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동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통해 본 무궁화호 잔혹사

[기고] '수익성' 논리에 사라져가는 '서민열차의 공공성'

근대는 민중의 시대를 의미한다. 왕권은 상징으로만 남겨졌다. 과학은 종교로 가려졌던 장막들을 걷어냈다. 신의 행위로 여겨졌던 일들이 과학자들에 의해 자연 현상임이 증명됐다. 각성된 민중은 바리케이트 안에서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노래했다. 공화국은 유럽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던 투사들 가슴속에도 살아있던 꿈이었다. 공화국(REPUBLIC)은 시민이 주인인 체제이고 그 기반은 공공성이라는 선언이다.

근대는 광장, 거리, 다리,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같은 공적 공간을 만들었는데 철도의 등장 이후 기차역이 공공공간에 추가됐다. 오늘날 기차역은 이동 혁명을 상징하는 장소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사회적 자원이 되었다. '역세권'이라는 말은 가장 유용한 투자대상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현실이다.

19세기부터 공적 역할을 부여받았던 철도였지만 국가마다 근대를 통과한 궤적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특히 민주 공화국의 정신을 담아내지 못한 권력자들은 철도를 정치적 이익을 구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국 철도는 식민지와 전쟁, 가난과 경제발전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여정과 나란히 달렸다. 공화국 정신을 수십 년간 외면해온 철도 담당 부처 국토부는 한국 철도에 120년 독점 방만 기업이란 굴레를 씌우고 수익 창출이란 채찍질을 하고 있다.

국토부의 압박과 정치권력자의 전횡은 서민 열차의 상징인 무궁화호 잔혹사로 이어진다. 모빌리티 이론의 대가인 존 어리(John Urry)는 현대사회에서 모빌리티는 다양한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급, 지역, 인종, 성별, 장애 여부에 따라 어떤 이들은 거의 모든 편익을 누리는 데 비해 또 다른 이들은 제한적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강릉 지역 유권자들에게 성과로 제시된 무정차 고속 직통열차는 시종착역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을 배제하고 차별한다. 또 직통열차를 위해 폐지된 무궁화호는 이 열차를 이용했던 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직통으로 잇는 열차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직통열차는 선로 용량이 충분한 노선에서 가능하다.

▲무궁화호 열차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시간당 균일하게 배분되어 패턴화된 규칙 시간표는 역에 도착한 승객들이 15분에서 30분 내에 목적지로 향하는 열차를 탈 수 있다. 이런 조건이라면 수요에 따라 직통 열차를 추가 편성해 운행할 수 있다. 그러나 강릉선은 노선 공유로 인한 병목 구간 등으로 선로 용량이 포화상태이다. 이런 이유로 직통 열차가 편익을 더하는 게 아니라 다른 부분의 희생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

정치인이 철도에 개입하는 현상을 일본에서는 '아전인철'이란 말로 경계했다. 역이나 노선 선정, 정차역 결정 과정 등의 일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정치인의 성과로 치장 될 때 철도는 부실의 늪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철도에 국한해 말하자면 수도권이 아닌 지역 공동체는 그 지역의 철도 막차 시간이 주민 이동권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2014년 이전 서울에서 옥천행 경부선 무궁화호 막차 시간은 오후 10시 55분 이었다. 옥천역에는 다음날 1시가 넘어 도착했다. 2017년에는 저녁 9시 50분으로 막차 시간이 당겨지더니 2019년에는 오후 7시 49분으로 대폭 당겨졌다. 그리고 2021년부터는 오후 5시 31분이다. 옥천 지역에 사는 시민들이 한국사회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볼일을 보고 무궁화호를 이용한다면 서둘러야 한다. 일찍 끊긴 막차만큼 지역사회는 이동권에서 멀어지고 공동화된다. 막차가 떠나고 나면 상징적 공공 이동 수단은 중단된다. 이 시간이 빨라지는 만큼 지역은 일찍 문을 걸어 잠그는 셈이 되고 더 깊이 소외되어버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열정 열차라는 이름으로 무궁화호 전세열차를 이용해 선거유세를 펼쳤다. 이준석 대표는 겸손한 자세로 지방 중소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무궁화호를 빌렸다고 했다. 무궁화호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줄 정도로 서민열차가 되었다. 하지만 전세열차가 아니었다면 지방 중소도시들을 제대로 방문할 수 없었다. 무궁화호 이용 환경은 후보가 바라듯 곳곳의 민심을 듣고 공약을 전해줄 만큼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는 무궁화호라는 서민적 상징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는지 몰라도 무궁화호의 존재 가치는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 새정부 출범 이후 코레일과 SR의 통합 같은 국민들을 위한 철도 정책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 자신의 정책 공약을 홍보하는 '열정열차'를 타고 1박 2일 일정으로 호남지역을 순회했다. ⓒ연합뉴스

