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시대' 대응하는 세계 트렌드는 '임금 인상'…단, 한국은 빼고

[경제뉴스N시선] 노동자 임금 지키기 나선 해외 사례들

며칠 전 버스에서 뒷자리 승객 2명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승객1 "버스요금은 왜 올리고 XX이야?"

승객2 "버스가 적자라잖아…."

승객1 "아, 우리도 적자라고."

승객1의 화난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통계상으로도 노동자 실질임금이 마이너스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 1~7월 노동자 1인당 월평균 임금 총액이 394만1천원으로 1년 전보다 2.2% 증가했지만, 실질임금은 1.5% 감소했다. 1~7월 기준으로 실질임금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관련 통계 작성 연도인 2011년 이후 처음이었다.

8월 실질임금은 10월 말에 고용노동부가 발표할 '9월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겠지만, 물가가 잡히지 않고 하반기 경기가 크게 개선되지도 않은 상황이라 1~7월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대다수 국가에서 실질임금 하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7월 공개한 ‘2023 고용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OECD 34개국의 실질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3.8% 하락했다.

▲<그림 1> 2023년 1분기 OECD 국가들의 명목임금 및 실질임금 변동. ⓒOECDiLibrary

<그림 1>에서 연한 보라색 막대가 2023년 1분기 실질임금 변동을 의미한다. OECD 34개국의 대부분은 막대가 아래로 내려가 있다. 실질임금이 상승한 나라를 찾는 게 더 빠르다. 벨기에(+2.9%), 코스타리카(+1.7%), 네덜란드(+0.4%) 같은 나라들에서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올랐다.

OECD는 보고서에서 "대다수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이 수십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가운데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실질임금이 하락했다"고 밝혔다. 또 저축이나 대출을 통해 물가 상승에 대처하기가 어렵고, 에너지와 식품 지출의 비중이 높은 저소득 가구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OECD는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정책 수단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특히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임금 인상"이라고 밝히면서, 구체적으로는 최저임금 인상과 단체협상을 통한 임금 인상을 제안했다. "인플레이션의 비용을 공정하게 분배하면 불평등 심화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통화정책의 효율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가 상승기에 이런 권고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면 다른 OECD 국가들은 실질임금 하락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을까? 국내외 언론에 소개된 유의미한 사례 몇 가지를 모아봤다.

멕시코 - 최저임금을 100% 넘게 인상하다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을 방어하는 데서 가장 빠르고 간단한 정책은 역시 최저임금 인상이다. OECD에 따르면 2020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 OECD 국가들의 최저임금은 평균 29%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물가상승률은 24.6%로, 최저임금이 물가보다 조금 더 올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언제 인상했고 얼마나 인상했는지는 나라마다 다르다.

▲<그림 2> 2023년 5월까지 명목-실질 최저임금 변동. ⓒOECDiLibrary

<그림 2>는 2020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 OECD 국가들의 명목 최저임금과 실질 최저임금 변동을 보여준다. 연한 보라색 가로선은 명목 최저임금 인상률이고, 진한 보라색 화살표의 끝부분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최저임금 인상률이다. 한국의 경우 화살표의 끝이 0% 선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와 있다. 최저임금이 물가도 따라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가장 심한 나라는 그래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미국으로, 동 기간 동안 실질 최저임금이 14% 하락했다.

그래프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는 나라, 멕시코는 실질 최저임금 인상률이 독보적으로 높다. 2018년 집권한 오브라도르 현 멕시코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을 중요한 정책 과제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OECD에 따르면 2020년 12월에서 2023년 5월 사이 멕시코의 최저임금은 실질 기준으로 43.6%나 증가했다.

로이터통신, 멕시코뉴스데일리 등에 따르면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최저임금을 매년 15.6% 이상 인상해서 자신의 임기 동안 최소 100퍼센트 인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2018년 그가 취임했을 때 88페소(일당)였던 멕시코의 최저임금은 2023년 현재 207.44페소로, 이미 100퍼센트 넘게 올랐다(자유경제구역인 미국과의 국경지대 제외). 이것은 멕시코의 실질임금이 1970년대부터 계속 정체되어 있었고 극심한 양극화로 경제가 활력을 잃은 상황에서 나온 정책이다.

