떨어졌다. 도무지 그 가격에는 팔 수가 없었다. 정숙 씨는 본인이 레미콘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남편이 배를 타러 가기 전 일주일 연수를 해줬고, 다른 레미콘 기사 동료에게 이틀 정도 연수 받은 게 다였다. 첫 현장으로 한 터널의 공사 현장을 갔던 그는 오르막길에 레미콘 차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무사히 첫 현장을 다녀온 그는 이후 레미콘 차를 안정감있게 운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자가 왜 그런 '험한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레미콘 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오빠가 '하이고 가문에 없는 중생'이라고 말했다. 전부 다 부정적이었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왜 하려고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여자가 왜 그런 '험한 일'을 하느냐고 했다. 남편도 많이 걱정했다.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자식들만은 '우리 엄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차도 없이 불편하게 다니다가 택시 운전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다닌 기억이 남아있는 듯 했다. 아이들에게 나는 대단한 엄마였다. 집에 차가 없어도 우리를 불편하지 않게 택시 운전을 해준 엄마였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 씨를 만났다. ⓒ황지현

정숙 씨는 가족들의 부당한 '참견' 뿐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터에서 차별을 겪었다. "남자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 가서 먹고 사느냐"는 남성 동료의 황당한 투정도 들어야 했다.

레미콘을 싣고 건설회사에 가서 조금만 운전 실수를 하면 '여자라서 그렇다'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또 한 번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기에 "하면 어떤데요" 라고 따졌다. 그랬더니 '남자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가서 먹고 사느냐'고 말하더라. 그래서 "(남자들이) 지 하기 나름이지 내보고 왜 그런 말을 하는데요"라고 받아쳤다. 그럼 나는 어디 가서 일하란 말이냐.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듣다보니까 생각한 게 어떤 이들은 '여자라서 그렇다'는 둥의 말을 해서 내가 주눅 드는지 반응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정숙 씨는 그런 상황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마초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이 바닥에서 어떻게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아이들이 나를 응원해줬고, 이 일을 해야 한다, 하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냥 자신 있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차별적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부당한 업계 관행을 바꾼 적도 있었다.

법인 기사로 일할 때 부산 문현동 한 현장에 들어갔는데 바퀴가 빠졌다. 여기 바퀴가 빠져서 못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건설회사의 젊은 직원이 와서 '여자가 운전을 X같이 해서 못 들어가는 거지' 이렇게 말하더라. 그 사람은 다른 레미콘 기사들한테도 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럼 "니가 한 번 해봐라"하고 차 시동을 끄고 나와 버렸다.

그랬더니 레미콘 영업부에서도 난리가 나고, 건설회사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건설회사 직원들이 와서 '말실수가 있었다'고 기분을 풀라고 하길래 그 쪽 현장 바닥에서 바퀴가 빠지니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가지 않으면 운전을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바퀴가 빠지는 지점까지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갔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니 다른 기사들이 '아줌마 최고'라고 그러더라. 다른 레미콘 기사들도 바퀴가 빠지고 그 직원으로부터 막말을 들었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왔다더라. 그 뒤로부터는 그 현장에선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만 들어가고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레미콘을 운반하자마자 레미콘이 흐른 자리에 붙어 굳지 않도록 통로를 긁어내는 정숙씨. ⓒ황지현

이날 취재진은 정숙 씨가 레미콘을 운반하는 과정에 동행했다. 해운대의 현장에서 만난 펌프차 기사는 가파른 경사에서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정숙 씨를 향해 '여자라서 운전을 못한다', '그렇게 할거면 운전하지 말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 정숙 씨는 그 펌프기사를 향해 "경사가 이리 가파른데 안전하게 운전해야하지 않겠나", "사고 나면 책임질끼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맞받아쳤다.

