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러! 질러!" 산골 마을 덮친 한낮의 악몽

[살아남은 기억들] (1) 문경 석달마을 학살 사건

경북 문경시 산북면사무소. 문경석달 양민집단학살 피학살자 유족회 채홍달 총무를 만나기로 한 곳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찬바람이 소슬하게 불었다. 하늘도 희끄무레했다.

"오늘같이 이래 추운 날에는 지금도 마을 어른들은 '꼭 사변 날 때처럼 춥다' 그라십니다."(채홍달)

여기서 '사변'은 6.25가 아니다. 1949년 12월 24일 일어난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십여 분 뒤 검은색 소나타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체구가 작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유족회의 채홍달 총무다. 그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어머니 배 속의 태아로. 그는 사건 이후 13일 만에 '기적처럼' 태어났다. 채홍달에게는 어릴 때부터 유복자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저를 볼 때마다 '야가 간가?(이 아이가 그 아이냐?)' 하고 안쓰럽다고 했어요. 그라고는 또 그때 이야기들 하시고……."

어린 채홍달은 어른들 어깨너머로 한마디라도 더 들어서 누가 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을 죽게 했는지 밝히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채홍달은 학살에서 살아남으신 홀어머니의 고생을 눈으로 보며 자라났다. 군 제대 후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35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그때가 2008년. 고향으로 돌아와 벼농사를 짓고 살면서부터 유족회 총무 일을 맡았다.

▲ 문경석달 양민집단학살 피학살자 유족회 채홍달 총무. ⓒ김일우

"먼저 가볼 곳이 있어요."

그가 석달마을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내화리 표석이 보이고 얼마 안 가 차가 국도변에 멈췄다. 노루목고개 사건 현장이었다. 언제 고개를 넘었나 싶었는데, 지나온 뒤로 길이 살짝 솟아 있다. 1949년 9월 이곳 노루목고개에서 경찰 12명과 동로면장·민간인 등 15명이 무장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나중에 '석달마을 학살이 왜 일어났냐' 할 때 국방부에서 핑계를 대는 게, 군인들이 석달마을 사람들을 (노루목고개 사건을 일으킨) '빨갱이'로 의심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노루목고개하고 저기 석달마을하고는 거리도 멀고, 전연 상관이 없는 곳이거든요."

내화리를 빠져나와 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가 예각으로 방향을 돌려 석봉리로 들어갔다. 계곡을 따라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올라갔다. 길이 확 좁아지는 곳부터는 차에서 내려 걸었다. 길가에 사과밭이 이어지고 가느다란 길 끝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절이 앉아 있다. 절 뒤로는 온통 산이다.

걸어온 곳부터 절터까지가 석달마을이었다.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곳에는 펼쳐 놓은 책의 갈피처럼 좁은 계곡을 따라 논밭이 있었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다진 터마다 집이 있었다. 사건 당시 24가구 127명이 살았던 마을은 채씨 집성촌이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49년 12월 24일, 그날 정오 무렵, 한낮의 악몽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석달사건 현장.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논으로 몰아넣고 세 방향에서 총격을 가했다. ⓒ김일우

학살 사건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채홍연은 당시 열한 살이었는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냈다. 그날 채홍연은 옆집의 세 살짜리 어린애와 놀고 있었다. 촌수로 할머니뻘 되는 아이 엄마가 점심으로 죽을 내올 때였다.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째지듯 울리고 "질러! 질러!"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둘러보니 주변 집에 불이 붙었고, 채홍연의 집 초가지붕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집으로 뛰어가 살림살이를 꺼내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채홍연은 그때 군인을 처음 봤다. 군인들은 채홍연을 비롯해서 사람들을 마을 앞 약간 옴팡진 논으로 몰아넣었다.

"그 논 자리가 어디쯤인가요?"

"바로 여기예요."

채홍달 총무는 우리가 선 곳 바로 앞, 절 아래 과수원을 가리켰다.

불길을 피해 뛰쳐나왔다가 군인들에게 몰려 논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추위와 공포로 몸이 벌벌 떨렸다. 대부분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품에 안긴 아기, 어린이들이었다. 채홍연은 옆집 할머니가 가져온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군인들의 손에 들려 있던 M1 소총과 BAR(브라우닝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사람이 퍽퍽 넘어갔다. 옆 사람 살점이 채홍연의 손등에 튀어 들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일어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무슨 이유로 죽는지 알고나 죽자!" 하고 소리쳤다. 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아주머니가 쓰러졌다.

