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통조차도 바뀌지 않는 군대, 이면에는 '조국'이 존재한다

[인권학의 프런티어] 국가를 위한 군대는 없다

인권에 대한 물음이 쏟아지는 나날이다. 인권보장을 외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사이, 한편에선 그 목소리의 정당성을 두고 격론이 펼쳐진다. 갖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프레시안>과 한국인권학회가 만났다. 인권은 사회적 화두인 동시에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다. 학계가 쌓아온 '인권학' 연구를 사회적 화두로 다시 던진다. 평화·인권·환경 연구자인 황준서 박사가 글을 쓴다. 편집자 주.

한국사회와 군대

군대는 정치, 경제, 문화 혹은 개인의 일상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구체적인 '군사독재'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한국 헌정사 75년 중 최소 15년은 '군대가 국가를 통제한 시기'이기도 했다.

군대는 국가의 경제 인프라를 지킬 뿐만 아니라, 각종 무기를 개발하고 팔아서 국가경제에 기여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군사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은 대부분 장병들이 지역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태극기휘날리며>, <실미도>, <공동경비구역 JSA>, <알 포인트>, <고지전> 등 군대(와 전쟁)에 관한 영화들이 흥행을 거두었으며, 비슷한 영화들도 계속 개봉하고 있다. '폭탄급 OO', '전략', '작전', '총대를 맨다', '하루 종일 삽질했다', 등 일상에서도 군대용어가 자주 쓰인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글을 싣는 <프레시안>에도 군대 용어들은 꽤 자주 보인다.

심지어 최근엔 인권연구나 평화연구 자료들에서도 '인권운동의 전략'이나 '전략적 평화(구축)' 등의 말이 자주 보인다. '전략'이라는 단어는 한자로는 '싸움을 다스린다'는 뜻의 '戰略'이다. '전략'을 의미하는 영어단어인 strategy는 '장군'을 뜻하는 그리스어 strategos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군대는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파고들어 있다.

헌데, 이러한 군대의 존재감이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다. 군대가 저지른 수많은 인권침해 사건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오히려 해당 사건들은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서 희석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하고,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하고, 은폐되기도 한다.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수많은 간첩 조작, 광주 민주화운동 집단 살상 및 암매장 등 1987년 이후 문민정부가 군대를 통제할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 발생한 대규모 인권침해 및 잔혹행위 사례들만 해도 셀 수가 없다.

▲전익수 전 공군 법무실장의 1심 선고 공판이 열린 29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고(故) 이예람 공군 중사 어머니 박순정 씨가 기자회견 중 이 씨의 사진을 들고 있다. 이날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면담강요 혐의를 받는 전익수 전 공군 법무실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연합뉴스

전환기 정의와 군대의 과거사 '부인'

독재 또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권력과 국가기관이 (그리고 기업 등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이익집단들이) 저질렀던 각종 인권침해와 잔혹행위 사건을 조사하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처벌과 사면, 화해과정을 통하여 가해자와 피해자 간 신뢰를 도모하며, 향후 인권침해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전환기 또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한다.

해당 개념에는 '과거사 단죄 없이는 안정적으로 공동체를 통합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 또는 전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행기 정의 사업들은 내전이나 독재 시기 인권침해를 단죄하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peacebuilding)의 일환으로,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transitional justice를 이행기 정의로, transformative justice를 전환기 정의라는 의미로 구별하자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전자(이행기 정의)는 민주주의 체제 이행에 필요한 (서구에서 주장하는) '보편적인' 인권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개혁조치들을 포함한다. 반면 △후자(전환기 정의)는 주로 '자유권 또는 시민적·정치적 권리' 침해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행기 정의와 달리, 과거사를 단죄하는 동시에 포괄적으로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필자도 주류 이행기 정의 패러다임의 한계 비판에 동의하기 때문에, 이행기 정의와 전환기 정의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다만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논문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에서는 transitional justice(위에서 소개한 '이행기 정의'. 편집자 주.)의 의미로 '전환기정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의 혼란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transitional justice의 의미로 쓰인 전환기정의는 "전환기정의"로 표기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가기관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하여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한 "전환기정의" 노력은 주로 2002년 이후 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루어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포괄적으로 과거 인권침해 및 잔혹행위들을 조사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이전에도 과거사 규명의 시도는 있었다. 과거 조직적으로 민주주의 질서를 교란하고, 인권을 침해했던 기관들인 국정원, 경찰청, 국방부는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에 앞서 각 기관 내부에 과거사건 진상규명 특별기구들을 설치하였다.

