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로 '노사정 대화' 박살내기…尹대통령이 꿈꾸는 '자본의 자유'로 성큼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김문수의 반공연맹'으로 변질된 노사정위

1998년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는 여러 번에 걸친 개명을 거쳐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라는 지금의 이름을 달았다. 노사정위원회인 경사노위는 노동자-사용자-정부가 국민경제의 핵심 문제인 노동 문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보를 주고 받고, 관련 정책을 협의하며, 필요할 경우 타협하고 합의하는 활동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자본의 자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대화"도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 밖에 없다. 법제도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장치와 기제가 태생적으로 자본에 우호적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적 부담을 안고서라도 "사회적 대화"에 노동조합운동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통로 말고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국가 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 국가 수준에서는 사실상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자유주의적 정권들인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때만이 아니라 우익 정권들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노동운동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그런데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윤석열 정권 하에서는 거두어 들이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경사노위 위원장이 된 김문수로 인해 경사노위가 "노사정위원회"라는 성격을 급속히 상실하고 반공연맹으로 전락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쟁과 혁명의 예방'을 위해 탄생한 ILO

"노사정 3자주의를 통한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 through tripartism)"의 원조는 국제노동기구(ILO)다. 1차 대전과 공산주의 혁명으로 유럽 문명이 폐허가 된 때인 1919년 출범한 ILO는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설계한 베르사유 조약 제13장에 의거하여 "사회정의 없이는 항구적 평화도 없다"는 기치 아래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산하의 노사정 3자 기구로 출범했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산업평화(industrial peace)의 부재를 낳았고, 이로 인한 노동과 자본의 계급 대립이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의 살육극을 초래했다는 반성 속에서 출범한 국제기구가 ILO다.

전쟁과 혁명의 산물인 ILO에게 1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층이 주문한 실질적 목표는 "세계 전쟁을 억제하고 노동자 혁명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국제노동기준을 확립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목표를 갖고 탄생한 ILO는 자본주의 체제가 야기한 '노동문제(Labour Questions)'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00년 동안 고군분투해왔다. ILO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자의 이익을 초보적 수준에서 보장하는 국제노동기준, 즉 국제노동법을 모든 나라의 모든 사업장에 적용함으로써 야만스러운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지속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태를 예방하는 것이었다.

1919년 채택된 '8시간' ILO 협약

ILO가 노사정 3자 합의를 통해 만드는 국제노동법을 우리는 국제노동기준으로 부르며, 이는 협약(Conventions)과 권고(Recommendations)라는 두 가지 형태를 띠고 187개 회원국의 법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1919년 가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ILO는 모두 6개의 협약을 노사정 합의로채택했다.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의 제1호 협약, 실업자 보호의 제2호 협약, 모성보호의 제3호 협약, 야간근무를 규제한 제4호 협약, 공장에서 일하는 청소년 보호를 위한 제5호 협약, 일하는 청소년의 야간근무를 규제한 제6호 협약이 그것이다. 이후 지난 백 년 동안 ILO는 모두 190개의 협약을 만들었다.

백 년도 전인 1919년 가을 만들어진 6개 협약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제2호 실업 협약 하나 뿐이다. '인더스트리 4.0'을 이야기하는 지금 '인더스트리 1.0' 시절에 만들어진 하루 8시간과 주48시간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겐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김문수에게 ILO 기준은 무슨 의미?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면서 경사노위를 반공연맹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김문수에게 ILO 협약 제1호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대한민국이 '인더스트리 1.0' 시절이던 1970년대의 김문수는 서울대를 다닌 경력을 숨기고 어느 제조업 공장의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그 시절 그는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의 노동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라는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과 1919년 채택된 ILO 협약 제1호의 실현을 염원했을 것이다.

