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과 올리가르히 '검은 돈', 수십년간 서방을 길들였다"

러시아의 '검은 돈', 미·영의 금융투기자본, 우크라 전쟁의 복잡한 함수 관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주변 신흥재벌(올리가르히)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제재는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내세운 대응책 중 하나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실에 따르면, 구소련 붕괴 이후 수십년 동안 정치권과 유착관계로 조성된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검은 돈(dark money)'은 1조 달러(약 1238조 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올리가르히들은 이 돈을 '명목 회사'(Shell company, 자금을 보유하고 다른 기업체의 금융 거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퍼 컴퍼니)들에 쪼개 숨겨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푸틴과 그 측근들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이 '검은 돈'의 규모, 소유자, 조성과 은닉 과정 등이 새롭게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애틀랜틱 카운실의 2020년 보고서는 러시아의 '검은 돈'과 관련해 "푸틴과 측근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다크 머니의 4분의 1이 간첩, 테러, 산업 스파이, 뇌물, 정치 공작, 허위 정보 등의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조종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싱크탱크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은 이 돈이 푸틴과 측근들에 의해 "국가 예산에서 훔치고, 기업들로부터 갈취하고, 수익성이 있는 기업들에 대한 전면적인 압류 등"의 과정을 통해 조성됐다고 분석했다.

올리가르히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한 소수의 엘리트 기득권들 의한 정치(과두정치)를 뜻하는 '올리가키(oligarch)'의 러시아어로, 소련 붕괴 이후 부를 구축한 재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1세대 올리가르히들은 구소련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민영화를 통해 부를 구축한 반면, 푸틴 집권 이후 부상한 2세대 올리가르히는 푸틴과 친분을 활용해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면서 갑부가 됐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19명과 그들의 가족과 측근 47명에 대해 비자 제한과 자산 동결 등 제재를 단행했다. 올리가르히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한 경제적 자원을 제공했다고 보고, 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미 법무부는 전담 태스크포스를 구성했고, 유럽연합도 제재 대상을 계속 늘려가면서 이들의 계좌 동결, 호화 저택, 요트 등 일부 재산에 대한 압류 등 제재 방안을 추가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 주변의 '검은 돈'이 이미 서방에 다양한 경로로 유입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선전' 이상으로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 키프로스 등 조세회피처로 흘러간 '검은 돈'...바이든 지역구 델라웨어 등도 '돈세탁 천국'

푸틴과 올리가르히의 '검은 돈' 중 상당 금액이 대표적인 조세회피처인 키프로스 등으로 흘러갔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 애틀랜틱 카운슬은 2013년에만 360억 달러가 키프로스로 유입됐다고 밝혔다.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케이먼 군도 등도 러시아 '검은 돈'의 단골 피난처이다. 이런 돈은 뉴욕과 런던의 금융자본으로 유입돼 투자되고 수익을 거두는 과정을 통해 돈세탁 된다. 올리가리히들은 세계 최고의 변호사, 은행가, 로비스트들을 고용해 각종 법과 제도적 장벽을 뛰어넘어 왔다. 

영국 코미디언 톰 워커가 연기하는 정치평론가 조나선 파이(톰 워커의 '부캐')는 지난 11일 <뉴욕타임스>  동영상 칼럼("푸틴은 어떻게 런던의 탐욕을 무기화 했나")에서 러시아 올리가르히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에 대해 폭로했다. 그는 "영국의 8만7000채의 집을 익명의 백만장자가 소유한 역외회사(조세회피처에 세워진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며 "이중 15억 파운드(2조5000억 원)가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세회피처를 통해 전 세계의 부정부패와 연관된 은닉 재산을 유입시켜 금융산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영국에 유일하게 남은 산업"이라며 "이 산업마저 사라진다면 영국은 프랑스의 차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 ICIJ)에서 전세계 150개 언론사 기자 600여 명과 공동 작업해 2021년 보도한 '판도라 페이퍼스'는 "마피아부터 국왕까지 조세도피처들의 주요 고객들"의 존재와 이들의 부정한 재산들을 깨끗이 세탁시켜주는 서방 시스템의 '협업'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여기에서도 러시아 올리가리히들의 존재와 영향력이 확인됐다.

<가디언>은 '판도라 페이퍼스' 분석 결과를 토대로 “각국 정부 수반과 관료, 재벌, 중동 군주 등이 역외기업을 통해 익명으로 사들인 영국 부동산의 총액이 1700억 파운드(약 274조7100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외국인이 거액을 투자하면 거주권을 주는 '황금 비자' 제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영국, 몰타 등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이 제도를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키프로스와 불가리아는 2020년에 '황금 비자' 제도를 페지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델라웨어,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 네바다 등도 손쉽게 역외회사를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돈세탁의 천국'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델라웨어주 상원의원 출신이다. 바이든도 델라웨어주에 '명목회사'를 설립하는 방법을 활용해 재산을 불렸다.

조나선 파이는 "푸틴과 그 측근들에 대한 경제제재로 영국도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명목회사 등을 통해 러시아의 검은 돈이 유입된 다른 서방국가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며 "푸틴은 지난 20년간 우리들의 탐욕을 이용해 위협을 무력화 시켰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등의 보수 정치권도 푸틴과 올리가르히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판도라 페이퍼스'는 빅토르 페도토프라는 러시아 출신 사업가가 영국 기반 업체와 측근을 통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 보수당 의원 30여 명에게 140만 파운드(약 22억6000만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건넸다고 밝혔다. 

푸틴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2016년과 2020년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 중 일부는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된 특검 수사를 통해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로저 스톤, 마이클 플린 등 트럼프의 핵심 측근들은 러시아의 대선 개입 의혹과 관련해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트럼프 정권 말기 사면됐다.  트럼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천재적"이라고 칭찬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 평화협상에도 등장하는 올리가르히...러시아 강경파 '독극물 테러' 의혹

대표적인 올리가르히로 꼽히는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제재 명단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바이든에 직접 요청한 것도 이런 복잡한 속내를 보여준다.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구단 첼시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젤렌스키는 푸틴과 가까운 아브라모비치가 러시아와 휴전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에 이런 요청을 했고, 초기 제재 명단에 포함됐던 아브라모비치가 이후에는 제외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가 지난 23일 보도했다.

한편, 아브라모비치를 포함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평화협상에 참여했던 협상단 일부가 독극물 중독 의심 증상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28일 소식통을 인용해 아브라모비치와 우크라이나 측 협상단 최소 2명이 이달 초 키이우에서 비공개 평화협상을 진행하다가 유사한 독극물 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 언론은 이들이 눈을 찌르는 듯한 통증과 눈물, 얼굴과 손의 피부가 벗겨지는 등 증상을 보였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면서 종전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 강경파들이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밝혔다. 크렘린은 이에 대한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협상과는 별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9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평화협상을 가질 예정이다. 젤렌스키는 지난 27일 러시아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화상 인터뷰에서 러시아 및 국제사회가 안전 보장을 하면 러시아가 요구해온 우크라이나 중립국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측근들의 '검은 돈'에 서방이 과연 '철퇴'를 내릴 수 있을까.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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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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