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내 몸이 증거인데, 무엇을 더 입증해야 한단 말인가"

[함께 사는 길]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과 변론 유감

"당신은 어떻게 사유하는가. 우리의 맥락에서 더 중요한 질문으로서, 당신은 특수한 사례들을 그 밑으로 복속할 수 있는 선취기준, 규범, 일반 규칙에 매달리지 않고서 어떻게 판단을 하는가? (중략) 일반규칙들로는 결과를 예견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전례 없는, 예외사항 중에도 전례가 없는 사건들과 직면하게 된다면 판단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마지막 저서에 남긴 말이다. CMIT/MIT 원료물질을 사용한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SK, 애경, 이마트 등)의 항소심도 예외적이다. 신망받는 기업들이 안전성 검증도 거치지 않은 제품을 건강에 좋다고 광고까지 하며 판매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해당기업 임직원들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대목과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재판이 진행되며 일반론이 들썩인다.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포괄되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2021년 5월에 항소심을 시작하며,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변호인들은 이미 이렇게 강조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대해 기업이 매출과 이윤을 추구한 결과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 피고인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CMIT/MIT 성분과 관련하여 피고인들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명과 책임주의 근간으로 하는 형사사법 근간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원심의 태도였습니다."

▲ 지난 3월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의 옥시애경불매운동 캠페인. ⓒ환경보건시민센터

아픈 몸이 곧 증거인데

지난 2월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에 대한 8번째 공판이 열렸다. 단순하게 말하면 형사재판은 죄가 있다는 검사와 죄가 없거나 덜하다고 말하는 변호인의 공방이다. 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은 원칙적으로 검사에게 있다. 검찰이 재판을 받는 피고인에 비해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고, 앞에서 언급한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양측은 현재 증인신문 절차를 통해 격돌하고 있다. 피해자가 한차례, 이후에는 전문가들이 증언대에 서고 있다. 지난 2021년 10월에 진행되었던 피해자 신문은 가해기업 변호인의 완승이었다. 변호인들은 피해자의 진술에 나타난 모순을 공략했다. 고령에 더해 질병도 있던 피해자는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했다. 변호인의 전략은 재판부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이는 일정부분 효과가 있었다. 제시된 증거를 탄핵한다고 고상하게 표현하지만, 입장과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말꼬리 잡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공분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기업이 안전하다고 광고한 제품을 써서 아픈 내 몸이 곧 증거인데, 무엇을 더 입증해야 한다는 말인가.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오기 위해서는 검사의 입증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기업들의 가습기살균제 판매 행위와 제품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버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동일 조건에서 재현실험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에 대한 여건도 갈수록 쉽지가 않다. 실험결과를 인체에 적용할 수 없는 한계도 있고 실험 동물의 고통에 대한 윤리기준도 강화되고 있다. 대체실험법을 찾고 있는데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제품에 함유된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규명 연구도 부족했던 상황이다. 관련 정부부처 또한 벼락치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역학조사 또한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하긴 어렵다.

검찰도 이러한 입증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도 공감하는 내용이다. 황정화 변호사는 항소심 개시 당시 대리인단을 대표해 의견을 진술했다.

"법적 인과관계 판단은 자연학적으로 불가능한 증명을 요하는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인체실험은 불가능하고 윤리적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다른 방향으로 전 분야에 걸쳐 연구를 수행한 것입니다. 특히 1심 당시 제시된 연구는 10가지가 넘었는데 각 결과가 일치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배척할 수 없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특수성은 항소심 재판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의 혐의를 원칙대로만 고려하다 보면 "가해자"가 무죄판결을 받고 사라지는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임재판부(고등법원 형사2부 재판장 윤승은)는 좀 더 일반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기도 해서, 재판을 이어받게 된 후임 재판부(고등법원 형사5부 재판장 서승열)로서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고민의 흔적들은 서승열 재판장의 말에서도 여러 차례 묻어 났다.

"제품 제조, 출시 당시에 실험자료 등이 있으면 적정성과 예견가능성만 판단하면 되겠지만 이 사건은 제품 제조 당시 연구 결과가 없었고, 사건 발생 이후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습니다. 검찰의 입증 부담도 고려해야 하고, 피고인 항소심 재판상 권리가 조화되어야 합니다.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였을 때 통상 형사소송법의 원칙 그대로 적용하기는 적절치 않습니다.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면 추가로 검토하겠습니다." 