정숙 씨는 갑작스레 마주한 갈등 상황에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첫 번째"고 "주눅 들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펌프기사가 비난했던 건 내가 백미러를 보고 후진을 하기 때문에 한 소리를 한 거다. 하지만 나는 여자 중에서도 체격이 작기 때문에 허리가 짧으니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빼면 내 시야에선 보이질 않는다. 그런 어려움을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다 자기 개념에 갇혀서 다른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럴 때 알려주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받아 들인다"고 말했다. 정숙 씨는 안전 문제에는 특히 엄격하게 행동했다. 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말했다.

"일이 정말 억세다"고 말하면서도 웃어 보인 정숙 씨는 "'남자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여자가 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냐. 나는 그냥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25년동안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에게 일터에서의 목표를 묻자 지금 몰고 있는 차가 버텨줄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숙 씨는 "어릴 때는 당돌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른이 되고 생활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레미콘 차는 자신의 몸과 일심동체나 다름없다던 정숙 씨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레미콘 차만큼이나 큰 핸들을 온몸으로 안아서 돌렸다.

아래는 정정숙 씨와 나눈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인터뷰이의 일부 표현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사투리를 그대로 옮겼다.

프레시안 : 본인과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정정숙 : 부산에서 레미콘 기사로 일하고 있는 정정숙이다. 나이는 69세고 일 한 지는 25년이 되었다. 레미콘 공장으로부터 레미콘을 받아 차에 싣고 건설현장으로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건설 현장의 펌프카에 레미콘을 옮겨 주거나, 타설이 필요한 곳에 직접 레미콘을 붓기도 한다.

프레시안 : 수도권 레미콘 기사의 경우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하는 8.5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부산은 어떤가.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통 하루 '몇 탕'을 뛰시나.

정정숙 : 부산에도 8.5제가 정착되는 분위기이지만 나는 용차로 일하기 때문에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한 시간 하고 6시 쯤 집에서 나선다. 8시까지 출근이면 조금 더 여유있게 준비한다. 저같은 경우 '탕'으로 수당을 받지 않고 시간제로 수당을 받는다.

프레시안 : 레미콘 기사들은 회사에 소속된 법인기사거나, 개인 사업자로 회사와 위탁계약을 맺거나, 물량 변동에 따라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용차 기사 등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 정숙 씨는 어떤 계약 형태로 일을 하고 있나.

정정숙 : 용차 기사로 일하고 있다. 회사에 계약되어 있는 차가 대부분인데 월말이나 물량이 갑자기 많으면 용차를 불러서 하루 물량을 해결한다. 회사 소유 차거나 회사 소속으로 일한다기 보다는 하루 용역으로 나를 쓰는 거다. 그래서 물량이 몰릴 때 일이 있고, 물량이 없으면 일이 없을 때도 있다.

프레시안 : 시간제로 수당을 받는다는 점은 신기한 것 같다. 보통은 '탕' 별로 운반비를 받는데, 시간제로 임금 계산을 하나. 운반비로 얼마 정도를 받는가.

정정숙 : 회사에 소속된 레미콘 기사들은 '탕' 별로 계산을 하는데 나는 용차기사라서 4시간을 기준으로 22만 원을 받고 4시간 이후 초과하는 1시간 마다 수당이 붙는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할 때도 있고, 6-7시간을 일할 때도 있다. 오늘은 8시간 정도를 일 한 것 같다. 처음 일을 시작 할 때는 회사에 소속되어 10년 정도 있었는데, 한 탕에 2만 9천원부터 시작해서 3만 5천원까지 벌고 나와 지금은 용차기사로 일하고 있다. 한 달에 보름 정도 일하면 400만 원 정도를 번다.

