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와 키신저, 우크라 전쟁 평화협상을 촉구하다

[분석]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략 변화의 신호탄?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호언장담하던 미국 제도권 내부에 미묘한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 엘리트계층의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뉴욕타임스와 대표적 현실주의 이론가인 헨리 키신저가 최근 잇따라 평화협상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월 19일자 사설 "전쟁은 복잡해지는데, 미국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를 통해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 승리"는 불가능하며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 상황에 대한 "현실적 평가"와 미국의 지원의 "한계"를 감안해 평화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사설은 논설위원회(Editorial Board)의 집단 토론을 거쳐 작성되며 이 신문의 공식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사설은 "지난 3월 논설위원회는 미국과 우방국들이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에 보내는 메시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이 목표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러시아와의 전면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미국의 최선의 국익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어려운 결단을 통해서라도 협상에 의한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설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는 것, 즉 2014년 이후 러시아가 장악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은 현실적 목표가 아니다...러시아는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대리전을 통해 러시아에 전면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또한 "바이든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 및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와 대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군사 대결을 위한 무기 및 군사 지원, 그리고 국내정치적 지지 확보에도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 지속의 가능성, 그리고 전쟁 지속에 따른 더 이상의 파괴를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 평가를 통해 (평화협상 개시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특히 사설은 "최근 워싱턴에서 나온 호전적 발언들, 예컨대 푸틴을 "더 이상 권좌에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이나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반드시 "약화시키겠다"는 오스틴 국방 장관의 논평,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폭 지원하겠다는 펠로시 하원의장의 다짐 등은 매우 요란한 지지 선언이 될 수 있겠지만, 협상 촉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서 평화협상 개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지금 이 순간 분쟁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며, 아마도 이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이나 측근들은 전쟁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면서 "미국과 나토는 이미 군사적, 경제적으로 전쟁에 깊이 개입돼 있다. (전쟁 결과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는 미국과 나토를 이 값비싸고 소모적인 전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루블화가 지난 2년래 최고치를 기록하는 러시아경제가 순항하는 한편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요충지 마리우폴을 함락시킨 데 이어 돈바스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등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전쟁 여파로 미국의 실업률과 인플레가 급등하면서 현 상황을 방치할 경우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패배, 나아가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까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은 23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 참패를 안기려는 시도는 유럽의 장기적 안정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 하지 말고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격전 중인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마저 회복하겠다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기보단 협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극복할 수 없는 격변과 긴장을 촉발하지 않으려면 두 달 안에 평화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은 개전 전 상태(status quo ante)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신저는 "(지난 2월) 전쟁 발발 직전의 경계를 넘어 옛 영토를(2014년 3월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 등) 찾으려는 건 러시아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전쟁"이라며 "유럽의 지도자들은 세력균형의 보증인 역할을 해 온 러시아와의 장기적 관계를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우크라이나가 해야 할 일은 유럽의 국경이 아니라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중립적인 완충국가가 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인들이 이미 보여준 영웅적 행동을 지혜와 결합하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사실 이러한 키신저의 제안은 전쟁 발발 이후 세계의 평화운동 세력과 양식 있는 시민, 지식인들이 줄곧 요구해온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주권 수호와 러시아의 안보 우려 해소를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중립국 지위를 보장하는 한편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완충지대화가 불가피하며, 애당초 우크라이나정부가 2015년 2월 체결된 민스크협정을 충실하게 이행했더라면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키신저의 제안에 대해 우크라이나정부는 즉각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은 미국 등 서방의 대대적 군수 및 정보 지원에 의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평화협상의 개시는 미국의 태도 변화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19년 11월 베이징의 경제포럼에 참석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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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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