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차 '퀴퍼질'…"이 짓을 왜 하냐고? 외롭지 않으려고"

[다시 만난 퀴어퍼레이드] ③ 처음, 다시, 그리고 계속 만나는 '퀴퍼'

3년 만에 광장을 찾은 서울퀴어문화축제엔 다양한 참여자들의 여러 이야기들이 공존한다. 2022년의 퀴어문화축제에서 <프레시안>이 만난 이야기들을 전한다. 서울 이태원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서 윤김명우 사장을 지난 14일 대면으로 만났다. 퀴어 프렌들리 비건 타투샵 '업스테어 스튜디오'의 우디 작가를 15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퀴어퍼레이드 현장에 찾아온 젠더퀴어 당사자 스케디 씨를 16일 현장에서 만났다.

#1. 22년 차 '퀴퍼' 중 … "여기를 왜 계속 오냐고?"

"외롭지 않으려고."

66세, 20년 이상을 오픈리 퀴어로 살아온 윤김명우 씨에게 한국 사회 곳곳은 차별 있는 공간이었다. 젠더퀴어 정체성을 표현할 용어조차 부족했던 80년대, 20대의 그가 '바지 씨'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으면 근처 테이블 남자들이 "너는 남자냐 여자냐"며 말을 걸었다. 사귀었던 많은 이들은 결국 떠나보냈고, "여자가 여자랑 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관련 기사 ☞ '퀴어퍼레이드 고인물' 레즈비언 바 사장이 만드는 차별 없는 공간)

2022년 현재 60대의 윤김명우 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의 사장이다. 매일 저녁 몰려드는 젊은 손님들에게 이곳은 서울에 몇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선배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계셔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젊은 시절의 자신은 경험하지 못했던 차별 없는 공간을 운영하면서 '명우 선배'가 흔히 듣는 말이다.

"얘들이 외롭지 않게 하고 싶어, 얘들이 와서 내가 외롭지 않고. 결국은 그게 좋은 거지. 외롭지 않은 거"

14일, 서울퀴어문화축제 개막 전 <프레시안>과 만난 윤김명우 사장은 레스보스라는 공간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윤김명우 사장이 벌써 22년째 '퀴퍼'에 참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2001년 서울 홍대에서 50여 명의 인원으로 시작했던 제1차 서울퀴어문화축제 때부터, 이 '작지만 큰 광장'은 그에게 동료와 연인과 선배와 후배를 "얼굴 드러내고 당당히 만날 수 있는" 차별 없는 공간이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애들도 여기서 1년에 한 번은 만나잖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16일 서울광장 레스보스(LesVos) 부스에서 <프레시안>과 다시 만난 윤김명우 레스보스 사장 ⓒ프레시안(이상현)

#2. 처음 만난 퀴어 퍼레이드 … "그때 느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확신을."

타투이스트 우디(예명) 씨는 20대 초반 퀴어퍼레이드에 처음 참가했다. '퀴퍼'의 첫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는 "사실 많이 놀랐다." 그 전부터 오픈리 퀴어로 살아왔지만 "스스로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선 다른 퀴어들을 찾아볼 수 없었고, 마주치게 되는 "차별의 순간들"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퀴퍼 이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살면서 무수히 마주치는 차별적인 순간들에 아무리 무뎌지려 해도 조금씩 자기혐오가 쌓이곤 합니다. '나는 왜 퀴어일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요. 제게 퀴퍼란 이 부정적인 생각들이 해소되는 축제입니다. 소속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높이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타투와의 첫 만남도 그랬다. 미술은 배워본 적도 없는 그에게 타투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일탈의 일종"으로 타투를 한 번 받아봤을 뿐. 그런데 그 한 번의 일탈이 그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사회에 불만이 많고,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인재상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았"던 그에게, 타투샵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타투샵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여기서만큼은 제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디 씨는 본인이 경험한 '처음'을 모으고 모아, 다시 한국 사회의 '처음'을 만들어냈다. 2022년 현재 우디 씨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퀴어 프렌들리 비건 타투샵 '업스테어 스튜디오' 이야기다. 사회가 그런 만큼 타투샵에도 "차별과 혐오"는 만연해 있었기에, 차별이 없고 혐오가 없는 타투샵을 꾸리고 싶었다.

"업스테어 스튜디오는 위 작업을 포함하여 그 외 위생 관리 등 전반적인 과정에서 쓰이는 모든 물품으로 동물성 원료가 들어가지 않은 크루얼티-프리 제품을 사용하며, 잉크 컵 같은 일회용품은 생분해성 제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작업자가 퀴어 또는 엘라이로 구성되어, 고객이 퀴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불편하지 않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6일 서울광장 업스테어 스튜디오 부스에서 <프레시안>과 만난 타투이스트 우디 작가 ⓒ프레시안(이상현)

업스테어 창립 멤버이자 비거니스트 동료인 '파과(예명)'와의 만남을 가리켜, 우디 씨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부분을 비인간 동물로부터 착취해서 영위했는지 체감"하는 계기였다고 돌이킨다. 그렇듯 업스테어 창립은 우디 씨와 동료들이 쌓아온 인식과 실천의 결과물이다. 만연한 차별을 인식하고 "사소한 것부터의 실천"을 수행하면서 "우리가 경험했던 여성혐오와 퀴어혐오, 그리고 동물착취가 없는 타투샵"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쌓아 올렸다.

