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뭘 먹고 싶겠어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참사 사고 지역에서 도보로 300미터(m)가량 떨어진 위쪽 골목,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김 모 씨(66)는 참사 엿새째인 3일도 카페로 '출근 아닌 출근'을 했다. 참사 이후 "손님도 없고, 장사할 마음도 없는" 가게에서 그가 하는 일은 화초 관리뿐이다. "장사하려고 나온 건 아니에요. 여기 키우는 꽃들이 죽을까봐…" 기자와 만난 김 씨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눈물을 보였다.
"(참사 소식을 듣고) 처음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말이 되냐고,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냈죠."
김 씨의 가게는 사고 지역이자 근방 최대의 번화가이기도 한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비해 다소 외진 곳에 자리했다. 평소엔 익숙한 얼굴의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주류와 커피 등을 판매한다. 지난달 29일, 사고가 일어난 밤에도 그랬다. 인파가 몰린 아래쪽 골목에서 단골 한 명이 다급히 가게로 뛰어왔다. "여기 큰일 났다고, 사람이 몇 백은 죽은 것 같다고" 외치는 그의 말을 김 씨는 처음에 믿지 못했다.
35년을 이태원에 발붙이고 살아온 그는 평소 가게를 찾는 젊은 단골들에게 "과음하지 마라"며 잔소리를 내뱉던 정겨운 사장님이다. '딱 한 잔만' 더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아들 같고 딸 같아서" 무슨 일이라도 날까 공짜 술 한 잔 주며 그들을 가게 밖으로 떠나보냈다.
사고 이후 "도저히 우울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는 그는 혹시 화초가 다 죽을까 가게에 들를 뿐, 장사를 하지도, 사고 지역을 찾지도 않는다. 뉴스도 애써 보지 않는다.
참사 현장 인근 조심스레 문 연 상인들…"가만히 있기만 해도 불안하다"
참사 엿새째, 여전히 무거운 공기에 휘감긴 이태원 곳곳의 골목을 찾았다. '참사 이후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골목상인들은 이태원 1번 출구 앞에 모인 추모와 애도의 물결에 목소리를 보태면서도 '남은 이'로서의 현실적인 고뇌를 지우지 못했다. 그들은 참사 현장에서 트라우마를 안게 된 참사의 또 다른 당사자이자 "말을 꺼내는 것조차 미안한" 생계의 고민 속에 던져진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3일 현재 이태원역 인근의 많은 가게는 여전히 자율휴업으로 참사 추모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골목골목의 일부 가게들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다만 대부분 김 씨처럼 실질적인 영업보단 가게 정리 등에 전념하는 모습이었다.
공간을 둘러싼 심란한 분위기만큼이나 상인들 개개인의 마음상태도 불안해 보였다. 사고지역 100미터 근방 건물 지하1층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는 50대 여성 이모 씨가 기자의 발소리에 "어머나"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30대 초반 나이의 딸이 있는 그에게 지난 이태원 참사는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당일 오후 6시쯤 퇴근한 그는 "(딸도 본인도) 사고 현장엔 있지도 않았는데, 자꾸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며 참사 이후의 심리 상태를 고백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이태원 참사와 같은 대규모 사회적 참사의 경우 "사고 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상인이라도 심리적으로 큰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며 인근 상인들 또한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어떻게 보면 생업에 다시 열심히 종사하는 일이 (본인에게는) 참사에 대한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현지 상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말을 꺼내기도 미안하지만…" 코로나 한파 이후 다시 시작된 생계 걱정
추모공간이 마련된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150미터가량 떨어진 한 양복점 주인 윤모 씨도 "장사를 하기보다는 가게 정리라도 할 겸" 오랜만에 가게에 나왔다. 해당 위치에서 30년 가까이 가게를 지켜온 윤 씨는 참사 이후의 우울감에 더해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이 이태원 일대를 휘감고 있다고 말했다.
쌓여 있는 양복바지를 턱턱 접으며, 그는 "피해자분들이 계신데 아직 말씀드리기 좀 그렇다"면서도 "코로나 사태 당시 이태원 상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이런 참사까지 생겼으니 상인들은 고민이 클 것"이라고 동네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 2020년 5월엔 소위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한 때 이태원 전체 상권의 매출액이 전년 대비 80% 이상 감소했다.
해밀톤 호텔 위쪽 골목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60대 여성 홍모 씨는 "코로나 사태 때는 안 그래도 높은 임대료 때문에 상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며 "제가 생각해 봐도 앞으로 여기서 식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상권축소 문제 때문에) 상인들은 현실적인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이후 이태원 일대엔 기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상인들은 이 같은 고민을 언론에 말하는 것조차 두렵다. "이런 때에 생계 얘기를 하는 게 미안할 뿐"더러, 사회 일각에선 인근 상인들을 향한 공격적인 여론이 형성돼 "혹여나 그런 안 좋은 마음에 불을 붙일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홍 씨는 "코로나 때는 상인들이 아예 가해자 취급을 받기도 했지 않느냐"면서 "그런 걸 고려해서 잘 좀 이야기해 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경찰 측 "상인회 경찰 배치 자제 요청" 주장…상인들 "가해자 취급 두려워"
지난 1일 "상인회가 경찰 배치 자제를 요청했다"는 경찰 측의 주장이 나오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1일 언론에 공개된 경찰 측 문건엔 지난달 26일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용산구청 등 유관기관들이 참여한 간담회에서 상인회가 "과도한 경찰력 배치 자제"를 요청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반면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상인회 관계자는 '경찰력 자제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참사가 벌어졌을 때 수많은 상인들이 직접 나섰다"며 트라우마와 비판 여론으로 인해 "많은 상인들이 문을 계속 닫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측 한 관계자는 "실제로 온라인상의 비난 때문에 더는 장사를 못 하겠다, 포기하겠다 하시는 분들이 많다"며 "그런 분들 중엔 사고현장에서 구급활동을 도운 분도 있고,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분도 있다"고 전했다. 참사의 또 다른 당사자인 상인들이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상인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생업에 종사한 것뿐인데 참사로 인한 분노가 상인들에게 투사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 같다"라며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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