경찰청 과거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11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3년 동안 총 44건 중 이송, 각하, 진정취하 사건을 제외하고 18건을 조사하였다. 국가정보원은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설치하여 2004년 11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7개의 개별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별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하였다. 국방부는 2005년 5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8건의 과거사 사건들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관들의 자체 과거사 조사는 조직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수동적으로 과거를 인정하는 미봉책으로 그쳤다.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군대는 여전히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원인은 그것이 아니다', '민간의 과거사 조사는 군인의 사기를 저하하고, 군 조직의 특수성을 침해한다'는 식의 논리로 과거의 인권침해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군대가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형숙 연구자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먼저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은 시민들에 대한 군대 직업장교 집단의 뿌리 깊은 우월의식이다. 직업장교들은 과거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을 했었고, 지금도 그 민주질서 파괴행위가 '옳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들은 군 조직에도 (사법 질서를 교란한다고 비판받는) 별도의 군사법원과 조사기관이 있는데, 군 조직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간이 군의 과거를 음해한다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우월의식은 개별 사건으로 군대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면, 군 조직 전체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보신주의 또는 배타주의와 결합하여 있다.

우리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군 조직의 '명예'를 과거 인권침해와 잔혹행위에 대한 부인을 통해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과거사 부인 논리는 군 조직 내부에서 더욱 정당성을 얻는 동시에, 이 부인의 논리에 동참해야 하는 당사자도 늘어난다.

즉, 누군가가 계속해서 군 조직이 부인해야 하는 과거사를 은폐 또는 조작하는 일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군대의 관점에서는 '조직의 안녕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지만, 정의의 관점에서는 '유책 당사자'가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22일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체육관인 '김대식관'에서 열린 고 채수근 상병 영결식에서 해병대원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채 상병은 지난 19일 오전 9시께 예천 내성천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연합뉴스

국가를 위한 군대는 없다

군부독재 시절 저지른 인권침해와 잔혹행위에 대한 군대의 부인은 세 가지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첫째, 군대의 부인은 실재하는 인권침해 피해자들과 주변인들의 존엄함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놀랍게도 표현의 자유를 방패로 삼으며) 인권침해와 잔혹행위 피해자들을 "빨갱이", "보상금을 노리는 사람들", "북한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들은 매년 폭염과 한파를 견디며 거리에서 '진실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외침을 이어가고 있다.

둘째, 군대의 부인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군대가 우월한 직업의식과 조직의 배타성, 그리고 책임의 전가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가 문민정부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전환기정의"의 모범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독일에서는 대대적으로 조사를 벌여서 나치에 복무하였던 군 장교들을 처벌하거나 직위를 해제했다. 오늘날에는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반유대주의 및 극우주의 '신나치' 성향 장병들을 조사하고,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군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진정 과거 인권침해를 단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나라 정부도 과거 군대의 인권침해에 대한 정당화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거 인권침해에 대한 군대의 부인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군 인권 개선에 대한 군대의 조직적인 저항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군대는 시민들을 사살하는 군사작전을 펼치지는 않지만, 여전히 조직적으로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군대의 과거 인권침해를 조사하면서도 '여명의 황새울 작전'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던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 평화활동가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선진병영이라는 이름 아래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군대 내 '자살'과 그 원인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공군 수뇌부는 성추행 피해를 입고 자살한 공군 부사관들의 외침을 외면했고, 도리어 가해자를 무분별하게 감싸주면서 망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모독하고 있다. 그럼에도 군대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뿌리 깊은 우월의식, 조직의 배타성, 부인(denial) 당사자의 확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군 성폭력 피해자 고(故) 이예람 중사 사망 사건을 100일간 수사한 안미영 특별검사가 13일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군대는 우월의식과 배타성, 부인 당사자의 확산 구조의 정당성을 조국에서 찾는다. 즉, '과거 인권침해는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군 조직의 특수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식이다.

특히 우리나라 군대는 북한이라는 '주적'의 실재를 이유로 전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 조직의 특수성과 배타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시민들의 안전과 인권 보장을 저버리면서 어떤 국가를 전쟁으로부터 왜 지키겠다는 뜻인가? 군대가 국가를 지탱하는 시민들을 위협하면서 국가를 위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철학자이자 반전운동가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은 누가 옳은 지 결정하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가 남을 뿐." 즉, 전쟁은 폐허와 상처만 남길 뿐 옳고 그름의 잣대를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군대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전쟁으로부터 국가의 수호가 아니라 시민의 보호이다. 군대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환기정의" 구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이유이다.

※ 본 연재에서는 한국인권학회·인권법학회에서 공동 발간하는 학술지 『인권연구』에 실린 시의성 높은 논문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논문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소개논문> 이형숙. 2019. “전환기정의 과정에서의 군(軍) 직업주의와 부인(denialism)” 『인권연구』 2(1): 109–143.

<다운로드 방법>

링크 클릭→(오른쪽) ‘KCI 원문 내려받기’ 클릭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79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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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서

퀸즈벨파스트대학교(Queen's University Belfast)에서 북아일랜드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삼중 전환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2022년에 졸업하였다. 생태정의, 환경범죄, 지속가능한 평화, 탈인간중심적 인권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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