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PC가 영화를 망쳐?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아!

[프레시안books]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

"빌어먹을 PC가 영화 다 망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개봉한 영화 <토르 : 러브 앤 썬더>에 대한 한 관람객의 포털 관람평이다.

해당 영화는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리즈로 꼽히는 디즈니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신작이지만, 포털 사이트 네이버 기준 평균 평점 7점 가량을 기록하는 등 대중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영화에 쏟아지는 혹평엔 아주 흥미로운 경향성이 하나 있다. 위의 평가처럼 "PC가 영화를 망치고 있다"란 주장이다.

디즈니가 구현하는, 대중문화 영역 내의 다소 '안전하고 시장주의적인' PC(politically correct, 정치적 올바름)를 비판하는 이 같은 흐름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내에서만 해도 <캡틴마블>, <어벤져스 : 엔드게임>, <이터널스> 등이 영화 전체의 경향성이나 일부 장면을 빌미로 소위 'PC 논란'에 휘말렸다. <스타워즈> 때에는 이러한 논란이 아예 전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번 영화에선 특히 동성애가 '불편한' 지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포털 관람자 평가엔 "너무 대놓고 드러내고 강요하는 동성애 코드"에 "역겨움"이 느껴진다는 평이 달리기도 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동성애 관련 장면은 억지이자 강요이며, 영화를 망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입장에서 조심스럽지만, 동성애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요소라는 이야기엔 의문이 든다.

비판 받는 동성애 장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애'일까, '동성'일까? 쓸 데 없는 로맨스가 문제가 된다면 이야기가 굳이 PC 비판으로 흘러갈 필요가 없을 테니, 아마도 '동성'이 문제가 됐을 테다. 그렇다면 영화에 필요한 동성애는 뭐고 필요 없는 동성애는 뭘까. 아니 애초에 동성애의 필요를 따질 수가 있는 것인가.

2018년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실제 성소수자였던 인물 프레디 머큐리가 주인공임에도 작품 속 동성 간 키스 장면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일부 관람객들이 불편함을 토로한 것은 물론, 2021년 해당 작품을 설 연휴 특선 영화로 내보낸 <SBS>는 동성 간 키스신을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 정체성이 익히 알려져 있었음에도 그의 키스신이 불편한 것 된 이유는 무엇일까?

▲<토르 : 러브 앤 썬더> 포스터 ⓒ네이버 영화

대중문화 속 소수자가 '불편해지는' 선택적인 순간들

백세희 변호사는 책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통찰한다. 어떤 "대상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해 열광하면서 그 기준을 벗어난 모습을 용인하지 못하는 게 혐오의 전형"이며, 동성 간 키스신 등 소위 PC라 일컬어지는 몇몇 장면에 대한 일부 대중의 불편함 또한 그 혐오의 양상이 미디어에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미디어 속 동성애에 대해 다소 선택적으로 분노한다. 저자의 말처럼 대중문화 속 동성애 코드는 "동시대 최고의 PC 격전지"라 할 정도로 상반된 재현 양상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 어떤 모습은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 되고 어떤 모습은 "빌어먹을 PC"가 된다.

가령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구가했던 일본 만화 <원펀맨> 속 게이 캐릭터 '탱글탱글 프리즈너'는 어떤가. 시도 때도 없이 벌거벗은 몸을 자랑하는 그는 남자를 범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교도소 행을 택한 작품 내의 개그 담당 캐릭터다. 전형적인 동성애 희화화(이자 극단적 왜곡) 캐릭터지만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밈이 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더군다나 똑같은 방식의 '개그'는 국내의 여러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버 토요웹툰 <프리드로우>는 203년부터 현재까지 1등 웹툰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작품 속 인물인 장봉남은 격투 능력으로는 최강에 가까운 동성애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주로 상의를 탈의하고 있고 분홍색 팬티를 즐겨입는 고등학생이다."(196쪽)

"남성 동성애자는 웹툰 <참교육> 제 32화와 같이 교도소 샤워장에서 나체 상태로 갑자기 윙크를 해 타인을 당혹케 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웹툰 시장은 여러 차례 동성애 혐오 논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차별적인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197쪽)

작가는 다수 대중에게 유쾌한 것으로 통용되는 이 동성애 희화화를 "적극적 차별행위"라고 지적한다. 반면 국내 드라마 시장에선 "동성애적 묘사를 하면서도 결론에 있어서는 동성애와 거리를 두는 '안전한 방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작가는 MBC <커피프린스 2호점>(2007), SBS <미남이시네요>(2009), KBS2 <성균관 스캔들>(2010) 속 남주인공과 남장 여성 주인공 간의 사랑과 그로 인한 정체성 혼란 상황 등을 그 예로 든다.

작가가 "PC 격전지"라고 이야기하듯, 최근 국내 드라마 시장을 살펴보면 "tvN <마인>(2021)에서는 레즈비언이 극의 주연으로 등장"하거나 OTT 플랫폼에서 "BL(남성 동성애 로맨스물)을 드라마 <시멘틱 에러>로 제작·방영"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다만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대중의 평가와 그 평가를 반영한 듯 '문제 장면'을 삭제해 버리는 방송사의 행태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동성애와 안전하게 거리를 두거나,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조롱하거나, 혹은 '내가 안 보면 그만'인 본격적인 장르물 안에서가 아니라면, 성소수자들 간의 자연스러운 연애 혹은 키스 혹은 섹스 등은 '작품을 망치고 PC를 강요하는' 불편한 것이 되어버리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그야말로 "혐오의 양상"을 반영한 '선택적 분노'인 셈이다.