'인더스트리 4.0' 시대인 지금의 김문수는 ILO 제1호 협약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자유를 억압하는 낡은 규제로 볼 것이다. 하지만 '유관순 누나'가 감옥에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제1호는 세계 6위의 국력을 자랑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제2호 실업협약은 국가가 무료로 공적인 취업기관을 운영하는 책임을 지고 그러한 체계의 운영 협의에 사용자단체만이 아니라 노동자단체까지 참여시키라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 취업기관(employment agencies)은 영리업체에 외주화 되어 있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허가를 주어 인력공급을 하는 사적 취업기관들로 노동시장의 맨 밑바닥에 자리한 노동자들이 몰린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이 금한 '중간 착취'를 비롯한 온갖 불법 행위들이 버젓이 자행된다.

1919년 ILO가 확립한 하루 8시간, 주 48시간, 모성보호, 밤일 규제, 청소년 노동 보호 등은 모두 '자본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상에서 사실상 '자본의 자유'를 수십 번 외친 윤석열의 사상적 지향과도 충돌한다. 최근 단행된 여성가족부의 폐지 결정은 모성 보호와 청소년 보호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보수적 자유민주주의자에 불과한 문재인을 '김일성주의자'로 낙인 찍은 김문수의 '반공주의'에서 보자면 100년 전 만들어진 6개 ILO 협약은 시대에 낡은 것일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김일성주의'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윤석열이 실현하려는 자본과 부자의 자유에 반하기 때문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첫 정책, 노조 개입

1922년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1926년 일본에서는 히로히토가 천황이 되어 군국주의 정책을 개시했다.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윤석열 정권처럼 자유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극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시행한 첫 공작이 노동조합의 해산과 단체교섭의 해체였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보기에 공산주의, 즉 김문수의 용어로는 김일성주의자가 장악한 노동조합은 해산되어야 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국민경제에 부담을 주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단체교섭은 해체되어야 했다.

이들 나라에서는 1930년대 노동조합운동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1920년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 등장했던 노동운동이 193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비합법 지하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공산주의'와 맞닿았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김문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노동운동가 김문수는 정확히 이 식민지 시절 조선 노동운동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은 만주의 김일성 항일게릴라부대와 사상적 동지였고, 이러저러한 인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운동과 단체교섭체제를 파괴한 파시즘과 나치즘 세력은 노동자를 전쟁으로 몰고 갔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국민총동원'과 '노자협력'과 '노무관리'의 깃발이 모든 사업장에 내걸렸다. 조선의 청년들이 공장과 탄광으로 "자발적으로" 끌려갔다. 소녀들 중 일부는 전선의 위안소로 "자발적으로" 끌려갔다. '근로정신대'가 해협을 건너 일본의 공장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의 전선으로 동원되었다. 몇 명이나 끌려갔고, 몇 명이나 귀환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공격에 놀란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반공주의 입장을 버리고 스탈린의 소련에게 도와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1942년과 43년을 거치는 겨울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패퇴시켰다.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온 유럽이 격동했다. 영국의 한 신문은 1943년 2월 23일을 '적군(Red Army)의 날'로 선포하고 "소련군의 승리가 유럽 문명을 구원했다"며 전율했다.

1944년 ILO 필라델피아선언

소련군과 러시아 인민의 막대한 희생으로 유럽 전선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의 패배가 분명해지고 있던 1944년 5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ILO 총회가 열려 2차 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분석하고 전쟁 이후의 국제 질서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Labour is not a commodity)"를 선언한 ILO 필라델피아 선언으로 이어졌다.

인간인 노동자가 하는 일(work)은 사고파는 상품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인 노동자의 몸과 마음에서 나오는 노동을, 즉 인간 자체를 상품처럼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는 ILO 필라델피아 총회의 결론은 수천 만 명을 살육한 2차 대전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차 대전 직후 열린 ILO 총회는 자본가들만 누려온 '결사의 자유'를 노동자들에게도 동등하게 보장하는 내용의 제87호 협약을 만들었다. 이 협약이 말하는 결사의 자유의 전제 조건은 관료와 검찰 같은 국가가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가 노동조합 활동을 법령을 통해 '사전에 승인(previous authorization)'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을 통한 지배(the rule by law)'에 다름 아니며, 파시즘과 나치즘 국가가 열렬히 집행한 것들이었다.

