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시민의 발이다. 다만 단서 조항이 하나 붙어야만 한다. 지하철은 비장애 시민의 발이다. 이제 곧 여당이 될 당의 젊은 대표는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타기 시위를 벌이는 장애인들에게 비문명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대표의 말에 따르면 장애인들은 합리적 논의와 대화가 아닌 공포와 불편을 야기하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지하철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문이 열리자 한 승객이 "왜 안내 방송을 안 해" 말하면서 화를 내며 내렸다. 주변의 다른 승객들은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곧 그가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정차역 안내 방송이 안 나왔다.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각장애인은 옆 사람에게 묻고서야 내려야 할 곳을 지나서 내린 것이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어쩌다 안 나올 수 있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거대한 장벽이다.
청각 장애를 가진 경우 계속 차내 안내 전광판을 봐야 한다. 안내 전광판은 출입문 위쪽이나 객실 통로 천장 아래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전광판에는 다양한 안내 문구가 삽입된다. 자사 홍보부터 수상한 자에 대한 국정원 신고 독려, 요즘 같으면 코로나 방역, 수익형 광고 같은 내용 들이 삽입된다. 열차가 정차역에 가까워지면 전광판에는 정차할 역이 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입력된 순서에 따라 다른 내용이 표시되면 승강장에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청각장애인은 긴장 한 채로 창밖 승강장과 차내 전광판을 보며 어느 역에 서는지 확인해야 한다. 차내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안내 전광판을 보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이런 어려움을 비장애인들은 알 수가 없다.
휠체어를 끌고 나선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이다. 만약 누군가 집을 나서면서 "엄마! 오늘 지하철 탈 건데요. 살아서 돌아올게요!"라고 말한다면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장애인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는 일이 계속되었다. 더 황당한 일은 장애인을 위해 설치한 시설에서 사고가 계속 됐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공공교통분야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부분은 소위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마당에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하철 역사 안의 장애인 이동시설은 "우리가 이만큼 장애인을 배려해요"라는 생색내기식의 비효율적 리프팅 시스템 위주였다. 그 엽기적인 음악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가 울려퍼지며 "여기 장애인 있어요"라고 사방에 알린다. 아주 천천히 리프트는 휠체어를 싣고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갔다. 무표정하거나 뚱한 얼굴의 공익 요원이나 역무원이 옆에서 따라간다. 그나마 이런 리프트는 규모가 큰 환승역 위주로 설치됐다.
가상의 휠체어 투어 체험을 한 번 해보자. ⓵지하철역에 간다. ②개찰구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출입구를 찾는다.-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③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한다. ④역무원을 호출하고 리프트 앞에서 기다린다. 만약 역무원이 급한 일이 있다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역무원이 오면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리프트에 싣는다. 리프트의 붉은 경광등이 돌며 "즐거운 나의 집"이 울려퍼지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된다. 만약 운이 좋으면,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승강장으로 내려간다.-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⑤승강장에 열차가 도착하면 빠른 동작으로 열차안으로 들어간다. - 이때도 전동차 출입문 양 끝, 그러니까 비 장애인들이 덜 불편해 할 첫 번째나 네 번째 출입문쪽으로 자리잡는다. ⑥객차 안에서는 휠체어로 향하는 시선을 무시한다. ⑦도착역 승강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⑦-①리프트가 있으면 역무원을 호출해 즐거운 음악을 들으며 개찰구로 올라간다. ⑧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를 탄다.-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면 집으로 돌아간다.⑨지상으로 나와 최종 목적지로 간다.
비장애인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인 지하철 타기가 장애인에게는 정글을 헤치는 모험이다. 그것도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장애인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오랜 시간을 이야기 해왔다.
오래전 미 동부의 대중교통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뉴욕 교통공사가 운영하는 시내버스였다. 버스 정류장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있으면 운전기사는 자리에서 나와 장애인의 버스 승차를 돕는다. 장애인이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난 뒤에야 운전기사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운전을 시작한다. 이 과정은 시간이 꽤 걸리는 데도 누구 하나 불평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승객은 없었다. 탑승 거부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한국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도 이어졌다.
뉴욕 웨스트 42번가는 뮤지컬 공연으로 유명한 브로드웨이이다. 저녁 시간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긴 줄이 형성된다. 이때 길게 늘어선 줄을 통과해 제일 먼저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그 보호자이다. 장애인석은 무대와도 가깝게 배치되어 잦은 기립박수 때에도 앞 사람의 등을 볼 일이없다. 미국 사회도 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삶이 각박해지고 있지만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배려는 사회 시스템과 문화 속에 녹아 있다.
한국에서는 소수자들에 대한 작은 정책적 배려를 불공정이고 역차별이라며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줄도 서지 않고 맨 앞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역차별이다. 정상성의 거대한 기둥에 가려진 그늘 속에 존재하는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 여성, 장애인, LGBTQIA,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일이야말로 이 사회를 포용성의 에너지로 활력을 넘치게 하고 화합하게 만드는 일이다.
5년 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문제들은 많이 개선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국 장관을 지키는 집권당의 뚝심은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앞에서는 모래알처럼 무너졌다. 지난 5년간 정부를 운영하면서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자화자찬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좋냐고. 시민들은 문 정부에 등을 돌렸고 대체세력으로 집권한 여당 대표는 장애인을 비 문명인으로 치부하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은 민중들의 체념이 덕지덕지 끼인 말이다. 구관도 끔찍했지만 신관의 난장판을 보며 내뱉는 한숨인것이다.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과 문명사회를 이야기했다. 소수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수에게 불편을 주는 비문명 행위는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적폐요 떼쓰기로 규정됐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1930년대 나치당은 장애인들은 문명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했다. 장애인은 사회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주도 아래 진행된 프로파간다는 공정을 이야기하며 장애인을 공격했다. "장애인 한 명을 먹여 살릴 세금으로 4인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공정의 논리로 들어가면 장애인을 배제하고 소위 정상인에게 세금을 쓰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을 장애인에게 낭비하는 것은 반국가적이며 비애국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장애인에 대한 안락사가 추진됐다. 또 사회를 정화한다며 부적격자들을 골라냈다.
지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 유전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겠다며 의사의 판결만으로 수십만 여성들에 대한 불임시술이 진행됐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장애인 강제 안락사 명령서에 서명한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가스실로 내몰린 사람들의 줄은 점점 길어졌다.
지금 한국에서 발화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발언들은 비문명 세계로 역행하는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야만적인 발언이 민주주의와 공익, 공정의 탈을 쓰고 마음껏 발산되고 있다. 정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약자들의 목소리를 불쾌해한다. 저의나 배후를 의심하며 진영논리로 갈라친다. 정권의 막이 오르면 문명의 이름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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