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20일은 국가가 지정한 '장애인의 날'이다. 1991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돼 올해로 제43회 째를 맞았다. 정부는 매년 장애인의 날마다 장애인상 수상자, 장애인 복지분야 유공자 등을 선정해 정부포상을 전수한다. 각 지자체도 매년 이맘때 주간행사, 기념식, 축제 등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이슈를 겪고 있는 서울시는 올해 장애인의 날 행사의 주제를 이해, 감사, 화합, 희망으로 설정했다. 설명에 따르면 "다름과 편견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며 "다름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는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변화되는 세상을 희망"하자는 취지다.
이 아름다운 단어들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혹시 또?' 한다면 맞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주인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다. 지난달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하 공투단)을 출범한 전장연 및 연대단체 회원들은 20일부터 21일까지 이동권, 교육권, 자립권 등 권리보장과 차별철폐를 외치며 1박2일 집중투쟁에 돌입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화합하자는데, 장애인들은 왜 거기다 대고 '투쟁'을 외칠까? 간단하다. 화합을 가로막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철폐하려면 투쟁이 필요하다.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유래한 노동절(5월 1일)이 그랬다. 1908년 역시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유래한 여성의날(3월 8일)도 그랬다. 권리의 기념은 곧 투쟁의 기념이다.
"시혜적 장애인의 날 대신,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을 기념하자"
전장연 주도의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은 지난 2002년부터 21년간 이어져왔다. 2001년 4월 오이도역 장애인 노부부 리프트 추락참사를 계기로 발족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동권연대)가 출범한 1년 뒤다. 이동권연대 소속 단체들을 중심으로 87개 단체가 연대한 공투단(당시 공동기획단)이 처음 조직됐다.
이들은 △노동권 △이동권 △교육권 △시설 비리척결 △장애여성 권리 △최저생계 보장 등 복지 △참정권 등 7개 영역에서의 차별철폐를 주요 의제로 내걸었다. 이들은 당시에도 정부 및 지자체, 유관단체 등의 주도로 매해 진행되던 장애인의 날 행사를 "시혜적이고 기만적"이라 비판했다. 공투단 측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인들이 앞을 다투어 얼굴을 비추고, 유명연예인들 나오는 화려한 공연이 이어지고,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장애극복상'이라는 시상식과 어우러지고, 장애인을 도와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또 시상식과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 축하도 하고 격려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주고받는다.
언론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승리와 감동의 드라마들로 장애인의 삶의 현실을 미화하거나 차별의 구조를 은폐하고 지배구조와 권력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만적인 행태들이 이어진다. 장애인이동권투쟁으로 단련된 주체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4월 20일을 맞이하면서 이러한 동정과 시혜의 행사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고 분노하였다.
-2023년 420 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장애인의 날을 거부한 420투쟁> 중 일부
동정·시혜는 차별철폐·권리보장과는 다른 개념이다. 누군가 장애를 동정하고 시혜적으로 바라볼 때 장애는 고쳐야 할 것이며 고치지 못하면 불굴의 투지로라도 극복해야 할 것, 즉 '비정상'이 된다. 소수의 '비정상'을 위해 다수의 '정상'이 차질을 겪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여기서 출발한다. "장애인 몇 명 때문에 출근길 열차를 세워?" 장애인 30만 명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 취지도 근본은 같았다. "한 명의 장애인에게 매일 국가가 쓰는 돈으로 4인 가족이 살 수 있다."
'재활의 날'이 '장애인의 날'로… 기념일 뿌리엔 "재활이데올로기"
장애인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정상성'의 논리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장애인의 날은 본래 민간단체 '한국장애인재활협회'가 만들었다. 단체는 지난 1972년부터 자신들의 정기총회일(4월 20일)을 민간기념일 '재활의 날'로 지정했는데, 1981년 전두환 정부가 이를 받아 4월 20일을 '심신장애자의 날'로, 이듬해인 1982년엔 '장애인의 날'로 재지정했다.
1981년은 유엔(UN)이 '세계 장애인의 해'를 선포한 해로, 전두환 정부의 장애인의 날 지정도 이에 영향 받았다. 유엔 측의 촉구로 당해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현 장애인복지법)이 장애인의 날 법정 기념일 지정의 근거가 됐다.
공투단 측은 민간단체가 지정했던 재활의 날을 굳이 법정 장애인의 날로 기념하는 정부방침에 대해 "정부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재활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재활이데올로기란 "장애인에게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는" 의식체계를 의미한다.
재활이데올로기에 대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반발은 국내에서만 발발한 게 아니다. 유엔은 1982년 12월 3일 제37회 UN 총회에서 '장애인에 관한 세계 행동 계획'을 통과시키고 매해 12월 3일을 '국제 장애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81년 유엔이 해당 기념일의 제정을 준비할 당시 독일 등 유럽사회에선 광범위한 '국제장애인의날 반대 시위'가 진행됐다.
국제장애인의 날이 장애인 작업장, 장애인 주거시설, 정신과 병동, 특수학교 등 장애인 시설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 '장애인을 사회 시스템의 도움이나 배려를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수혜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관련기사 ☞ 열차·트램 운행 막은 독일 '전장연', 그들이 독일을 바꿨다) 이후 1982년부터 유럽의 장애인들은 매해 5월 5일을 '장애인 평등을 위한 유럽 항의의 날'로 지정해 장애인 평등권을 외치고 있다.
차별은 빼고, 재활·극복 강조하는 장애인의 날, 문제없나?
"정부는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기 위해서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2023년 4월 기준 보건복지부가 게시하고 있는 설명이다. "장애와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들을 위해 준비했다는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 취지도 여전하다. 복지부는 올해 장애인의 날 슬로건으로 "차별은 없이, 기회는 같이, 행복은 높이"라는 문구를 내세웠지만, 장애인들이 지적한 기념일 속 재활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새다.
13쪽 분량에 달하는 서울시의 '2023 장애인의 날' 보도자료 속엔 '차별'이란 단어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다. 차별을 논의하는 면담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쓸 돈은 없다'고 말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혜적 관점을 생각하면 앞뒤가 들어맞는다 해야 할까? (관련기사 ☞ "전장연은 강자"라는 오세훈에 박경석 "22년간 밀려져왔다")
'지역감정은 지역차별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적 단어'라 지적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지역감정이 아니라 지역차별이다. 젠더갈등이 아니라 젠더차별이다.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겪는 문제 또한 불통이나 불화가 아니라 차별이다. 필요한 것은 소통과 화합 이전에 차별철폐다. 장애인의 날에 반대하는 장애인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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