프레시안 : 레미콘 차 할부, 차량 정비비, 타이어와 같은 부속 용품, 자동차 보험비 등을 계산하면 순수익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정정숙 : 레미콘 차량 가격과 생활비를 생각하면 실제로 들어오는 수입은 적은 편이다. 매달 차 값 할부 빠져나가고 한 달 생활하면 월 400만 원은 적다. 요새는 차 값이 비싸서 1년 총 수입이 6천만원은 넘어야 레미콘 차량 감가상각비를 제외하고 여유가 생긴다. 월 300만 원 ~ 400만 원을 벌어서는 빠듯한 편이다. 회사에 소속된 차들은 그 정도를 벌 수 있지만, 용차는 일이 들쑥 날쑥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 번다. 스스로 차를 정비할 줄 아는 사람은 돈이 덜 드는데, 정비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하는 나같은 입장은 돈이 더 많이 든다.

프레시안 : 레미콘 차량 가격은 얼마인가.

정정숙 : 새 차를 사려면 1억 5천만원이 조금 넘는 것 같다. 중고는 6000만 원 ~7000만 원 정도가 되어야 일하는 데 지장이 없이 일할 수 있는 차를 구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레미콘 기사가 하는 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일의 장단점도 설명해주실 수 있나.

정정숙 : 우리는 현장에서나 사회의 여러 면으로 보나 운전기사라기보다, 뭐라고 할까 심부름꾼에 가깝다. 레미콘 기사가 레미콘 회사에 가서 물량을 받아서 건설회사에 배달해주는 것만 하면 참 쉽고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레미콘 회사에서 건설 현장에서 쓸 용도와 맞지 않는 레미콘을 주면 우리의 책임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남은 레미콘들을 우리가 수거해서 분리 배출해주기도 한다. 건설 현장에서 레미콘이 필요해서 우리를 부른 것인데 레미콘 차가 크기 때문인지 거추장스러운 존재처럼 대하기도 한다. 하루종일 운전하면 현장에서 대기 시간에 땅을 디디고 서있을 수도 있는 건데 운전석에 타있거나, 레미콘을 내려줘야 하니 차량 뒤편에 올라 타있기만 한다. 또한 안전 문제도 있다. 용차로 일하는 경우 시간제로 일하니까 안정감 있게 운전할 수 있지만,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게 되면 '탕' 별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많이 다니는 게 중요해서 위험하게 운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을 하며 다양한 곳을 다닐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다. 이전에 작은 공간에서 수선일을 했는데, 운전은 바깥 온 군데를 다니면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 특별히 경치 구경을 안 가더라도, 산에 갈 수도 있고 바다에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봄 꽃이 피면 그걸 보고, 예쁜 구름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레미콘을 운반하자마자 레미콘이 흐른 자리에 붙어 굳지 않도록 통로를 긁어내는 정숙씨. ⓒ황지현

프레시안 : 일을 한 지 25년 되셨다고 했으니 1998년부터 일을 시작하신 건가. 레미콘 기사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

정정숙 : 처음엔 이렇게 큰 차를 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배를 오래 타다가 중고 레미콘차를 4500만 원에 사서 기사 일을 시작했다. 그게 1997년 즈음이었는데 12월 외환위기가 와서 그때부터 건설업에 타격이 있었다. 남편이 레미콘 운전으로 300만 원을 벌다가 IMF 위기 이후 100만 원을 벌게 됐다. 아이가 셋이 있는데 생활하기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남편은 상선을 타고 '달러'를 받았는데, 달러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으니까 남편은 다시 상선을 타기로 했다. 남편이 다시 배를 타기로 한 뒤 구매했던 레미콘 차가 골칫거리였다. 다시 중고로 팔려니 4500만 원에 샀던 차를 1200만 원에 팔라고 했다. 도무지 그 가격에는 팔 수가 없어서 내가 운전을 할 줄 아니까 레미콘 기사를 해봐야겠다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다. 남편이 배를 타러 가기 전 일주일 연수를 해줬고, 다른 레미콘 기사 동료에게 이틀 정도 연수를 받은 게 다였다. 차의 넓이와 길이를 주의하라고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프레시안 : 일주일 정도 연수 받고 레미콘 기사로 일을 시작한 건데, 불안한 마음이 앞섰을 것 같다. 처음 일했던 현장이 기억나나.