결사의 자유, "검찰과 관료의 노조활동 개입 금지"

김문수도 잘 알겠지만, 우리나라 노동법은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국가(관료와 검찰)의 개입과 관여를 허용하는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회사가 돈이 있어 자발적으로 지급하는 노조전임자 임금도 불법으로 규정한 조항이 버젓이 살아 있다. 해고를 동반한 회사의 인력조정에 대해서도 노조가 발언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이 수두룩하다.

사용자에 의한 인사경영권의 배타적 독점을 자유라 여기는 김문수의 입장에서 국가가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하지 말라는 ILO 제87호 협약은 '김일성주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협약을 문재인 정권이 덜컥 비준해버렸으니, 문재인을 '김일성주의'로 매도하는 김문수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노사정 3자 사회적 대화의 원조인 ILO는 사회적 대화를 노사 혹은 노정 양자 사이의, 그리고 노사정 3자 사이의 정보(information)의 교환, 정책(consultation)의 협의, 이를 토대로 한 교섭(negotiation)으로 규정한다.

정보가 충분히 공유될 때 제대로 된 협의가 이뤄질 수 있다. 충분한 정보와 알 찬 협의는 실질적인 교섭을 위한 토대가 된다. 사회적 대화라는 삼각형에서 정보와 협의라는 꼭지점이 부실한데, 교섭이라는 꼭지점이 충실할 수 없다.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는 정보와 협의 없이 교섭, 즉 타협으로 직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적 대화가 실패하는 이유

노무현-문재인 정권 때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정보를 노동에 제공하지 않았다. 어쩌다 공개되는 정보는 양과 질에서 허접했다. 그러니 노사 당사자의 협의도 허접해졌다. 그 틈을 교수나 변호사 같은 '공익'들이 지금의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같은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파고들어 돈을 벌고 명성을 챙겼다. 이들은 정보와 협의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환상을 유포시키면서 노사 단체에 교섭을 압박했다. 그런 교섭이 잘 될 턱 없다.

그래도 그런 허접한 정보와 협의라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었다. 그래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적 대화 기구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 하에서는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지형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 정권은 자본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첫 정권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물론 노무현-문재인 정권도 '자본의 자유'를 지향했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심지어는 전두환과 노태우도 공개적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은 반노동-친자본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다.

1970년대 김문수의 '정체'

김문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자신이 가졌던 지향을 갖고 사회적 대화를 다룰 의지가 없다. 윤석열이 김문수를 내정한 근거로 댄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김문수는 김문수의 개인사에서 '김일성주의' 혹은 '공산주의'적 일탈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김일성주의 여부를 떠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노동현장 경험은 2022년 지금에 이르러 이제 낡은 것이 되기도 했다.

당시의 군사독재는 이제 검사독재로 전환되었다. 한국노총만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민주노총도 존재한다. '광주사태'를 승인한 배후에 미국이 있음이 드러나면서 대한민국은 더이상 반미의 불모지가 아니게 되었다.

1987년 6월의 학생-시민 항쟁과 그해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친미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소련과 중국과 화해하며 탈냉전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북한과는 깨지 못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와는 냉전의 벽을 깨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김문수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직간접적 계기가 되었을,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의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전태일이 '분신자살'했던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279달러였다. 김문수가 공장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한 1970년대 말에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00 달러를 넘지 못했다. 김문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를 공부했던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5000 달러를 넘지 못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2년 한중 수교의 경제사적 의미

그렇게 노동자에게는 전쟁과 지옥이었던 '본원적 축적'의 기간을 거치던 한국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9년을 지나며 6000달러를 돌파하고, 1994년 1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 시기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던 시기였고, 1992년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중국 시장이 열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2021년 1인당 GDP는 3만4758달러에 이르렀다.

