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변하는데 언제까지 20세기 개념 '근로계약' 붙잡고 있나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실질적 지배력 가진 자가 사용자로서 책임져야

2022년이 저물어가던 12월 30일, 고용노동부와 중앙노동위가 내어놓은 보도자료 하나가 파문을 일으켰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이 원청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한 대우조선을 부당노동행위로 제소한 사건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활자는 한국말로 되어 있는데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문서가 나왔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는 이상"?

우선 이 사건의 결론은 '부당노동행위가 맞다'는 것이다. 즉, 대우조선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단체교섭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옳다는 것.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은 대우조선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대우조선을 상대로 쟁의행위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엥?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도, 단체행동을 할 수도 없다? 아니, 단체협약 체결이 불가능하다면 무슨 목적으로 단체교섭을 요구한단 말인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갔더니 식당에 입장해 메뉴판은 볼 수 있지만, 음식을 주문할 수도 먹을 수도 없다는 황당한 얘기나 다름없다.

한글로 작성되었지만 외국말보다 해석이 어려운 이 보도자료에서 "도대체 왜?"라는 당연한 질문에 답이 될만한 실마리는 이 문구 하나 뿐이다. "하청 근로자와 원청 간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없으면 단체교섭은 요구할 수 있으되 그 이상의 권리는 부정된다는 논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도대체 이 판정은 노동조합법 제 몇 조 몇 항을 참고한 것일까?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법원 판결이 있을까? 해외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나? 그나저나 이 사건은 대우조선의 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라는 판정을 해달라는 것일 뿐 파업권의 존재 유무를 물은 게 아닌데, 중앙노동위가 묻지도 않은 내용을 판정문에 넣을 권리가 있기는 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폭되는 의문들에 대한 고용노동부·중앙노동위의 답변은 이것이다. "추후 구체적인 판단 내용 및 법리적 논거 등이 담긴 판정서를 작성하여 노사 당사자에게 송부 예정" - 그러니까 판정문 송달 시점까지 기다리라는 건데, 통상적으로 한 달 가까이 걸리니까 구정 연휴를 보내고 나서야 구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판정문을 읽고 나면 과연 수많은 의문점들이 풀리게 될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의혹에 휩싸이게 될까? 어쨌건 그거야 판정문이 나온 이후에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인사이드경제>가 관심을 갖고 얘기하려는 대목은 좀 다른 영역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20세기 개념인 '근로계약 체결'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독(도크) 화물창 바닥에 스스로 용접한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농성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송으로 세월 다 보내라?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 체결", 그러니까 근로계약서를 직접 썼거나(명시적) 사실상 쓴 것이나 다름없는(묵시적) 경우를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쉽게 이해되지만 단어만 들어도 케케묵은 낡은 냄새가 나는 '묵시적 근로계약'이란 뭘 말하는 걸까?

이번 중노위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면 대우조선 하청(도급)업체가 사실상 페이퍼컴퍼니, 그러니까 실체도 없는 유령업체인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하청노동자들은 대우조선 원청이 직접 고용했어야 할 노동자들인데 유령업체를 동원해 도급으로 위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될 경우란 아주 특이하고 독특한 사례에 해당하며, 법원에서는 이 경우 하청노동자의 지위를 원청이 직접 고용한 노동자로 인정하게 된다. 근로계약서만 쓰지 않았을 뿐 정규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럼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는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단히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고용노동부 또는 지노위·중노위가 인정해준다 해도 사용자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소송을 통하는 수밖에 없으며 하급심 판결을 넘어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와야 수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노위의 판정은 이런 의미가 된다. 정규직이어서 명시적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거나, 소송으로 대법원에서 묵시적 근로계약관계임을 입증해야만 단체협약 체결권과 파업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송의 경우 법리 다툼도 치열할 수밖에 없어서 대법 판결까지 줄잡아 5~6년은 걸릴 것이니, 1~2년짜리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최소 5~6년을 투자하라는 얘기가 된다. 노동조합 만들지 말고 비싼 변호사 사서 소송 걸라는 말 아닌가.

근로계약 체결 안 해도 파업권 인정해온 중노위

지난해 월드컵 경기 때마다 라이더유니온과 배달플랫폼노조가 쿠팡이츠를 상대로 파업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런데 배달 라이더들이 근로계약을 체결할까?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극소수 사례가 있긴 하지만) 배달 경험 있는 독자들이라면 모두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대부분의 라이더들은 배달 플랫폼이나 배달대행사와 '업무위탁계약'을 체결한다.