철도공사는 무궁화호의 승객이 계속 감소하는 추세에서 효율성과 수익성을 고려할 때 무궁화호 운행 편수를 줄이거나 구간을 단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민 열차 무궁화호의 감축은 지역소멸을 가속화하고 그 결과 철도 이용객이 또 줄어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기후변화에 따른 모달시프트(수단변환)는 도로에서 철도로의 전환을 기본 전제로 한다. 그런데 도로에서 철도로 유인을 못할 망정 철도를 이용 못해 대체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모색하게 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를 역행하는 행태이다.

철도 운행 여건상 장거리는 KTX에 맡기고 지역내 중단거리는 무궁화 같은 일반열차에 맡기는 역할조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역할조정이 철도공사의 서민 열차 냉대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지역 주민들이 서울까지 운행했던 무궁화호가 사라지거나 단축되는 대가로 KTX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환승에 따른 파격적 요금 인하 정책이 나란히 도입되어야 한다.

공기업이 수익을 올리고 흑자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공적 책무를 다하지 않고 얻는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국토부는 지금이라도 철도의 사회적 역할 수행을 위한 공적 과제를 제시하고 여기에는 수익성 논리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한국은 법률에의해 철도 공공서비스를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PSO(Public service obligation)로 시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 법은 노약자 할인이나 벽지노선에 대한 지원만을 담고 있어 제대로 된 공공서비스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회적 논의를 통해 PSO제도는 철도가 다양한 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다양한 공적 역할에는 벽지노선에 대한 생색내기식 지원이 아니라 KTX부터 광역철도까지 철도를 삶의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삼는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금 정책과 지원 정책이 포함되어야 한다.

무궁화호는 62년 전인 1960년 2월 21일 초특급 열차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경남일보는 기사로 "우리나라 철도사상 최고의 초급속력을 가진 (무궁화) 특급열차의 경부선간 시운전은 18일 기정운행시간 6시간40분을 1분 단축한 6시간39분의 기록으로 성공리에 끝났다."고 전한다. 서울-부산간 운행시간을 통일호보다 30분 단축시켜 고속열차의 반열에 올랐다. KTX가 서울 부산간을 2시간 30분 내외에 주파하는 것에 비하면 아련한 흑백필름 속 사연 같아 보인다. 하지만 12시간 가까이 걸리는 완행(비둘기호)열차는 물론 통일호보다 빠른 쾌속 열차의 등장은 한국 철도 발전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후 새마을호가 최상위 열차로 등장했지만 무궁화호는 비둘기호, 통일호 보다 상위 등급 열차의 명성을 유지하며 전국을 달렸다.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수준 향상과 철도 여건의 변화는 비둘기호와 통일호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했다. 한 때 최고 열차였던 무궁화호는 가장 낮은 등급의 서민 열차 칭호를 얻으며 묵묵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그 역할은 지속해서 축소되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철도 환경에서 무궁화호가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차량의 내구연한도 한계에 다다라 객차들은 은퇴를 앞두고 있다. 산뜻한 신형 열차로 대체 되더라도 무궁화호가 담고 있었던 가치만큼은 사라지지 않기를 시민들은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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