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라는 이름에 이별을 고할 때가 됐다"

[프레시안 books] <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

반국가세력과의 싸움을 독려한 윤석열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러시아 군사협력에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내정치에선 '이념 전쟁'에, 국제질서에선 신냉전의 돌격대 역할에 팔을 걷은 셈이다.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제1야당 대표의 운명이 사법부로 넘어갔다. 원내지도부 총사퇴로 시작된 후폭풍에 분당 가능성이 거론되고, 분노한 강성 지지자들은 국회 주변에서 심야집회를 벌였다. 이번 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우리 정치의 익숙한 살풍경들이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 단어로 요약한 작금의 시대는 "극단"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잘못 해석한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이 '자기 파괴자' 역할을 수행해 야기한 경제와 사회적 양극화가 극단적 정치세력이 부상한 토양이라고 봤다.

"조화를 추구하는 일이 정치"라고 정의하는 독보적인 경세가가 보기에 한국 정치는 길을 잃었다. 그는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전범국가에서 모범국가로 탈바꿈한 독일을 참고할만한 모델로 권한다. <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김종인 지음. 오늘산책).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연합뉴스

미래의 지도자가 될 젊은 독자들을 향해 10번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한 책은 그저 그런 먼 나라 예찬론이 아니다. 대연정, 소연정이 일상인 독일식 내각제를 비롯해 통일과 노동개혁이 성공한 배경 등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대타협의 작동원리가 종횡으로 얽혀있다.

독일의 기틀을 다진 비스마르크, 아데나워, 에르하르트 총리에 관한 김 전 수석의 인물론은 "어떠한 경우에도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상대를 강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며, 반드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독일 정치의 기본 문화"에 골간을 둔다.

특히 아데나워에 이어 총리를 맡았던 에르하르트가 뿌리내린 독일의 경제 시스템,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김 전 수석의 추앙이 각별하게 읽힌다. 근로자 재형저축과 의료보험 도입, 경제단체로부터 '사회주의자'라는 공세를 무릅쓰고 입안한 '경제민주화' 헌법조항(119조 2항)은 모두 '사회적 시장경제'를 한국에 발현하기 위한 분투였다고 할만하다.

여야를 넘나든 김 전 수석의 관록은 보수답지 않은 보수와 진보답지 않은 진보가 사생결단식 이념 전쟁을 벌이는 한국 정치에 관한 직설적 문제의식으로 담겨있다.

"보수라면서 보수다운 진중함이 없으면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면서 진보적인 정책을 현실에 구현해내지 못하면 그냥 입만 진보일 따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는 어떤가. 별로 원칙도 없고 소신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맨날 싸우기만 하는 현장이 대한민국 정치판이다."

우선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들"에 맞서 '이념 전쟁'을 이끄는 윤 대통령을 투사한듯한 대목이 눈길을 잡는다.

"특정한 이념이나 체제 혹은 정치인의 투철한 '수호자'라고 외치는 사람치고 정말로 그 대상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 좌익의 준동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우익의 무지도 문제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어떤가. 한마디로 '반공 보수'다. 급진적 변화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생겨난 방어적 보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인 동족상잔의 결과로 생겨난 '적대적 보수'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지극히 완강한 '공격적 보수'이기도 하다. (…) 반공 만능주의가 우리 사회의 이념을 지나치게 대립적이고 경직되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다."

외교 노선에 관한 김 전 수석의 고언 역시 현재적이다. "나는 자타 공인 친미주의자"라고 한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며 자본주의 맹주인 미국 없이 우리는 정상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친미적 노선을 견지하는 것과 미국식을 따라가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도 우리 사정에 따라 호응하면 된다. 미국을 적대시해서도 안 되지만,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 질서에 성급히 끼어들려고 애쓸 필요 또한 없다"며 "미국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질서에 먼저 올라탔다고 해서 그 나라를 기특한 나라라고 칭찬하지 않는다"고 했다.

강성 지지층에 기댄 야당의 행태에도 반면교사가 될 만한 독일 사례가 있다. 김 전 수석은 1980년 총선에서 당을 대패로 이끈 강경론자 요제프 슈트라우스에 빗대 궤도 이탈한 야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경한 이념의 정치인은 강성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속 시원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저 '야당으로서의 통쾌함'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슈트라우스의 사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만년 야당으로만 살고 싶은 정당은 그런 정치인을 대표로 내세우면 된다."

내전에 가까운 한국 정치에 합의형 정치가 가능할까. 김 전 수석은 "대통령이라는 낡고 극단적인 제도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줘야 한다.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권력구조 개편을 우선적 과제로 제안한다.

"중대선거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려면 권력 구조를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이 병행되어야 한다. 달랑 선거 제도만 바꿔서는 최악의 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정권이 교체돼도 정책기조가 이어져 통일과 노동개혁 열매를 맺은 '정책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 동력을 독일의 정치구조에서 찾은 김 전 수석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측면에서는 20세기 한때 대통령제가 좋았을지 몰라도, 이제 인류 역사에서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이별을 고할 때가 됐다"고 했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정책이 이리저리 뒤바뀌고, 장관도 여당도 공무원도 온통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는 국가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나라가 어찌 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특정인이 좌우하는 인치 국가, 유사 왕정 국가일 따름이다."

그는 거듭 "대통령이라는 낡고 극단적인 제도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줘야 한다.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모든 정당이 해산된 황무지에서 일궈낸 '합의형' 내각제를 통사적으로 지켜본 원로가 한국 정치에 제안한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 <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 ⓒ오늘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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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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