"샵을 운영하면서 가끔은 고민되는 상황도 생깁니다. 예컨대 비건 재료는 논비건 재료에 비하여 평균 1.5배에서 2배 정도 비싸거든요. 재정적으로 힘이 들 때는 '이번 한 번만 논비건 재료를 살까?'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혐오 발언을 하는 고객을 만났을 때도,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갈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 속에서, 저는 늘 '현실과 타협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려요. 사비를 아껴서라도 비건 재료를 사고, 고객과 사이가 틀어지더라도 옳은 말을 하고, 그렇게 업스테어 스튜디오의 가치를 지켜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말 것', 퀴어 프렌들리 비건 타투샵이 추구하는 단 한 가지의 생각입니다."

우디 씨와 업스테어 스튜디오 동료들은 16일 퀴어퍼레이드 현장에 참여해 부스를 열었다. 업스테어의 이름을 내걸고 부스에 참여하는 경험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모두가 안전하고, 자유롭게 타투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란 슬로건 아래, 모두가 "해방감과 자유를 느껴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타투 스티커를 제작했다. 해방과 자유, 퀴어와 타투를 연결하는 키워드다. 퀴어가 '나'이자 '내 몸'이라면, 타투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내 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 자유가 스스로의 몸에 대한 자유로만 국한되지 않길 바랍니다. 혐오 없는 세상에서 모두가 어떤 면에서든 자유롭기를 바라며, 이 자유가 누군가를 착취하는 방식이 아니길 바랍니다."

▲16일 서울광장 업스테어 스튜디오 부스 굿즈 매대 ⓒ프레시안(이상현)

#3. 다시 만난 '퀴퍼' … "그리고 다시 말하는 차별금지법"

"코로나·비대면 시기 동안, 퀴어들이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가?"

16일 서울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찾은 스케디(만 28세, 닉네임) 씨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휩쓴 지난 3년을 이렇게 회상했다. 혐오와 차별은 언제나 공기처럼 존재했지만, 지난 시기는 너무하다 싶었다. "동성애자가 전염병 퍼뜨린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이때다 싶은 혐오 발언이 들끓었다. "확진자가 나왔는데 퀴어라더라 소리에 온 세상 퀴어들이 욕먹을까봐" 누군가는 코로나에 감염돼도 몸을 사렸다.

"그랬던 우리가 3년 만에 다시 거리에 나왔다." 비대면 시기가 끝나고 온라인을 넘어 다시 거리로 나온 '퀴퍼'는, 그래서 그에게 단순한 야외 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숨 막히던 3년을 지낸 당사자들이 "마땅히 생존하여 여기 다시 모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긍심이고, 자긍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그는 말한다. '차별이 없다'는 단 한 가지의 전제조건만으로 공간은 그 공간의 평소 의미를 넘어선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우리 그 자체여도 괜찮다. 물론 1m 옆으로 혐오세력도 함께하는데, 평소엔 누가 혐오세력인지 누가 엘라이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일상을 살지 않나. 존엄과 자유가 확보된 공간에서 마음껏 '나'일수 있음에 퀴퍼에 참여한다."

공간이 열리자 시간도 다시 움직인다. "우리도 여기 존재한다는 걸 세상에 알리는" 시간이다. 8년 전 처음 이 '퀴어대명절'에 참여했던 순간이 생각난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잔뜩 모였고, 1년에 한 번 보기 힘든 사람들도 한데 모였다. 안부를 전하고, 거리를 걷는 일 자체가 "퀴어력을 충전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세상에 "퀴어로서 서울 광장에 앉아 있을 수 있다니." 그리고 "퀴어로서 퀴어들과 서울 시내를 행진할 수 있다니." 스케디 씨는 자신이 퀴퍼에 와서야 "연 1회, 단 하루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만끽"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이렇게 광장에 모인 우리는 다시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묻는 말에 스케디 씨는 지난 5월 국회 논의가 결국 무산된 차별금지법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정당하고, 생사의 문제 앞에 가로막히는" 현실을 단 하루의 축제로 덮을 순 없다. 지난해 3월 세상을 떠난 고 변희수 하사를 잊지 못했다. 그 전후의 수많은 죽음도 마찬가지다.

"퀴어들은 자꾸 죽는다." 죽었고, 죽어가고 있다. 지금 이곳의 시간과 공간을 빌려 그가 다시 말하는 이유다. "우리에겐 차별금지법이 절실하다."

▲스케디 씨가 <프레시안> 요청에 '퀴어 퍼레이드에 온 자신을 표현하는 사진'을 직접 선정했다. ⓒ스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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