아니, 그럼 라이더유니온과 배달플랫폼노조는 근로계약 체결도 없이 파업을 했으니 모조리 불법파업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2개 노조는 모두 노동조합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창구단일화 과정을 거쳤고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 절차도 거쳤다. 조정회의를 거쳐 라이더유니온·배달플랫폼노조에 합법적인 파업권을 인정해준 것도 중노위였다.

어디 그뿐인가. 마찬가지로 근로계약이 아니라 업무위탁계약을 체결한 대표적인 플랫폼노동인 전국대리운전노조 역시 지난해 10월에 카카오모빌리티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대리운전노조 역시 창구단일화 절차, 쟁의조정절차 모두 중노위에서 이뤄진 바 있다.

▲서울 시내에서 배달 노동자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LG케어솔루션 방문점검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해 노조법이 정한 창구단일화 절차, 쟁의조정절차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 모두 지노위·중노위를 통한 것이었다. 사측의 교섭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한 것도 서울지노위였다. 노조 결성 2년 3개월만인 지난해 9월에 단체협약 체결이 이뤄지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설치·수리기사들이 노조를 결성해 단체교섭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지노위·중노위에서 2021년에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했고, 그 뒤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해 쟁의조정신청 절차를 거쳐 이들의 파업권을 인정해준 것도 지노위·중노위였다. 2021년 9월부터 35차례의 단체교섭 끝에 작년 11월에 단체협약 잠정합의가 이뤄졌다.

학습지 대교의 교사들은 지난해 3월 단체교섭을 시작하면서 대교와 타임오프 적용 등의 기본협약을 체결한 바 있으며, 구몬이 학습지교사들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난해 11월 서울지노위는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한 바 있다.

근로계약 체결이라는 낡은 기준 박물관으로 보내야

배달 라이더, 대리운전기사, LG케어솔루션 방문점검기사, 학습지 교사 모두 근로계약서를 체결하지는 않는다.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말이다. 이들은 모두 업무위탁계약이나 운송계약과 같은, 근로계약과는 이름도 성격도 다른 계약을 체결한다.

이들 모두에게 지난 1~2년 사이 단체교섭권은 물론이고 단체협약 체결권, 파업권을 인정해준 것은 다름아닌 중노위였다. 그런데 대체 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에게는 단체교섭 체결과 파업권을 획득하려면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근로계약 체결 관계이기를 요구한단 말인가.

특수고용과 플랫폼 노동자들에게는 근로계약 체결 여부를 따지지 않지만 대우조선처럼 원·하청 관계에서만 근로계약을 요구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떤 법의 어떤 조항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 모든 노동자에게 단체협약 체결권, 파업권을 위해서 근로계약 체결을 요구할 거라면, 특수고용·플랫폼 노조가 쟁취해온 권리도 모조리 부정할 것인가.

지난 1년 동안 근로계약 체결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노무제공을 통해 이익을 향유하는 기업을 상대방으로 한 노사관계를 인정한 사례, 단체교섭은 물론이고 단체협약 체결권과 파업권을 인정한 사례들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법 어느 조항에서도 단체교섭의 상대방과 반드시 근로계약을 체결한 관계여야 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계약 이름과 상관없이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자에게 사용자책임을 묻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상식이 비로소 법원과 노동위원회에서 해석론으로 굳어가고 있으며, 앞의 표가 바로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조법 2조 2호 개정 : 실질적 지배력 가진 자가 사용자다

사실 문제의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관련 중노위 판정에도 그러한 대목이 조금 녹아있긴 하다. 단체교섭을 거부한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한 논리가 보도자료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노동안전 등 원청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미치는 하청 근로자의 노동조건에 대해 교섭을 요구하는 경우" 원청은 이 교섭에 응해야 한다고 말이다.

근로계약을 체결했건 위탁계약·운송계약을 체결했건 "근로자의 노동조건, 수행업무 또는 노동조합 활동 등에 대하여 사실상의 영향력 또는 지배력을 행사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자"를 사용자로 보고 사용자책임을 지우자는 것. 이게 바로 하청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노조법 2조 개정의 핵심 내용이다.

이미 시대와 사회는 근로계약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약관계에서 노사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싶은 이들만이 여전히 '근로계약 체결'이라는 낡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낡은 댐이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낼 수 없듯이, 낡은 기준이 새로운 노동의 진출을 막을 수 없다. 노조법 2조 개정은 새로운 틀의 훌륭한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관계자들이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에서 마포역 방향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조법) 2·3조 개정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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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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