"검사 주장의 핵심은 원심 제출 증거들로 CMIT와 이 사건 폐 손상, 천식 사이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었으나 원심이 추상적 의심으로 이를 배척하였다는 것인데, (중략) 이러한 의문이 어떤 측면에서 법리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지를 검찰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증거 흔드는 가해기업 변호인들

재판이 본격화되며 쟁점은 전문가 증인신문으로 옮겨갔다. 항소심의 전 재판부에서 채택한 전문가 증인은 정성환 교수(가천대), 김재용 교수(연세대)였다. 정 교수는 가습기살균제 천식분야에 대한 연구를 했고, 김 교수는 관련 역학조사 보고서의 집필을 맡았다. 가해기업의 변호인들은 증거를 흔들기 위해 거세게 몰아쳤다. 주로 전문가 증인들이 제출한 연구보고서나 논문에 나타난 오류들을 지적하는 식이었다. 증인들은 반나절 이상 진행되는 신문과정에서 진땀을 흘려야 했다. 변호인들의 질문들은 때로는 매서웠지만, 다소 지엽적인 내용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번 기일의 가장 큰 쟁점은 추가증인 채택문제였다. 검찰은 천식 등 피해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국립환경과학원 보고서를 집필한 전종호 교수에 대한 증인 신청을 했으나(가습기살균제 성분 체내거동 평가연구), 변호인이 반발했고 다음 기일 이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앞서 2021년 항소심의 종전 재판부(형사2부 재판장 윤승은)는 검찰의 증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이 말한 추가실험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도 해당 원료물질의 유해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 물질이 에어로졸 형상으로 하기도에 도달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보았다. 일단 도달해야 피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윤승은 재판장은 또한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을 정리하며 "원심은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했지, 도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은 아니라"고도 언급했다.

그렇게 증인채택은 물 건너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재판이 생각보다 장기화되었고, 2022년 12월에 연구 결과가 나와 버린 것이다. 가해기업 변호인들은 계속적인 추가증거신청으로 항소심을 지연하는 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검찰이 요청하는 추가증거가 종전 실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애경산업 측 변호인 정성태(법무법인 대륙아주)는 "객관, 중립적으로 이뤄져야 실험결과를 믿는데 이건 시민단체가 한 것입니다. 국가기관 용역을 받아서 하신건데 시민단체 소속에 원심판단을 비판적으로 본 분들이 책임자이고, 집필자이며 실험도 했습니다. 사안을 규명하기 위한 자료라고 하시는데 그럴지도 의문입니다. 실험내용 보고서를 보면 명백하게 1심 판결이 잘못된 걸 증명하겠다는 의도로 이뤄진 걸 알 수 있습니다. 해당 증거들은 새 실험이라기보다 종전연구에 대한 종합, 나열이고 많은 것들이 이미 1심에 제출되었으며 탄핵되었습니다"라고 변론했다.

재판부는 이날의 심리를 정리하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 사건은 재판부가 새로 구성되었고 형소법 원칙을 피고인들은 강조하고, 특수성에 관한 것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일반사건과 비교해 검사가 제시한 증거들이 고의적 지연이라 평가할 수 있을지, 공동신청 감정인을 통해 동일감정을 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이 사건의 성질상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여러 제출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종적인 문제는 이 사건의 법률 쟁점이 많고, 입증 책임에 대한 특수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양측이 법리적으로 틀렸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적용하는 게 적절할지 재판부도 고민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전례 없던 과실범의 공동정범 범위 관련해서도 많은 시간 소요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변호인들의 사건 장기화에 대한 입장은 알겠지만 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이 있고, 안전성 검사가 이뤄졌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겠지요"라며 "재판정에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다"고 말했다.

끝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특수한 질문에는 특수한 답이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항소심 재판부는 전문가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결론을 낼 수 있을까. 피해자들은 납득할 수 있을까? 환경산업기술원이 운영하는 피해구제 포털에 따르면, 2월 28일 기준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신청자는 7822명이고, 이 중 1810명이 사망했다. 정부의 지원대상자는 4978명이다.

▲ 지난 3월 20일 전국 20여 곳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주범 기업인 옥시와 애경에 책임을 묻는 옥시애경불매운동 캠페인이 진행됐다. 여수환경운동연합, 경주환경운동연합, 부산환경운동연합 등. ⓒ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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