▲백세희의 책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 ⓒ호밀밭

미디어 속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에게 입체감을 불어넣으려면

백 변호사의 책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들>이 일부 대중의 안티PC 기조를 비판하고 교정하려는 책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국내외 언론, 영화, 드라마, 웹툰 등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를 망라하며 "미디어가 소수자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그리고 그 묘사 방식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그것이 왜 잘못됐는지, 그래서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하는지, 그런 변화가 왜 필요한지를 세세하고 친절하게 조망한다.

"하루아침에 장애가 생겨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커밍아웃하는 식의 경험을 직접 하지 않는 이상, 주류에 속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미디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소수자 문제를 깊게 이해하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주류에 편승하는 미디어는 본디 입체적인 존재인 개별 소수자를 같은 성향의 단일 집단으로 '납작하게' 묘사하는 편리한 방식을 선택하고,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투명하게'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그들은 납작하고 투명한 사람이 되기 일쑤다."(4쪽, 들어가는 말)

독자들은 책 속에서 서울 출신의, 젊고, 한국 사람이며, 남성이고, 비장애인이자 정규직 근로자이자 이성애자인 '아무개' 씨와 함께 미디어 속 서울중심주의, 노인과 아동·청소년 차별, 인종과 젠더 차별, 장애와 비정규직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을 탐구하고 성찰한다. 차별금지법, 장애인 이동권 등 각 영역에 대한 제도적 인프라를 변호사의 시선에서 법리적으로 검토하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현실의 지역은 <리틀 포레스트>가 보여주는 힐링의 공간만이 아니다. 현실의 아동은 육아 예능 속 의젓하거나 귀엽기만 한 아이가 아니라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 동시에 시끄럽고, 억지부리고, 물건을 부수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다. 텔레비전 속 현명하고 귀여운 노인들만이 노인의 전부가 아니며 "철 지난 여적여 프레임만으로 여성의 관계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물론 더 다양해져야 한다. 납작하고 투명하게 소환되는 존재들에게 미디어는 "입체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작가는 콘텐츠 속 비판의 지점들 뿐 아니라, 진일보를 이뤄낸 콘텐츠와 그럼에도 여전한 한계 등을 통찰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탐색한다. 미디어를 넘어 현실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함도 잊지 않는다.

"<청년경찰>에서 범죄 발생지를 역삼동 유흥가로 바꾸고 인신매매와 신체 조직을 적출하는 악인을 강남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다국적 조폭들로 대체하면 어떨까? 자잘한 재미는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는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림동과 조선족 범죄자 설정이 꼭 필요한 건가 싶어 해본 말이다." (73쪽)

"영화가 청소년들을 마냥 사회의 무력한 희생양으로만 묘사하지 않아 성인들의 불편한 감정을 소환해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잔인하고 선정적인 묘사가 많은 점을 곧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평가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진짜 리얼리즘이 되려면 잔혹한 사건 이후, 즉 거리를 떠나 보호받게 된 세진의 생활도 더 큰 비중으로 다뤄야 하는 것 아닐까.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 말이다."(53쪽, 영화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에 대한 서술)

"경비원이 밤이고 낮이고 아파트에 머무르며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존재가 된 이유는 그들이 바로 법률상 감시적·단속적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160쪽, 감시적·단속적 근로자란 '근로기준법 63조에 따라 근로시간 및 휴게, 휴일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적 근로자'를 말한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활동가들이 서울 혜화역에서 지하철 집회를 재개하며 장애인권리예산과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아!"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양성을 '강요'받아 '불편'하다는 이들의 외침처럼, 실제로 변화를 위한 작업은 지지부진하며 어려운 길이다. 미디어가 여지껏 "편리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성을 담보하려는 시도가 어쩌면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내버릴 수도 있다. 'PC가 재미를 망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편리하지 않은 방식을 고수하며 경험하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당장의 재미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에 관해, 미디어 속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 서술하면서, 작가는 당위와 윤리의 차원을 떠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의 차원으로도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가령 노동 전환기를 맞아 정규직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수만 1000만을 넘어가는"(오민규) 시대에 "정규직은 주류, 비정규직은 비주류라는 도식"을 미디어에 그대로 반영해도 되는가?

"급변하는 세상, 노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를 기존의 종속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자극적으로만 묘사한다면 대등한 대화와 타협의 주체로서의 노동자는 자리 잡기 힘들다."(179쪽)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아'라는 밈이 있다. 소위 프로 불편러라 불리는, 사회의 여러 현상마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밈으로 주로 PC에 기반한 지적에 반격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장애인 이동권 투쟁부터 미투 운동까지, 수많은 이들의 노력을 통해 법과 인식을 바꿔가며 열어 젖힌 새로운 시대에 선택적 불편함만을 호소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시대가 변함에도 "편리한 방식"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한 번쯤 되뇌어 볼 일이다. 이제야말로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을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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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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