정정숙 : 백양터널 공사현장이다. 가는 길이 약간 오르막인데 올라가다가 중간에 서면 오도 가도 못한다. 승용차는 움찔 했다가도 가는데 레미콘 차가 멈추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긴장되고 초조했다. 차가 뒤로 밀리면 큰일이니까. 지금 레미콘 차들은 오토가 되니까 그런 걱정이 없는데, 옛날 레미콘 차들은 사이드 브레이크 살짝 당기고 출발해야 하는 그런 요령들이 필요 했다. 그 현장을 무사히 다녀왔지만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이야 길들이 다 좋아져서 괜찮지만 비포장 도로도 많고 쉽지 않았다.

프레시안 : 레미콘 기사로 일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나.

정정숙 :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선 일을 배워 공장에서 일했고, 수선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고 아이 셋을 낳고 10년 동안 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택시기사로 일을 했다. 내가 몸이 약했는데 혼자서 아이들 3명을 데리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친정에 갈 때도 누구 차를 얻어 타다 보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도 도움이 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4년 동안 밤낮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부산 지리에 익숙하게 된 게 레미콘 운전을 하면서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프레시안 : 택시 기사로 일을 하셨지만 레미콘 기사는 건설현장도 다니고 큰 차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편이 남긴 '처치곤란의 차'이긴 했지만, 레미콘 기사를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정정숙 : 레미콘 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오빠가 '하이고 가문에 없는 중생'이라고 말했다. 전부 다 부정적이었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왜 하려고 하냐고 핀잔을 줬다. 여자가 왜 그런 '험한 일'을 하냐고 했다. 남편도 많이 걱정했다.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자식들은 '우리 엄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차도 없이 불편하게 다니다가 택시 운전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다닌 기억이 남아있는 듯 했다. 아이들에게 나는 대단한 엄마였다. 집에 차가 없어도 우리를 불편하지 않게 택시 운전을 해준 엄마였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무전기를 통해 동료와 소통하고 있는 정숙씨. ⓒ황지현

프레시안 : 레미콘 기사 중 여성 노동자 수는 얼마나 되는가. 비율이 궁금하다.

정정숙 : 정확한 비율은 모르겠지만 부산에 레미콘 기사들이 1000명 정도 있으면 여자는 2명 정도밖에 안된다.

프레시안 : 여성이 건설현장에 적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정숙 : 일보다는 인간관계다. 아무래도 남자들이 많은 환경 속에서 어려움이 있다. 일이야 레미콘 공장에서 레미콘을 실어주고 차가 운전을 하는 일이니까. 일 자체로는 그다지 힘들지 않다. 하지만 여성을 무시하는 문화가 남아있어서 그런 부분이 힘들 것이다.

프레시안 : 레미콘 기사의 경우 화장실은 어떻게 이용하나. 레미콘 회사나 건설현장에는 여자 화장실이 충분하게 있나.

정정숙 : 예전과 다르게, 요즘 건설 현장에는 여자 화장실이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레미콘 회사에서 여자 화장실을 못 쓰는 경우가 있다. 여자 화장실이 있지만 남성 레미콘 기사들이 여자 화장실을 사용하는 일이 있어서 사무직 직원들이 여자 화장실 자체를 잠가 놓으니까, 나같은 사람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레미콘 회사에서는 남자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프레시안 : 현장에서 정정숙님을 부르는 호칭은 뭔가. 건설현장에서 다른 여성들 중 일부는 '못아줌마', '핀아줌마' 이런 식으로 자재 +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 같다.

정정숙 : 기사님이나 사장님이라고도 불리지만 여자가 불릴 수 있는 호칭은 '고모' 빼고 다 들어봤다. 아줌마, 아지매, 여사님, 이모, 누나 등등. 여자를 부를 때 남자들 자기 인격이 드러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정숙 씨와 인터뷰 일정 잡기가 힘들었다. 다음주, 혹은 이틀 뒤에 일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하지 못하시고, 전날이 되어야 알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 일감이 대중이 없나.

