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의 '기억 전달자'
지난 9월 16일 인천 월미공원 제물포광장에서 "인천상륙작전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월미도 마을 주민을 추모하는 위령제다. 올해로 제72주기(14회)를 맞이했다.
광장 한 켠에 천막과 의자가 놓여 있고, 유가족 몇 분이 일찍 오셔서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4명이 왔길래 어찌 알고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학교(부천 옥길중학교)에서 단체로 월미도 체험학습 왔는데 친구들끼리 다니다가 행사 안내 표지판을 보고 들어왔다고 한다. 무슨 행사인지 알고 있냐는 질문에 서로 고개를 돌려보더니 맨 끝에 학생이 인천상륙작전 때 돌아가신 분들 추모 행사로 알고 있다며 똑부러지게 대답을 한다.
위령제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행사장이 분주해졌다. 카메라 초점을 다시 잡고 단상의 마이크를 점검하는 가운데 인천시립합창단원의 <못 잊어> 4중창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리허설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 공원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매년 오시는 원주민 어르신, 꼭 오셔야 할 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12년에 처음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한인덕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뵙고 나서 또 어느 분 이야기를 들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이분이 제일 잘 기억하고 계신다면서 만나 보라고 하셨다.
이범기(1938년생) 어르신은 폭격이 일어나던 당시 18살이었는데 월미도 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서부터 폭격이 일어난 당시의 전후 상황을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게 증언해 주실 수 있는 분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주민들은 근처 영종도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이범기 어르신은 마을에 남아 있었다. 인민군이 점령한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참호 공사에 동원되었다.
9월 10일 아침 7시경에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는 밤샘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까지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첫 군사 행동인,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깨어 있는 상태에서 들으신 분이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는데 올해는 못 오시는 모양이었다.
위령제가 시작되고 내빈 인사 말씀이 이어졌다. 올해는 인천시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중구청장만 추모사를 했다.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정치인들이야 그렇다쳐도 월미도 사건을 가장 잘 기억하고 계신 '기억 전달자'의 부재에 마음이 무거웠다. 인사 말씀이 끝나고 이범기 어르신의 증언이 영상으로 나왔다. 따가운 가을볕에 화면이 하얗게 바랬지만 말소리는 십 년 전 처음 뵈었을 때처럼 또렸했다.
인천상륙작전 닷새 전, 미군이 월미도 마을을 폭격한다
위령제가 열리는 월미공원 내 제물포광장은 원래 월미도 주민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그것도 120가구에 600여 명이 살던 꽤 큰 마을이었다. 마을은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거나 인천으로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년 이범기는 일제 때 첫 손에 꼽히는 유원지였던 월미도에서 조개로 만든 목걸이나 국자 따위를 파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고, 생선을 식당에 대주며 살았다.
전쟁이 일어나고서도 월미도 주민들은 멀리 피난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인민군이 먼저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영종도로 잠시 피신하거나 배를 타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종도에 친척이 있거나 바닷배를 탈 만한 사정이 허락하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했다. 인민군이 월미도를 점령하자 곧바로 바다를 면하고 있는 월미산 서쪽 사면을 빙 두르는 대규모 진지 구축 공사를 시작했다. 여기에 마을 주민을 비롯해 인천 시내에 있던 노무자들이 동원되었다.
참호 파기 공사는 밤에만 했다. 하루 일하면 다음 날은 쉬고, 사흘 정도 일하고 나면 이틀 정도 쉬는 일이 반복되었다. 주민들은 밤새 일하고 나면 아침에 집에 돌아와 받아온 쌀로 밥을 지어 먹고 잠자기 바빴다. 동원이 없는 날에는 인민위원회의 정신교육에 불려나갔다. 그렇게 인민군 점령기의 생활이 이어졌다.
1950년 9월 10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도 어느새 석 달이 다 되어갔다. 이범기는 전날 밤에 참호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 평소에는 피곤을 못 이겨 금세 곯아떨어졌지만 그날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아침 7시였다. 이범기는 그날따라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자주 들려 이상했다. 그런데 마을 위로 지나가는가 싶던 비행기가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가 내리꽂히며 저공비행을 했고 귀청을 찢을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곧이어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을 한복판에 떨어진 것은 불 지르는 폭탄인 네이팜탄이었다. 초가집이 대부분인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미군은 마을을 전소시킬 목적이었다. 폭격기는 다시 돌아와 아직 서 있는 건물들에 로켓포로를 발사해 쓰러뜨렸다. 주민들은 잠자던 차림 그대로 혼비백산해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서 도망쳐야 했다. 마을 아래로는 미군 기지 철조망이 있어 인천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다리 앞으로 모여들자 상공에서 선회하던 폭격기가 급강하 하면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주민들은 갯펄에 납작 엎드렸다. 폭격이 잠시 뜸한 틈을 타 누군가 수를 냈다. 갯벌에 둥그렇게 둑을 쌓아 진흙탕을 만든 다음 사람들을 빠트려 진흙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렇게 진흙으로 위장하고 갯벌에 엎드려 있으면 폭격기 조종사에게 발견이 안 되거나 발견되더라도 이미 죽은 것으로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폭격기의 눈을 피해 다리 옆 갯벌을 건너 인천 시내로 넘어갔다.
