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반란을 일으킨 뒤 행적이 불분명했던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에 도착했다고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밝혔다. 그는 바그너 용병에 기지를 내 주고 이들로부터 전술 등을 배울 예정이라고 했다. 벨라루스에 인접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부 회원국들은 바그너의 벨라루스 주둔 전망에 우려를 표명했다.
벨라루스 국영 <벨타> 통신, <뉴욕타임스>(NYT) 등을 종합하면 루카셴코 대통령은 27일(이하 현지시각) 프리고진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도착했다고 확인했다. 이날 루카셴코 대통령은 고위 군장교와 언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군 장성 견장 수여식에서 바그너 반란을 멈추게 한 중재 과정을 상세히 공개했다. 지난 23일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은 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 200km 인근까지 진격한 뒤 루카셴코 대통령의 중재로 24일 군사를 물렸다.
루카셴코 대통령에 따르면 그는 바그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24일 오전에 접하고 오전 10시 10분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해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듣고 프리고진 제거를 고려하는 푸틴 대통령에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며 자신이 프리고진과 대화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푸틴 대통령은 프리고진이 "전화도 받지 않고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소용없는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루카셴코 대통령은 전화번호를 얻어 냈고 결국 오전 11시께 프리고진과 통화할 수 있었다.
통화에서 프리고진은 처음 30분 간 거의 욕설만 내뱉었고 "욕설이 정상적인 단어보다 10배는 많았다"고 한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우선 프리고진이 반란 과정에서 러시아군이나 민간인을 살해했는지 물었고 프리고진은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한 사람이라도 죽이는 순간 협상은 끝"이라고 프리고진에 경고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통화에서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을 제거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시사하며 멈추지 않을 경우 "벌레처럼 짓밟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리고진은 "다른 요구 사항은 없고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을 (처벌하길) 원한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루카셴코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프리고진의 요구가 관철될 리 없고 푸틴 대통령도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이후 오후 5시에 프리고진이 전화를 걸어 와 제안을 받아들여 진격을 멈출 용의가 있지만 이 경우 "제거될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프리고진을 "벨라루스로 데려와 당신과 당신과 부하들에게 절대적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프리고진은 이를 믿고 군사를 물렸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러시아군과 계약을 맺지 않은 바그너 용병들이 벨라루스로 넘어오는 데는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위한 기지를 따로 건설하진 않고 사용하지 않는 군사 기지를 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벨라루스에 바그너 용병 모집 사무실이 열리진 않을 것이며 바그너가 벨라루스로 이동 중인 러시아 핵무기를 지키는 역할을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국방장관에게 벨라루스로 이동한 바그너 용병 중 일부를 벨라루스군에 편입시킬 방도를 찾아보라 지시했으며 바그너로부터 "전술, 무기, 공격 및 방어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고 이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프리고진에게 반란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는 러시아 정부의 약속은 일단 지켜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24일 러시아 대통령궁(크렘린)은 프리고진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검찰 쪽에선 관련 형사 사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혼선이 빚어졌다. 27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성명을 내 무장 반란 사건 조사가 종결됐다고 밝혔다.
다만 러 국영 <타스> 통신을 보면 이날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 그룹 재정을 국가가 지원했다고 인정하며 용처를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반란 진압에 참여한 군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바그너 그룹 전체 자금이 국가에 의해 보장됐다"며 "국방부와 국가 예산을 통해 이 그룹 자금을 전액 지원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인건비와 성과급 등으로 2022년 5월~2023년 5월 사이 바그너에 862억 루블(약 1조 3200억 원)을 지급한 데다 바그너 모회사인 콩코드가 군에 음식을 공급하는 계약을 통해 1년 간 800억 루블(1조 2200억 원)을 추가로 벌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누구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길 바라지만, 이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내전을 막았다"며 군인들을 치하했다.
반란 진정 뒤 바그너와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한 쇼이구 장관의 처분에 관심이 쏠렸지만 쇼이구 장관은 이번주 언론에 계속해서 모습을 비치며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26일 러 국방부가 쇼이구 장관의 군부대 방문 영상을 공개한 데 이어 같은 날 푸틴 대통령이 주재한 최고 안보 책임자 회의에도 쇼이구 장관이 참석하는 모습이 보도됐고 27일 푸틴 대통령이 반란 진압 군인들을 치하하는 연설을 하는 자리에도 쇼이구 장관이 자리했다.
<뉴욕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이 안정과 통제가 복구됐다는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쇼이구 장관을 대중에 계속 노출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바그너가 벨라루스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벨라루스와 나토 동부 회원국들은 불안감을 표명했다. 27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7개국 정상 실무 만찬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바그너가 연쇄 살인범들을 벨라루스에 주둔시키면 모든 인접국은 훨씬 더 큰 불안정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도 "굉장히 심각하고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면서 나토가 "매우 강력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관련해 "장기적 결과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지만 진행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동맹의 동부 지역에서 군사력을 증강했고 다가오는 정상회담에서 집단 방위를 강화할 수 있는 추가적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이날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크라마토르스크 중심부의 한 식당을 러시아 미사일이 강타하며 아동 3명을 포함해 최소 8명이 숨지고 56명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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