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있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국회에 일 좀 하라고 다그치느라 분주하다. 올해 말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정부 지원 제도의 '일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시민사회 단체들은 '건강보험 정부 지원 항구적 법제화 및 정부 지원 확대'를 지지하는 시민 45만 명의 서명을 국회에 전달했다.(☞ 바로 가기 : 무상의료본부 10월 26일 자 '45만 2,122명의 국민들이 서명했다. 건강보험 정부 지원 한시 조항 폐지하고, 정부 지원 대폭 늘려라')
시민사회는 올해 초부터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고, 국회는 연말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관련 법 개정안을 내놓고 있다. 한시적 제도로 시작했기 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비슷한 논의가 십수년째다. 만일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올해 말로 정부 지원이 중단된다면, 시민들은 17.6% 인상된 보험료를 부담해야만 지금 수준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
'통치' 차원에서도 정부나 국회가 그렇게 놔둘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과거와 유사하게 마무리 될지 모른다. 또다시 몇 년을 연장하는 것. 기존과 다른 맥락과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보험을 둘러싼 현 정부의 수상한 행보와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 대응 경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을 둘러싼 정부의 행보는 어떤가?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한 새 정부 업무계획에서 "건강보험 지출개혁을 통한 필수의료 보장 확대", "공공정책수가 도입 등 필수의료 기반 강화"를 핵심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7월 말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 이후 필수의료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다. 9월에는 의사협회, 병원협회와 '필수의료 살리기 위한 의료계와의 협의체' 회의를 갖고 "중증·응급 등 필수의료 중심으로의 보상체계 개편"을 포함한 필수의료 종합대책 추진방향을 논의했다.
앞서 지난 5월 발표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는 "필수의료 기반 강화 및 의료비 부담 완화"가 복지부 과제로 포함되었다. "필수·공공의료 인력·인프라 강화"가 그 자체로 목표이자 "언제 어디서든 모든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었고, "의료비 부담 완화"와 "건강보험제도 개편"은 별개로 제시되었다. (2017년 여·야 합의로 마련한) 소득 중심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안 2단계가 올 하반기에 시행되면 보험료 수입 감소가 예상되는 만큼 "약품비 지출 적정화 및 부적정 의료이용 방지 등 건강보험 지출 효율화"와 "건강보험 재정 정부지원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2022년을 한 달 남겨둔 지금 건강보험 재정 정부지원 확대는 소식이 없고, 건강보험 지출 효율화는 "필수의료 보장 확대"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둔갑했다. 이 과정에서 '필수의료에 대한 건강보험의 책임성 강화'라는 담론이 등장했다. 복지부 업무계획은 "초음파·MRI 등 급여화된 항목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와 "외국인 피부양자 기준 개선"을 통해 "건강보험 지출개혁"을 달성하고, 그를 통해 "필수의료와 고가약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는데, 필수의료 기반 강화 수단은 "공공정책수가 도입"으로 축소됐다. 고가약제의 경우 신속등재를 위한 대책 없는 규제완화가 환자 접근성과 건강보험 재정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근본 원인인 신약의 고가화를 도리어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바로가기 : 10월 19일 자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의약품시민사회연대][성명]복지부가 내놓은 ‘치료제 접근성 제고 방안’으로는 가속화되는 신약의 고가화를 막을 수 없다') 결국 건강보험 보장성을 축소해 개개인의 부담은 늘리면서 필수의료를 핑계 삼아 민간공급자와 제약기업을 배불리는 계획이라는 말이다.
이주민을 "피부양자 제도 부적정 이용 등 건강보험 재정 누수" 원인으로 호명했던 복지부는 모순적이게도 건강보험 부과체계 2단계 개편안에서 내국인의 피부양자 자격 기준을 애초 계획보다 완화해, 건강보험료 수입은 감소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19 대응 경험은 무엇을 남겼나?
한편 지난 8월 말 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3년 예산안에서 보건 분야 예산은 전년 대비 0.6% 인상되어 물가인상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삭감됐다. 코로나19 예방접종 실시, 감염병 대응 지원체계 구축 및 운영 등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일시적으로 늘렸던 지출을 감액한 결과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지만, 지역거점병원 공공성강화와 같은 공공보건의료 확충 예산도 삭감됐다. 특히 공공어린이재활병원 운영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한 사실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여러 언론이 복지부 보도 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보건복지예산 100조 처음 넘었다"느니, "올해 대비 11.8% 증가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정부의 긴축재정과 선별복지 기조에 대한 비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예산 증가분 대부분이 복지예산이라는 것, 보건예산 특히 공공보건의료 예산이 삭감된 사실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공공보건의료 확충은 코로나19와 관련된 사회구성원들의 고통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요구이자,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엄청난 희생과 투쟁 끝에 정부로부터 얻어낸 노정합의 사항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공보건의료 예산 삭감은 예산을 둘러싼 현실정치의 비민주성의 극치이기도 하다.
건강보험과 필수의료, 공공보건의료를 둘러싼 정부의 행보는 국가 역할과 책임의 축소라는 면에서 명백히 민영화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여기에는 물론 현 정부의 기조가 작동하지만, 문제는 보다 더 구조적이라는 점도 짚어야 한다. 건강보험과 민간의료 중심의 건강체계가 코로나19라는 공중보건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 곧 건강보험 재정을 활용한 민간의료 총동원이 공중보건체계에서 민간 역할의 확대를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감염병 예방과 관리는 국가 책임이므로, 건강보험 재정이 부담한 코로나19 진단, 치료비용을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건강보험 재정이 아니라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정부 지원이 국가의 책무라는 주장은 어떻게 가능할까? 감염병 예방과 관리를 제외하면, 국가는 책임이 없는 걸까?
우리는 감염병 예방과 관리는 물론, 모두의 건강에 대한 관리라는 의미에서 공중보건체계 나아가 건강체계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체계를 건강보험체계로 축소 이해함으로써 건강보험마저 공적인 부담이 아니라 개개인의 부담이라는 원리가 지배적이게 되는 경향,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마저도 시민사회 구성원들과 건강보험만의 책임으로 전환시키려는 경향, 이를 통하여 공공보건의료마저 보편적 제공이 아니라 잔여적이고 선별적인 제공이라는 원리가 지배적이게 되는 경향이 바로 우리가 처한 구조적 문제의 맥락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공적 의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조차도 '건강에 대한 개인 책임 강화' 담론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하려는 권력의 통치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운명과 건강, 의료이용은 스스로 책임지게 부추기면서 공적 건강체계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을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전략이 내재하고 있다.
건강보험과 민간의료에 의존하는 체계를 넘어, 모두를 위한 공적인 건강체계는 개인의 노력과 건강보험만으로 구현될 수 없다. 조세 기반의 새로운 건강보장제도, 시민사회의 공유재로서의 공공보건의료체계 확충, 사회권력이 주인되는 공적 건강체계와 같은 대안적인 공적 건강체계를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당장은 '시민사회의 희생에 기반한 건강보험의 책임성 강화' 담론전략으로 통치의 효율성을 달성하려는 정부와 정치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2023년 예산안 심의에 대한 감시와 참여, 예산의 목표 및 방향에 대한 대안 제시는 구체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 전망을 가지되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명확하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이제 사회구성원들의 건강에 대한 책무성을 시민사회에 이전하기 위하여 건강보험도 노골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사회권력은 '건강보험의 책임성 강화' 담론을 철저히 해부하고 구체적인 대안으로 공격하고 방어해야 한다. 이미 공격이 시작되었으니 오래 시간을 끌 일은 아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