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그림자에 길게 남은 '상처'를 돌아보다

[진실화해위 기고] 1960년 3월 15일 그날의 함성을 따라, 민주화거리를 걷다

마산역 광장에 내리쬐는 한낮 햇볕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역을 나오자마자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가 보인다. 3·15의 고장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지난 2월 23일, 62년 전 '그날'의 길을 직접 걷기로 한 날이었다.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60년 3월 15일 아침, 시민들이 민주당 마산시당부로 모여들었다. 3인조·5인조·9인조 공개투표, 4할 사전투표, 야당 참관인 납치·폭행 등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들이었다. 오전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부는 선거부인공고를 내걸었고, 시민들은 불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했다.

▲ 3·15의거 발원지 동판. 당시 민주당 마산시당부 자리다. ⓒ김일우

시민들의 함성이 맨 처음 터져나온 자리에는 지금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오동동 165-7)이 들어섰다. 그날의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일정도 여기서 시작된다. 지난해 10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문을 연 기념관은 △깊은 울림 △강건한 울림 △힘있는 울림을 주제로 다양한 시청각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지난해 10월 26일 문을 연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김일우

시위는 해가 지도록 격렬하게 이어졌다. 비극은 오후 8시 10분경 총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경찰은 시민들을 지켜야 할 총으로, 시민들을 겨눈 것이다. 김삼웅·김용실·김영준·김영호·김효덕·오성원·전의규·강융기(중상 후 투병 중 사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와 구속자는 250여 명에 이르렀다.

▲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에 전시된 민주열사 영정. ⓒ김일우

그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비석이 있다. 옛 북마산파출소 자리 가까이에 있는 '3·15의거 기념비'(상남동 104-2)는 경찰의 총격으로 윗부분이 깨진 돌로 만들었다. 북마산파출소 인근에 살던 한학자 신동식 옹이 3·15의거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과 한시를 새겨 1960년 겨울 비석을 세운 것이다.

“한 조각의 돌을 길가에 세워/ 의로운 역사를 새겨 두노니/ 이는 길이 길이 빛날 것이다/ 시민들의 노함은 막기 어려우며/ 뜨겁게 흘린 피는 역사에 남으리라.”(3·15의거 기념비 비문 가운데)

▲ 옛 북마산파출소 자리 가까이에 있는 3·15의거 기념비. 총격에 깨진 돌로 만들었다. ⓒ김일우

▲ 3·15의거 기념비 비문. “뜨겁게 흘린 피는 역사에 남으리라.” ⓒ김일우

총격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걷는 도중에, '3·15의거 기념탑'(서성동 84-325)을 볼 수 있었다. 1962년 9월 20일 준공된 기념탑은 높이 12미터 규모의 삼각 석탑이다. 항쟁의 주역인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과 부조가 인상적이었다. 2016년 창원시는 3·15의거 기념탑을 창원시 근대건축물 6호로 지정했다.

▲ 1962년 준공된 3·15의거 기념탑. 창원시 근대건축물 6호로 지정됐다. ⓒ김일우

3·15의거 기념탑에서 불과 1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무학초등학교 총격 담장'(자산동 120-5)이 있다. 1960년 3월 15일 밤, 경찰은 시청 진출을 시도하는 시민들을 무학초등학교 방향으로 밀어붙이며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가했다. 담장에 남아 있는 총격 흔적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내 머리나 복부 정도의 높이다. 해산을 목적으로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한 것이 아니었다. 직접 시민들의 목숨을 노렸다는 끔찍한 증거다.

▲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학초등학교 총격 담장. 2014년 복원했다. ⓒ김일우

그날 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약 한 달이 지난 4월 11일,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주검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김주열. 격분한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2차 의거였다. 경찰은 다시 총을 쐈다. 김영길 열사가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학생과 시민들은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마산 시민들의 의기는 전 국민적인 분노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마산에서는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희생자, 김종술·김평도 열사가 더해졌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마지막 목적지인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신포동1가 47-6)에 도착했다. 동판과 조형물, 추모의 벽, 그리고 지난해 세운 동상까지 볼 수 있었다. 이곳은 2011년 경상남도기념물 제277호로 지정됐다.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2011년 경상남도기념물 제277호로 지정됐다. ⓒ김일우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에 지난해 세운 동상. ⓒ김일우

창원시는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에서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까지 약 2.4킬로미터 구간을 '민주화거리'로 정해뒀다. 이날 우리가 걸은 길보다는 약간 짧은 거리. 성인 걸음으로 한두 시간이면 답사가 가능하다.

지난 1월 21일 '3·15의거 참여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3·15의거 진상규명 신청 접수와 조사를 시작했다. 탐방을 마치며, 3·15의거 기념탑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지는 해가 만드는 긴 그림자가 탑의 뒤에 드리워져 있었다. 62년 전 마산 시민들의 용기는 혁명의 도화선이 돼 역사를 바꿨다. 그리고 이제, 혁명의 뒷모습에 길게 남아 있는 그림지와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았다.

▲ 3·15의거 기념탑 동상의 뒷모습. 혁명의 밝은 빛 뒤에 남은 그림자를 돌아봐야 할 때다. ⓒ김일우

※ 이 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5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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