멕시코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률을 높인다고 우려하지만, 오브라도르 행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640만 저임금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이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임금만 인상한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도 확대했다. 그 결과 멕시코 내의 빈곤층 비율은 줄어들고 양극화도 완화하는 중이다.

벨기에 - 임금이 물가에 연동되는 시스템

이번에는 <그림 1>로 돌아가서 OECD 국가들 중 2023년도 1분기 실질임금 상승률이 제일 높았던 벨기에를 한번 보자. 고물가 시대에 벨기에는 어떻게 해서 2.9%나 되는 실질임금 상승률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임금-물가 연동제(Indexation)'라는 제도에 답이 있다. 벨기에에서 민간 부문 노동자의 98%는 임금이 물가상승률에 연동된다. 임금을 조정하는 주기와 물가상승률에 연동하는 방식은 산업별로 사회적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지만, 대체로 '건강 지수health index'라는 지수를 참조한다. '건강 지수'는 바로 앞 시기의 물가상승률에서 술과 담배, 석유를 제외하고 연료, 가스, 전기요금은 포함해서 산정한다.

그래서 지난해 벨기에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12%까지 치솟았을 때도 100만 명의 벨기에 노동자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의 임금은 평균 11.59% 인상되었다. 2023년 1월 1일 기준으로 벨기에의 '임금-물가 지수'는 11.08%로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 임금-물가 연동제는 벨기에의 이웃인 룩셈부르크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벨기에 내부에서는 노동자 임금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높아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당연히 나온다. 하지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매년 집계하는 국제경쟁력 순위에서 벨기에는 2023년에 8계단이나 뛰어올라 세계 13위에 올랐다(한국은 28위).

▲25일(미 서부 시간)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호텔 노조 조합원들이 LA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AFP=연합

미국 - 지방정부의 저임금 노동자 보호

미국은 오랫동안 실질임금 하락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올해 2월부터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넘어섰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많이 올라서라기보다는 올해 상반기 인플레이션이 조금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고물가와 실질임금 하락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미국 노동자들은 부문별로 파업에 나서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가 정한 시간당 최저임금은 7.25달러(약 9200원)지만, 현재 미국 전역에서 시간당 7.25달러를 지급받는 노동자는 6만8000명으로 미국 노동자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연방정부 최저임금은 현실에서 의미가 없어진 셈. 대신 미국에서는 몇몇 지방정부들이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을 막기 위한 법과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주지사는 지난 달 패스트푸드 푸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내년 4월부터 20달러로 올리는 법안(AB1228)에 서명했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25달러로 인상하는 법안(SB525)에 서명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원래 미국에서 주정부 최저임금(15.5달러)이 가장 높은 곳인데, 이 두 법안을 통해 패스트푸드와 보건의료 두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각각 업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경영계가 원했던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적용'이 편의점 업계, 미용업계 등의 노동자 최저임금을 낮은 수준에 고착시키려 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다.

참고로 캘리포니아주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3분의 2는 여성이고 20퍼센트 정도가 자녀를 양육하는 저소득 가구의 구성원이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경우 4분의 3이 유색인종이고 여성 비율도 높다. 따라서 이 법안들은 캘리포니아주 내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주는 주정부 최저임금(2023년 15.74달러)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워싱턴주에 속한 도시들은 자체 최저임금을 정할 수 있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는 소비자물가 상승을 반영, 2024년 1월 1일부터 최저임금을 19.97달러로 인상(6.8%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시애틀 시장 브루스 해럴은 최저임금 6.8% 인상 결정에 대해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다른 주들도 각각 주정부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코네티컷주의 경우 2019년부터 주정부 최저임금이 미국 노동부의 '고용비용지수(employment cost index)'에 연동해서 자동 인상되도록 했다. 이 제도에 따라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코네티컷주 최저임금은 5번 인상되었으며, 2024년 1월부터 시간당 15.69달러(현재 15.00달러)로 추가 인상될 예정이다.

