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유연화의 길,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탄력·선택근로제가 아니라 특별연장근로가 유연화 수단

"게임 같은 거 하나 개발하려고 하면 정말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24 곱하기 7 하면 얼마야, 168이잖아. 주 120시간 일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2주 바짝 하고 그다음에 노는 거지."

아직은 후보가 아니라 전(前) 검찰총장 시절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문제의 '주 120시간' 관련 언급이다. 발언의 내용만 놓고 보면 탄력근로제의 주당 최대 근로시간(현재 주 64시간)을 확 늘리는 방안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윤 대통령은 이 발언이 결코 그런 방안에 대한 지지 의사 표현이 아니라 부인해왔지만 대선 시기 두고두고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런데 탄력근로제의 경우 문재인 정부에서 단위 기간을 확대(기존 3개월→6개월)하는 개악이 이뤄진 바 있다. 탄력근로제를 더 유연화했는데 그렇다면 사장님들은 너도나도 이 제도를 쓰겠다고 달려들었을까?

예상보다는 크게 늘지 않은 탄력근로제 사업장

국회 환경노동위 강은미 의원실(정의당)이 고용노동부에 요청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6월말 현재 탄력근로제 운영 사업장 수는 총 54,158개소로 전년(2020년) 대비 12.8%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의 효력이 발생한 시점이 2021년 4월이므로, 늘어난 사업장 수는 탄력근로제 개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증가율이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간 노동시간 최장한도 52시간 제도 도입을 위해 불가피하다며 문재인 정부가 3~4년 동안 공을 들인 것에 비하면 크게 늘었다고 보긴 어렵다. 경총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로 늘려야만 활용 유인이 생긴다고 반복해서 떠들었던 것에 비춰봐도 그렇다.

오히려 줄어든 선택근로제 활용 사업장

탄력근로제와 함께 개악된 제도가 하나 더 있다. 선택근로제 역시 정산기간이 기존 1개월에서 3개월로 연장되었다. 그럼 이 제도의 활용은 얼마나 늘었을까? 놀라지 마시라. 2021년 6월말 현재 선택근로제 운영 사업장 수는 총 31,203개소로 전년(2020년) 대비 10% 가까이 줄어들었다. 아니, 사장님들이 원해서 개악된 건데 오히려 줄어들다니?

사장님들이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를 원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객관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물론 단위기간·정산기간 연장을 해준다는데 굳이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 제도 활용에 크게 매력을 느끼고 있진 않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동일한 개악을 추진했지만 실제 중소기업들 상대로 설문을 돌려보면 "바뀌면 좋긴 하겠지만 사용하는 건 글쎄요"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걸 활용하려면 정부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신고하는 등 정부의 간섭틀 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늘어난 특별연장근로

그럼 문재인 정부의 법 개악이 노동시간 유연화로 이어지진 않은 것일까? 아니다. 사실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개악을 한 건 상징적 행위일 뿐이었다. 실제로 노동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도록 만든 제도는 따로 있었다. 바로 특별연장근로 제도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거의 활용된 적이 없는 이 제도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특별연장근로 사유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주었다. 이는 노조 동의 필요 없이 현장 노동자 동의만 얻으면 얼마든지 주 64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었기에, 사유가 확대되자 사장님들은 미친 듯이 이 제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그래프만 보더라도 입이 딱 벌어지는 수준 아닌가!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급증한 것처럼 보이지만, 2018~2019년부터 이미 몇 배씩 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나쳐선 안 된다. 코로나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 집권 직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한-일전은 노동시간 유연화 위한 핑계였을 뿐

그럼 대체 어떤 과정과 연유로 특별연장근로가 폭증하게 된 것일까? 그래서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업장 수를 분기별로 나타내 보았다.(아래 그래프) 2018년 하반기에 좀 늘어나긴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갑자기 폭증한 시점은 2019년 3분기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일본 정부가 갑자기 포토리지스트를 비롯한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3개 품목을 콕 집어서 한국으로의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2019년 7월 말에 아래와 같이 특별연장근로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전격 발표하게 된다.

"정부는 일본 수출 제한에 따른 피해가 직접적인 재해·재난은 아니지만, '사회적 재난에 준하는 사고'로 보고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하기로 했다. 특별연장근로 대상은 일본 수출규제 대상 3개 품목(플루오린 플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의 수입처를 제3국으로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실험이나, 아예 국산화하기 위해 필요한 R&D 등 집중노동이 불가피한 경우로 제한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사회적 재난에 준하는 사고'로 본다는 것 자체도 이상하지만 일단은 제쳐놓자. 그렇다면 정말로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실험이나 R&D(연구개발) 관련 업무에서 특별연장근로가 활용된 것일까? 마찬가지로 강은미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로 확인을 해보도록 하자.

2019년 3분기에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업장은 409개에 달했다. 2017년부터 인가받은 사업장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업장 규모이다. 그런데 그해 연구개발을 사유로 특별연장근로를 인가받은 사업장은 단 한 곳도 없었으며 그 다음해인 2020년에는 5개, 지난해(2021년)에는 14개, 올해 4월까지는 고작 1개에 불과했다.

올해 1분기에 이미 작년 절반 돌파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업장 수는 2021년에 6,477개로, 문재인 정부 집권 첫해인 2017년(15개) 대비 무려 430배 이상 폭증했다. 올해 1분기에만 이미 3,070개의 사업장에서 특별연장근로를 인가받았는데, 이는 작년(6,477개)의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올해가 끝날 즈음에는 지난해의 2배로 껑충 뛰어올라 1만 개 이상으로 급증할 것임에 틀림없다.

실험과 R&D에만 허용하겠다는 얘기 역시 전체 업종으로 확대하기 위한 구실과 핑계였을 뿐이다.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업장을 업종별로 구분해서 보면 2021년에 제조업 사업장이 3,649개로 전체 인가 사업장의 절반을 넘어섰다.

2018~2019년에는 제조업 사업장 비중이 불과 6% 안팎에 지나지 않았으나, 코로나19 대유행 직후 특별연장근로 사유를 ▴인명·안전 확보 ▴시설·설비·고장 ▴업무량 폭증으로 확대하며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된 것이다.

강제징용 인정받은 대가가 강제노동?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한 근거는 일제하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었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벌어지자 당시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은 '죽창가'를 SNS에 올렸고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규제를 이겨내기 위해 동원된 수단은 역설적으로 특별연장근로라는 강제노동 조치였다. 일본의 강제징용 사건은 ILO(국제노동기구)에 제소되어 제29호 '강제노동금지' 협약을 위반했다는 결정이 나온 바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일 감정을 활용해 노동시간 유연화의 길을 닦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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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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