이범기도 그렇게 월미도를 빠져나왔다. 갯벌에 엎드려 있다가 폭격기가 거대한 새처럼 몸을 훑고 지나는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러자 폭격기의 조종석에 엄지손톱만한 조종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폭격기가 낮게 날고 있었다. 아무리 진흙으로 온몸을 칠했어도 조종사 눈에는 주민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게 다 보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엎드린 사람들이 모두 죽은 줄 알았는지 폭격기는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미군은 왜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월미도 마을을 폭격했을까? 인민군 진지로 오인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그 이유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해방 직후 미군이 월미도에 기지를 짓고 진주한 적이 있어 마을의 존재를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해안 벽을 오르기 위한 사다리까지 준비할 정도로 철저히 상륙 지형과 지물을 파악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인천만의 조석간만의 차와 더불어 인천항을 굽어보며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인 월미도라는 섬 자체였다. 맥아더는 월미산 정상에서 상륙부대의 후면이 내려다보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를 위해 월미도를 사전에 '집중폭격(Saturation Bombing)'하여 완전히 초토화시키기로 했다.
집중 폭격의 영어 표현을 보면 '푹 젖다(saturate)'가 들어 있다. 땅이 화약으로 푹 젖을 만큼 폭탄을 쏟아붓는다는 말이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폭격 이후 실제로 월미도 땅이 다 뒤집혀서 맨 땅에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고 한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이것은 명백한 민간인 학살이자 전쟁 범죄였다.
미군이, 국방부가, 인천시가 차지한 월미도 마을
주민들은 그때 피난 나오고 난 뒤로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상륙작전 직후 미군이 월미도 다리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고향을 눈앞에 둔 실향민 아닌 실향민이 되었다. 미군 초병들은 아이들이 다리 근처에만 가까이 가도 땅바닥에 총을 쏘아 쫓아냈다.
1952년 3월, 주민들은 인천시에 처음으로 진정서를 냈다. 당시 표양문 인천 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주민 대표 다섯 명은 마을에서 쫓겨나 변변한 식량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지내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시장이 주민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지금 미군이 저렇게 들어와 있으니 어쩌겠나. 걱정하지 마라.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71년 정말로 미군이 물러갔지만 한국 해군이 들어왔다. 주민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도 서슬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 2001년에 믿기 어려운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군에 이어 한국 해군도 머지않아 물러난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동안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렸기에 이번 기회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인천시, 인천시 중구청, 국방부, 청와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에 적극적으로 탄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근거 서류를 갖고 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전쟁 통에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마을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집 문서를 갖고 오라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방부가 물러나면서 월미도를 인천시에 돈을 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물론 주민들의 마을 땅도 함께 인천시에 팔렸다. 인천시는 월미산을 포함해 월미도 전체를 공원으로 개발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결국에 해군 부대가 건물이 있던 주민들의 마을 자리도 공원의 일부가 되었다. 주민들은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귀향과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있어서 미군의 인천상륙은 아직 끝나지 않은 '작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월미도 귀향대책위 한인덕 위원장은 올해 처음으로 인천상륙작전 승전기념식에 초청받았다. 이를 두고 한인덕 위원장은 위령제 추도사에서 해군이 행사에 초청을 한 것은 국가가 그나마 인정을 해 준 것이라 좋지만, 행사 내내 상륙작전 당시 주민의 희생이 언급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전쟁 피해자의 유가족이 지내는 위령제나 미군의 작전을 한국군이 재현하는 승전식이나 자신들의 기억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려는 의례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서로 다른 기억이 공존할 때 가능하다.
국가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전의 기억에 치명적 '흠결'이 되는 월미도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애써 모른체하고 있다. 월미도 주민의 기억이야말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진실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많이 읽는 대표적인 SF 소설인 로이스 라우리의 <기억 전달자>(비룡소)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기억을 간직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나쁜 부분은 고통이 아니야. 외로움이야. 기억은 나누어져야 해."
(The worst part of holding the memories is not the pain. It’s the loneliness of it. Memories need to be shared.)
기억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질수록 오래 이어진다.
※ 참고 자료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2006)
강변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서해문집, 2017)
박만순, "미군이 폭탄 쏟아부은 내 고향 월미도, 언제쯤 갈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 2022년 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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