채홍연과 옆집 할머니를 비롯해 스무 명 못 되는 사람들이 운 좋게 살았다. 그때 군인들이 "산 사람은 살려주겠다"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논둑에 세웠다. 그런 다음 또 다시 사격을 가했다. 총알이 채홍연의 오른팔 팔뚝을 뚫고 지나갔다. 채홍연은 순간 기절해서 서너 시간 동안 쓰러져 있었다. 그때 채홍달의 어머니도 총에 맞았지만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알이 오른편 어깨를 관통했는데 뼈는 건드리지 않았다.

학살이 끝나고 장교 하나가 담배를 피우려는데 손이 떨려서 불을 못 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군인이 성냥을 그어 대줬다고 한다.

이 무렵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이 방학식을 한 날이어서 아이들은 '방학책'을 들고 신나게 집으로 뛰어왔다. 그러다 마을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올랐을 때, 경계를 서고 있던 군인들과 마주쳤다.

"야, 여기 더 있다!"

군인들이 몰려와서 아이들을 에워쌌다. 14명 되는 아이들은 군인에게 붙들려, 학살이 일어난 논 위쪽, 마을 뒷산 바위 앞으로 끌려 내려갔다. 거기에 이미 마을 아저씨와 형님들 일곱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2차 학살이 일어났다. 청장년 6명과 국민학생 6명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때 시체 아래 깔려 생존한 채의진은 평생 학살 트라우마에 고통받으면서도 석달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헌신한다.

▲ '어린이 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첫 돌도 되기 전에 희생돼 '남아기', '채아기' 등으로 기록된 이름이 보인다. ⓒ김일우

두 차례 학살로 석달마을 주민 127명 중 86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에는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영아가 5명, 12세 미만 어린이가 26명이었고,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성이 절반인 42명이었다. 국군은 마을 하나를 전소시키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아이들이 다닌 김룡국민학교를 찾아올 정도로 중대하게 취급됐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국군이 아닌 '공비들에 의한 소행'으로 규정됐다.

대체 이 악몽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학살 주체는 국군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 대원 70여 명이었다. 25연대는 1949년 9월 28일부터 1950년 5월 4일까지 태백산지구 일대에서 실시된 동부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주력으로 참가한 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2소대와 3소대는 학살 전날(23일) 오후 4시에 각자의 주둔지인 점촌과 예천을 출발해, 이튿날 오전 10시 호계면 선암리(상선암)에서 합류했다. 여기서 점심을 얻어먹은 후 마을 청년 두 명을 길잡이로 세워 석봉리 석달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이르러 지휘관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에 불을 놓게 했다. 소대원들이 주저하자 지휘관들은 '명령불복종'이라고 을러댔다. 이들은 석달마을 주변의 산길을 따라 수색정찰을 하고 갈평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출발했었다. 석달마을은 수색정찰로상의 단순 경유지였을 뿐이었다.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지휘관들이 석달마을 사람들이 공비들에게 협력했을 거라는 짐작만으로 마을 하나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 아래 굴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지새웠다. ⓒ김일우

문경 석달마을 학살사건은 과거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2007년 상반기에 진실규명을 이뤄냈다. 그동안 채의진 유족회장이 미국의 방선주 박사로부터 미군 자료를 입수하는 등 많은 자료와 증언을 정리해 두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채홍달 총무는 진실규명 결정에 바로 이어서 개인 명의로 이의신청을 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발표한 권고사항에 배·보상 문제가 빠져 있는 등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진실규명을 통해서는 '범인'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학살 피해자 전체를 위한) 위령비 건립, 피해자에 대한 배상,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사건 생존자들도 거의 돌아가시거나 연로하셔서 증언할 수 있는 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실의 여정은 여전히 먼데 산골의 겨울해가 1949년의 그날처럼 짧기만 하다.

※ 참고자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문경 석달마을 사건 보고서>(2007)

정희상·최빛, <빨간 베레모>(시사인북, 2018)

KTV, <영상기록 진실 그리고 화해 -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 이브 문경 석달사건>(2020)

※ 이 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5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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