필자는 한국 경제가 지금의 선진국 경제가 될 수 있었던 구조적 배경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내수시장의 성장과 1992년 한중 수교를 통한 해외시장의 확대를 꼽는다. 이 두 기회가 없었다면 한국은 아직껏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희한한 사실은 지금 한국이 반노조 정서와 반중국 정서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자신에게 마실 물을 제공해왔던 우물에 스스로 침을 뱉고 독을 풀고 있다. 이는 결국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폭망'을 가져올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30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혁당 김종태와 고향이 같은 김문수 

'인더스트리(industry) 4.0' 시절인 지금에도 노동시간의 무한 확대를 통한 자본의 자유를 말하는 윤석열 정권이다.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주의에 대한 국가 탄압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상들에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관대하거나 중립적인 자에 대해 국회에서 핏대를 올리는 수준의 김문수다. 도대체 어느 시절의 신영복이고 어느 때의 통일혁명당 김종태란 말인가.

재미난 점은 '김일성주의자' 통혁당 김종태와 김문수는 고향이 같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고향인 경북 영천은 친일경찰과 이들을 비호한 미군정에 대항한 민중 항쟁인 1946년 '대구 10.1 폭동'이 가장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던 곳이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활동하던 경북 선산에서는 항쟁이 대단히 평화적으로 이뤄졌지만, 공산주의자 박상희는 진압 후 미군의 결정으로 군경에 의해 총살되었다.

노동자를 위한 '결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어디에

1944년 채택한 필라델피아선언에서 ILO는 "노동이 상품이 아닐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노동자에게 결사의 자유에 더해 표현의 자유를 제시했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1957년 ILO는 제105호 '강제노동 철폐' 협약을 노사정 3자 합의로 채택했다.

현행의 정치적 체제, 사회적 체제, 경제적 체제에 반대하는 견해나 입장을 가진 이를 탄압하지 말며,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게 제105호 협약의 주요 내용이다. ILO가 강력하게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권은 국가보안법의 개폐와 파업노동자에 대한 형사적 처벌 금지를 의미하는 제105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김일성주의'라는 견해나 입장에 동조하는 이는 국가보안법으로 최고형인 사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한 점은 사형이 최고형인 한국의 국가보안법에는 침묵하는 이들이 무기징역이 최고형인 홍콩의 국가보안법은 그 철폐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187개 ILO 회원국 중에서 178개국이 제105호 협약을 비준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베트남과 일본과 중국은 각각 2020년 7월, 2022년 7월, 2022년 8월에 비준했다. 제105호를 비준하지 않은 ILO 회원국은 모두 9개로 한국, 브루나이, 라오스, 마샬 군도, 미얀마, 팔라우, 동티모르, 통아, 투발루다.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그리고 파업의 자유에서 한국은 이런 수준의 나라다. 결국 이 문제는 윤석열이 그토록 외쳐온 '자본의 자유', 그리고 김문수가 증오하는 '김일성주의'에 대한 관용 및 인정 여부와 연결되어 있다.

윤석열의 자유 = 파시즘의 자유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밀튼 프리드먼 부부가 1980년 내놓은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말하는 정책을 가장 열심히 수행했던 정권은 칠레의 피노체트 군부 정권이었다. 그리고 칠레 군부는 역사적으로 그 탄생과 성장에서 2차 대전 패배 이전까지의 독일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와 역사적 맥을 같이 하는 반공연맹을 이끌 사람이 경사노위를 이끌게 되었다. 이로써 노사정위원회로서의 경사노위는 지난 정권 하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출범한 지 5년도 안 되어 사실상 그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의 경사노위는 ILO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극렬한 반공주의자를 위원장을 둠으로써 내용은 물론 형식에서도 반공연맹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연유로 그 본질까지는 아니지만 그 껍데기 포장만이라도 노사정위원회의 모습을 띨 때까지 노동운동이 경사노위 체제에 참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민주노총까지도 활동해왔던 경사노위 틀 밖에서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사회적 대화를 노동운동은 활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노동의 시간'은 낭비될 것이고 한국 사회의 발전도 그 만큼 지체되거나 퇴보할 것이다. 물론, 이는 오롯이 김문수 같은 이를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임명한 '자본과 부자의 자유'를 꿈꾸는 검사 대통령 윤석열의 책임으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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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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