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신년 업무추진계획 살펴보니 '젠더', '성평등' 사라졌다

'여성' 지워낸 여성부 업무계획 … "성평등 빠지고 가족주의 강화"

여성가족부가 지난 9일 발표한 2023년 주요업무추진계획에서 '성평등' 관련 사업을 기존 대비 축소·삭제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9일 업무추진계획 발표 당시 '양성평등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성명을 보면 이 단체는 "(여가부 업무추진계획을 보면) 목표 및 핵심과제 차원에서 2022년과 비교했을 때 성평등 관련 사업이 삭제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여가부의 2022년과 2023년 업무추진계획을 비교해보니 핵심 목표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여가부는 올해 3대 목표로 △약자에게 더 따뜻하고 안전한 사회 조성 △저출산·저성장 위기를 극복할 미래인재 양성 △촘촘하고 든든한 지원을 위한 사회서비스고도화를 꼽았다. 반면 지난해 여가부는 △모두가 체감하는 성평등 사회 구현 △젠더폭력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사회 △다양한 가족 포용 및 촘촘한 돌봄 지원 △청소년 안전망 구축 및 참여 확대 등을 4대 정책목표로 제시했다.

지난해 제시한 목표에선 '성평등 사회', '젠더폭력' 등 주요 성평등 의제로 꼽히는 단어들이 직접 명시됐다. 올해의 경우, 12쪽 분량의 계획서 전체를 통틀어 '성평등'이란 단어는 국제기구 '유엔(UN) 여성 성평등 센터'를 언급할 때 단 한 번 등장했다. '젠더'라는 단어도 "청년층 중심 젠더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대목에서만 한 차례 등장했다.

'성평등'과 '젠더' 두 단어의 삭제는 김현숙 장관의 취임 이후 일관적으로 이어진 흐름이다. 지난해 12월 1일 여가부가 주관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 공청회에선 그간 양성평등 기본계획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돼온 단어 '성평등'이 '양성평등'으로, '여성폭력'과 '젠더폭력' 등은 '폭력'으로 대체됐다.

여성계는 이를 두고 현 여가부가 성차별 및 여성폭력 문제의 핵심이 '구조적 차별'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김주희 덕성여자대학교 여성학 교수는 지난 7일 열린 여가부 폐지 반대 시민살롱에서 '여성폭력', '젠더폭력' 등의 단어를 단순한 '폭력'으로 대체하는 일이 "기존의 가치중립적 시선으로는 관찰될 수 없는 여성폭력의 특수성"을 간과하는 방침이라 강조했다.

실제로 유엔(UN)은 지난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회 세계여성대회 이래로 '여성폭력'을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해 온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표지', '여성에게 예속적 지위를 강요하는 주요한 사회적 기제 가운데 하나'라고 규정하며 각 국가들이 해당 인식에 입각해 여성·젠더 폭력을 방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의 여성가족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한국건강가정진흥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국정감사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연합뉴스

주요 목표가 달라지면서 구체적인 정책과제도 변했다. 2022년 당시 '성평등 사회 구현'을 위한 주요 과제로 제시됐던 '양성평등 추진체계 구축'이 2023년 계획에서 삭제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에 따라 2023년 여가부 업무계획에선 "성차별 구조 개선 사업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신년계획에서 삭제된 구체적인 사업내용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성별격차 해소 △민간부문 내 여성 대표성 강화 △성별임원 현황 및 성별임금격차 분석·발표 △성별영향평가의 질적 제고와 성인지 예·결산의 성평등 효과 분석 강화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 등을 제시했다.

그간 여성계는 캐나다의 젠더 기반 분석 플러스(GBA+) 평가 프로세스와 같이 "모든 정책 분야에 있어서 성평등 관점의 영향분석·실태조사 등을 실시"하는 '(양)성평등 추진체계'의 구축을 성평등 실현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제시해왔다.

단체는 여가부의 2023년 계획에서도 "조직문화 진단 대상기관을 넓히고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있"다면서도, 여가부가 그에 있어서 "성별·세대 간 인식변화와 요구를 반영"하겠다고 밝힌 점에 우려를 표했다. "기계적인 양성평등 및 역차별론, '청년층에는 성차별이 없다'는 왜곡된 인식을 다시 한 번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현숙 장관은 지난해 5월 취임 전 청문회에선 '성차별 해소'보다 "젠더갈등 해결"을 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는 취임 이후 '인하대 성폭력·사망 사건'과 같은 여성폭력 관련 인터뷰에선 "남성 피해자의 비율도 많다"는 등의 답변을 남기며 "기계적 양성평등에 매몰돼있다"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관련기사 ☞ 김현숙, 인하대 성폭력 사망 두고 엉뚱 발언 "디지털성범죄 男 피해자 20%")

특히 단체는 2023년 여가부 계획에서도 △성폭력 피해자 무료법률지원 사업 예산 현실화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대상 확대 △해바라기센터 운영 안정화 및 확대 △무고 역고소 피해자 법률 지원의 연속성 확보 △스토킹 관련 수사기관 교육 등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가 지속적으로 지적해온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라며 "여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해소하기 위한 예방, 인식 및 문화 개선 등과 관련한 사업은 빠져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국회 앞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이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성평등 추진체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여가부의 신년 업무계획이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하는 '가족구성권'에는 관심이 없고,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기존의 "가족주의를 강화"하려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단체는 "양육 및 돌봄 관련 내용이 '저출산·저성장 위기를 극복할 미래인재 양성'이라는 목표 하에 재배치 됐다"라며 "국민을 인구로 관리하고 인재로 도구화 하는 정부의 기조 및 관점이 다시 한 번 확인 되고 있다"고 이를 평가했다.

여가부는 앞서 지난해 9월에도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현행유지' 의견을 밝히며 '사실혼 및 (비혼) 동거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법적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라는 내용의 지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년)상의 입장을 뒤집은 바 있다. (관련기사 ☞ 文정부 정책은 무조건 지워라? ... 사실혼·동거 가구 '법적 가족'에서 배제한 여성부)

이에 단체는 "성평등은 실종되고 여성은 지워지며 혼인과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가 국가 중심으로 강화되는 정책사업안에서, 여성의 권리 보장에 대한 국가적 비전과 책임은 찾아보기 어렵다"라며 여가부가 "성평등 정책을 수립·이행하는 총괄의 역할을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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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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