정정숙 : 내가 법인 소속이 아니고 용차이기 때문에 그렇다. 저녁 6시 쯤에 회사에서 내일 할 일을 알려준다. 항상 같은 회사에 가는 것도 아니고, 내일 아침 몇 시에 어느 회사로 가라고 알려준다. 만약 저녁 6시에 문자가 안 오면 내일 일은 없다. 내 평일의 일정이 어찌 될지 모르니 평일에는 약속을 못 잡는다. 그게 용차의 삶이다. 처음에는 대중이 없어 불안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다보니 월초에 일이 없으면 월말에 있고, 월초에 일이 많으면 월말에 일이 없다. 한달의 반은 일하고 한 달의 반은 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다.

프레시안 : 부산 신항에서 화물차 기사로 일하시는 여성 노동자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 분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초보이기도 한데 여성이라서 일을 구하기 더 힘들었다고 했다. 같은 초보여도 남자를 쓴다는 말을 했다.

정정숙 : 용차 회사나 법인 소속일 때는 내 상사가 나도 공정하게 일감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이 배려를 해줬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은 생각보다 적었다. 다만, 레미콘을 싣고 건설회사에 가서 조금만 운전 실수를 하면 '여자라서 그렇다'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또 한 번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길래 "하면 어떤데요" 라고 따졌다. 그랬더니 '남자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가서 먹고 사느냐'고 말하더라. 그래서 "(남자들이) 지 하기 나름이지 내보고 왜 그런 말을 하는데요"라고 받아쳤다. 그럼 나는 어디가서 일하란 말이냐.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듣다보니까 생각한 게 어떤이들은 '여자라서 그렇다'는 둥의 말을 해서 내가 주눅드는지 반응을 보는 것 같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그런 말에 주눅드신 적 있나.

정정숙 : 내 기억으로는 주눅들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못 받아본 것 같다.

프레시안 : 어떻게 주눅들지 않을 수 있었나. 가족들도 레미콘 기사 일을 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회사에서도 '여자라서 어떻다'는 소리를 했다. 솔직히 불편하고 부당한 참견들이지 않나.

정정숙 : 내가 엄마라서 그런가. 아이들이 나를 응원해줬고, 이 일을 해야 한다, 하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냥 자신 있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애를 가진 이들도 용기를 가지고 사는데, '여자로 사는 게 뭐 어때서 주눅 들겠노'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오늘 정숙 씨가 레미콘을 운반하는 과정에 동행하다 보니 펌프기사가 '여자라서 운전을 못한다', '그렇게 할거면 운전하지 말라'고 비난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남성이 다수인 상황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하는 마초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나.

정정숙 :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첫 번째다. 그리고 주눅 들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펌프기사가 비난했던 건 내가 백미러를 보고 후진을 하기 때문에 한 소리를 한 거다. 후진을 할 때 고개를 돌리거나, 창문 밖으로 머리를 빼고 운전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 중에서도 체격이 작기 때문에 허리가 짧으니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빼면 내 시야에선 보이질 않는다. 가뜩이나 레미콘 차는 크지 않나. 그래서 나는 앉은 자세에서 양쪽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통해 최대한 정확하게 후진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터득했다. 허리가 짧아서 직접 보면서 후진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했다. 근데 지금도 내보고 고개를 안 내밀고 운전한다고 한 소리 하는 아저씨가 있다. 그럴 때는 이야기를 해서 알려준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허리가 짧아서 고개를 내밀면 안 보인다고 알려주는 거다. 그런 어려움을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다 자기 개념에 갇혀서 다른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럴 때 알려주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받아들인다.

프레시안 : 부당한 상황이 오면 이런 말을 해야지 하고 머릿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을 하는 게 참 쉽지 않다.