미국 뉴욕, 호주 -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미국 뉴욕시는 배달노동자 최저임금법을 도입해 화제에 올랐다. 우버이츠, 도어대시 같은 앱에서 일감을 받아 일하는 배달 노동자에게 시간당 17.96달러(2023년 7월 기준)의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법이다. 2021년 통과된 이 법에 따르면 배달 노동자 최저임금은 2025년 19.96달러까지 인상하며 매년 물가상승률에 따라 조정된다. 그동안 저임금에 시달리던 뉴욕시의 배달노동자 6만 명에게는 숨통이 트이는 소식이었다. 반면 플랫폼 기업들은 "배달 수수료가 올라 소비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이 법에서 배달노동자의 시간당 최저임금 17.96달러는 뉴욕시 최저임금 15.00달러(뉴욕주 최저임금은 14.20달러)보다 높게 책정되었다. 배달노동자가 부담하는 보험료, 수리비, 연료비 등의 비용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배달노동자가 주문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을 노동시간에 포함했다는 점에서도 뉴욕시 사례는 주목된다.

최근에는 호주에서도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저임금과 사회보장 등을 보장하기 위한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구멍 메우기 법(Closing Loophols Bil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법은 기존 노동법상의 '근로자'로 분류되지 않는 노동자를 위해 '근로자와 유사한 작업자'라는 분류를 신설한다. 플랫폼 노동자가 '근로자와 유사한 작업자'의 기준에 부합할 경우 호주 공정노동위원회가 정하는 기준에 따라 최저임금이나 사회보험, 연차나 병가 사용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다. 또 이 법안에는 플랫폼 기업의 부당한 '앱 정지'에 노동자가 대항할 권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다.

호주에서도 경영계는 소비자 부담이 커지고 플랫폼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이유로 이 법에 반대하고 있다. 토니 버크 호주 노동부장관은 소비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집 앞에 피자가 도착할 때 우리가 요금을 조금 더 내서 그들(노동자)이 더 안전하게 올 수 있다면, 그 정도 비용은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내년이 걱정되는 한국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세계 각국의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각국 정부들은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취약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어떤 나라가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을 얼마나 잘 방어하느냐가 5년 후, 10년 후 그 나라의 내수 경제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실질임금 하락에 대응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안 보인다. 2024년 최저임금은 물가상승률보다 적게 인상했으니 사실상 삭감이다. 설상가상으로 윤석열 정부는 이후 최저임금 결정에서 양대 노총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교섭권을 보장하자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에 대해서는 뚜렷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정치적 이익을 위한 노조 탄압을 '노동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올해도 힘들지만 내년이 더 걱정이다.

<참고>

연이은 전쟁에 인플레·고금리, 실질임금↓ 경기불황 가속 [뒷북 글로벌](23.10.23 서울경제)

월 최저임금 3% 오를 때, 물가상승률은 6%…연동해야 할까?(23.01.23 한겨레)

'고물가' 핑계로 최저임금 20% 인상하는 멕시코…"물가 더 오를 것"(22.12.02 한국경제)

내년 캘리포니아주 패스트푸드 최저시급 20달러, 미 최고수준인 이유는?(23.09.29 프레시안)

뉴욕시 배달라이더 '최저임금 18달러' 보장에 청신호(23.10.01 경향신문)

하루 4시간 일하면 한 달에 300만원…배달라이더 천국된 美도시(23.09.29 동아일보)

호주, '초단기 노동자' 최저임금 · 연차 보장 개정안 추진(23.09.01 SBS 뉴스)

그외 로이터, DW, CNN, ABC News, Mexico News Daily 등 외신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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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이

안진이 더불어삶 대표는 더불어삶 회원들과 함께 해고노동자 지원, 인터뷰, 강연 기획 등 노동 현장에 도움 되는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모순을 파악하고 공론화하는 일에도 기여하고 싶어서 경제 뉴스와 각종 문헌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김헌동의 부동산 대폭로>, <톡 까놓고 이야기하는 노동>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더불어삶 뉴스레터 구독 링크 https://livetogether.substa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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