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상황에서 '피해자의 동의 없이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가운데, 그간 가정폭력 문제를 주시해온 여성·시민단체는 법원 및 법률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8일 성명을 내고 "피해자의 동의가 없어도 가정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조치가 적법하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면서도 "이미 우리 법률은 가정폭력범죄 신고를 받은 경찰이 즉시 현장에 나가서 폭력행위를 제지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 어디에도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며 해당 판결과 실제 가정폭력 현장 사이의 괴리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가정폭력범죄 가해자를 분리하지도, 수사하지도, 처벌하지도 못하는 주요 사유로 자주 언급돼왔다"며 '피해자의 동의'라는 법적 조건이 가해자-피해자 분리조치를 넘어 가정폭력 문제 전반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왔다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5일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에게 피해자와의 분리조치를 요청하고, 이후 재판과정에서 가해자가 이를 '피해자의 동의 없는 분리조치'라며 문제 삼은 건에 대해 판결하면서 "가정폭력처벌법의 입법목적과 응급조치를 둔 취지, 가정폭력범죄의 특수성 등을 고려하면 가정폭력 행위자와 피해자의 분리 조치에 피해자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대법원 관계자는 "가정폭력 범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응급조치를 할 때 피해자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판시한 최초 판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여전 측은 이러한 판례에도 불구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는" 현행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가정폭력의 해결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현실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지적했다.
특히 단체는 실제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수집된 상담 사례를 들어 "피해자가 말하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불가피한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수사기관 담당자에게 '그래도 아빠인데', '처벌하게 되면 이혼해야 한다', '아빠가 감옥에 가는 건데 아이들은 괜찮냐'는 등의 말을 듣고 죄책감에 처벌의사를 철회한 사례"나 "보복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이유, 자녀 양육 문제, 가정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는 사회적 비난 등 복합적인 이유로 신고하더라도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고소하더라도 중도에 취하하고 억지로 합의하는 경우"가 실제 상담 현장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단체는 "피해자의 의사를 핑계로 가정폭력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결과, 한국의 가정폭력 기소율은 10.1%에 불과하다. 또한 법원에서 유기징역을 받은 가해자는 14명뿐이다"라며 "한국에서 가정폭력은 사실상 형사 처벌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에 기대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가정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제대로 된 처벌 없이 교육·상담을 조건으로 가해자를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사이, 피해자는 더 큰 폭력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며 "가정폭력처벌법 목적조항을 개정하여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 의사를 제대로 밝힐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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