정정숙 : 나도 내 한 사람이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까지는 받아 줄 수가 있다. 하지만 내로 인해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보는 건 용서가 안 된다. 법인 기사로 일할 때 부산 문현동 한 현장에 들어갔는데 바퀴가 빠졌다. 여기 바퀴가 빠져서 못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건설회사의 젊은 직원이 와서 '여자가 운전을 X같이 해서 못 들어 가는 거지' 이렇게 말하더라. 그 사람은 다른 레미콘 기사들한테도 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럼 "니가 한 번 해봐라"하고 차 시동을 끄고 나와 버렸다. 그랬더니 레미콘 영업부에서도 난리가 나고, 건설회사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건설회사 직원들이 와서 '말 실수가 있었다'고 기분을 풀라고 하길래 그 쪽 현장 바닥에서 바퀴가 빠지니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가지 않으면 운전을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바퀴가 빠지는 지점까지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갔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니 다른 기사들이 '아지매 최고'라고 그러더라. 다른 레미콘 기사들도 바퀴가 빠지고 그 직원으로부터 막말을 들었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왔다더라. 그 뒤로부터는 그 현장에선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만 들어가고 포크레인이 와서 레미콘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프레시안 : 정숙 씨는 길을 만드시는 군요.

정정숙 : 내는 그래요. 내 혼자 불이익은 당하는데, 내로 인해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리고 레미콘 기사는 현장에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한 '을'로 취급한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은 길이 좁고 오만 장애물이 있는데 결국 욕먹는 건 레미콘 기사였다. 만만한 게 레미콘 기사라고 할 정도로 어려웠다. 조금 더 안전하게 주차하고 싶어서 시간이 걸리면 운전을 못한다고 욕 먹고,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모든 게 내 책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안전은 확실히 따집니다. 내 안전은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책임져야 하거든.

프레시안 :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정정숙 : 오늘처럼 펌프기사가 내게 '여자라서 못한다'는 식으로 몇 마디 오고가는 경우가 힘들다. 그냥 몇 마디 정도에서 끝나면 그래도 내가 소화를 시키는데, 거기서 계속 내게 비난을 할 경우 사람들끼리 부딪히게 되고 그런 부분이 힘들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해서 그렇다.

프레시안 :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나.

정정숙 :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내가 체력이 딸릴 때는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해봤지만, 체력을 어느정도 관리하고부터는 그런 생각은 안 했다. 갈등 상황으로 힘들다고 해서 내가 자기네들 때문에 그만둬야 하나. 그건 아니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레미콘이 담겨있던 적재통을 세척하는 정숙씨. ⓒ황지현

프레시안 : 정숙 씨를 일하게 만들었던 동기는 무엇인가.

정정숙 : 가정에 도움이 되려고 일을 시작했다. 아이가 셋이 있었고 홑벌이로는 키우기 힘들었다. 아이 아빠가 배를 타더라도 10개월은 일하고 2개월은 논다. 남편에게 계속 일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2개월 비는 기간이 있으니 내가 좀 나서봐야 되겠다 싶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일을 하게 됐다.

프레시안 :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정정숙 : '남자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여자가 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인정을 해주더라. 나는 그냥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25년동안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 쪼들리면 싸우게 되는데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서 그런 점들을 극복했다. 애들도 다 키워냈고 손주들도 7명이나 된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프레시안 : 정숙 씨에게 레미콘 차는 어떤 의미인가.

정정숙 : 내 몸이다. 차는 내 몸하고 일심동체라고 생각한다. 매일 그 차 덕분에 돈도 벌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다.

프레시안 :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정정숙 : 운전만 하는 사람이 꿈이 있나. 진급을 하고 싶거나, 돈을 더 벌어야 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런 직업도 아니고. 다만, 이 차가 버텨줄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 이 차를 폐차 시킬 때까지는 일을 할 생각이다. 건강을 유지하면서 하는 데까지 일을 하고 싶다.

프레시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정정숙 : 어릴 때는 당돌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른이 되고 생활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일 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4일 부산 기장군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레미콘 기사로 25년째 일하고 있는 정정숙씨를 만났다. ⓒ황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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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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