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문맹'의 대선, 그 두려움과 각성의 갈래길에서

[프레시안 books] 녹색평론 서문집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1991년 겨울, <녹색평론> 창간 서문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류사에 유례없는 전면적 위기'에 직면하고도 이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환경재앙이 기술주의적 접근법으로 해결되리라는 '어리석은 믿음' 앞에, 김종철 전 발행인이 던진 버거운 물음이다.

이 짧은 메시지가 우리 생태사상사에 기념비로 회자되는 까닭은 묵시록적 현실에 대한 묵종이나 체념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절대가치로 아무런 의심 없이 내면화한 산업체제, 집단적으로 경제성장을 갈망하는 세상에 그는 녹색평론을 진지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향해 '희망을 위한 싸움'을 부단히 일깨우려 했다.

김 전 발행인의 권두언이 담긴 녹색평론은 2020년 5~6월호(172호)가 마지막이다. 이 글의 마무리 문장은 이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점점 더 난폭하게 자연 생태계를 공격‧유린해온 인간사회에 결국 자연이 복수를 결심한 것으로 보이는' 전염병 창궐을 목도하며 그가 남긴 마지막 호소 역시 '문명의 대전환'이다. 김 전 발행인은 이 글을 남긴 뒤(2020년 6월 25일) 타계했다.

창간호부터 172호까지 김 전 발행인의 녹색평론 권두언들을 모은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녹색평론 100호를 맞아 냈던 2008년 초판을 1부로 다듬고, 2009년 이후에 실린 그의 녹색평론 서문들 가운데 27편을 추려 2부로 엮었다. '근대의 어둠' 한가운데서 희망을 위해 싸운 한 사상가의 30년 발자취다.

'지난 17년간 본질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거나 혹은 질적으로 더 열악해졌다'고 했던 초판 서문은 지금 더 유효해 보인다. '글 하나하나를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썼다'던 그의 초판 고백도 이후 서문들에서 허투루지 않게 이어진다.

▲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 서문집(개정증보판) ⓒ녹색평론사

'생태적 문맹' 대선, 우리 선택은?

2009년 이후 글들에선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회의감과 정치 변화를 위한 실천적 의지가 확연해진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촛불 집회 등 국내외 격변을 거치며 정치와 경제구조의 근본에 관한 김 전 발행인의 성찰은 새겨볼만하다.

마치 기후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 절정으로 치닫는 중에, '생태적 문맹자'들이 후보로 나와 기이한 쟁투를 벌이는 지금의 대선을 비추는 거울 같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절대적 궁핍상태를 제외한다면 어디까지나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빈부격차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정치적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107호. 2009년 7~8월)

'오늘날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은 좁은 이기심과 근시안적 이해관계에 갇힌 좀비정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130호. 2013년 5~6월)

'기후변화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 노력과 해법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 이상, 무엇보다 '정치'를 바로잡는 게 급선무라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진정한 위기는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라고 지적했던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163호. 2018년 11~12월)

'선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기득권층 내부의 싸움, 즉 사회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끼리의 권력쟁탈 게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기득권층의 영구적 권력 향유를 보장하는 합법적 매커니즘'인 것이다.'(171호. 2020년 3~4월)

이런 태도는 김 전 발행인이 일찍이 '진정한 민주주의는 오직 하나, 풀뿌리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것, 그 밖의 온갖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만 위장된 엘리트 권력체제'(8호. 1993년 1~2월)라며 권력정치에 드러낸 비판적 시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인상비평에 기운 초기보다 한걸음 나아가 김 전 발행인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국 정치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2015년 3~4월)면서 비례대표제 확대를 비롯해, 숙의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시민의회 구성을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적극 제안한다.

익숙한 정치문법으로는 생경하고 학계의 반박도 있으나, '몇몇 소수 엘리트들이 마음대로 내린 결정을 따르다가 망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그의 말이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더 피부에 와 닿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대선을 거치며 누구나 들어본 용어가 된 기본소득에 관한 김 전 발행인의 선견도 돋보인다.

'지금 비록 일각에서의 일이지만 기본소득에 관련한 논의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를 보면,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머잖아 이것은 '무상급식' 못지않게 익숙한 대중적 화제가 되고 나아가서 선거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이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132호. 2013년 9~10월)

10년 전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볼품없게 쪼그라들었어도, 유력 대선후보의 10대 공약에 기본소득이 들어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고용안정화에 따른 세수 증가에 바탕을 둔 그 후보의 기본소득은 어쩌면 김 전 발행인이 가장 경계했던 '낡은 공식'까지 끌어들인 탓에 진정성과 실현가능성에 의심을 산다.

김 전 발행인이 맹목적 경제성장에서 벗어나 산업자본주의 이전의 순환경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전환의 통로로 봤던 기본소득은 '금융통화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한다면, 세금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민배당'에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마련될 수 있다'는 클리퍼드 더글러스의 이론에 기초해 있다.

소득 없이도 인간적 품위를 지키고 살수 있다면, 생태위기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결여된 경제성장론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같은 이유로 김 전 발행인은 '국가의 계속적인 세수 증가를 전제로 해서만 실현가능한 시스템'이라고 정의한 복지국가론에도 매우 비판적이다.

'기후변화 시대라는 전대미문의 비상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체념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런 허무주의적인 태도는 가장 불경스러운 교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163호. 2018년 11~12월)

'만일 민주정치의 공고화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혼돈상태에 빠져들 것이며, 결국은 파시즘적 강권통치가 등장하는 악몽을 겪게 될지 모른다.'(165호. 2019년 3~4월)

자연의 반격이 가시화된 현재, '지금 우리가 직면한 모든 재난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죽음에 관계되어 있다'는 김 전 발행인의 암울한 전망은 두려움과 각성을 동시에 부른다. 우린 어느 쪽인가?

▲ 녹색평론 김종철 전 발행인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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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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