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씨가 쏘아올린 작은 '멸공'과 실패한 대선주자의 '밈'

[기자의 눈] '청년 정치'를 주문했더니 '청년 연기'하는 아재가?

신세계 그룹 부회장 정용진 씨가 '멸공 챌린지'를 혼자 벌였을 때는 그냥 해프닝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야권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이 '멸공'의 밈으로 걸어들어온 것은 더이상 해프닝이 아니게 됐다.

'멸공(滅共)', 전쟁의 언어다. 과거 이념에 따른 체제 갈등이 극심하던 냉전 시기에 한국 뿐 아니라 소위 '자유 진영'에서 자주 외쳤던 말이다. 독재 체재의 한국에서는 국가의 병영화에 따른 상징으로 군에서 뿐 아니라 국민적 정신 무장을 위해 전사회적으로 사용됐다.

멸공은 공산주의를 멸(滅)하자는 것이다. '승공(勝共)'과는 조금 다르다. '승공'은 공산주의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자는 의미가 강한(물론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그리고 한국의 군대에선 승공도 멸공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반면, 멸은 죽이고 없애자는 뜻이다. 멸공은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멸공은 '공산주의 진영'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용진 씨가 아무리 시진핑 사진이 담긴 기사 공유를 멈추고, "중국을 향한 게 아니라 윗 동네(북한)"을 향한 말이라고 강변해 봐야 소용 없다. 단어는 발화자가 내뱉는 순간 발화자의 의도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간다. 일례로 홍콩의 외신은 '멸공'을 'Crush North Korea'로 뜻풀이 하지 않고 'Crush Commies'로 뜻풀이 해서 기사를 썼다. '공산주의자를 처부수자' 정도인데, 스포츠 팬들이 상대팀을 위협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Crush'란 단어보다는, 파괴하고 말살하다는 의미인 'Destroy'가 '멸공'의 '멸'의 뉘앙스에 더 부합한다. '멸공'이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매카시즘을 거치며 '자유주의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라 결론을 내렸고, '코미', '콩' 등의 말은 상대의 생각을 혐오하는 말인데다 인종차별적 요소까지 있어 널리 사용되지도 않는다.

단어 뜻풀이 게임을 하자는 게 아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정도까지는 농담이거나,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런데 거기에 정용진 씨가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의 단어(?) 쯤으로 생각한 '멸공'이란 표현을 썼을 때는, '멸'의 대상이 될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 지 생각해 봤어야 했다. 멸공'의 구호 아래 얼마나 무고한 대한민국 시민들이 간첩으로 몰려 사망했는지까지 말하는 것은 입이 아픈 일이긴 하나, 누구도 그걸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뭐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라고 할 수도 있다. '바이트 낭비' 칼럼이 될 수도 있겠다. 하긴 정용진 씨야 개인 사업자이고, 자기 사업이 타격을 입든 말든 자신의 소신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 위한 용도였으니까 거기까진 문제없다. 관련 사업 주식 시장이 흔들리든, '오너 리스크'가 어찌됐든 본인 책임이다. 중국 공산당을 멸할지, 조선 공산당을 멸할지, 일본 공산당을 멸할지, 베트남 공산당을 멸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떤 공산당을 죽이고 없앨 것'이라고 말한다 한들 그 역시 정용진 씨 개인의 자유니까. 

그러나 정치권에서 이 단어가 유통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야권의 대선 후보와 유력 정치인들이 앞다퉈 '멸공'을 말하며 마치 '표현의 자유'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는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도 포장지는 '표현의 자유'라고 두른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을, 그것도 '셀렙'이나 '유력자'가, 공개된 공간에서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일 리 없다. 이를테면 '멸공'은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내포한다. 그것은 '적'이고 '죽여 없애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내일 한국에 공산당이 생겼을 때, 그들 면전에서 '멸공'을 외친다는 것은, 정용진 씨나 윤석열 후보가 그토록 주장하는 '자유' 안에서 용인되지 못한다. 공산주의자를 멸할 자유는 있지만, 공산주의자도 '멸' 당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죽인다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용납되지 못한다.

윤석열 후보의 해명도 불성실하다. 그는 단순히 '멸치와 콩을 샀을 뿐'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는데, 그에게는 이미 이런 저런 전력들이 있다. '전두환 옹호' 발언을 하고 사과한 후에 개에게 사과를 건네는 사진을 올려 홍역을 치른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 대한민국의 '언어의 프로토콜' 세계에서 윤석열 식 '문법'이 '개 사과' 수준이라는 것을 많은 유권자들이 이미 학습했다. 사람들에게 '해석하라'고 메타포를 쥐어 준 후 '멸치와 콩' 운운하는 것은 가벼운 정치인들이나 철부지 사업가들은 할 수 있겠지만 대선 후보가 할 일은 아니다.  

"'인터넷 밈'에 불과할 뿐인데 왜 과잉반응이냐"는 말도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멸공'이라는 말이 인터넷을 달궜던 때가 또 있었다. 2014년 11월 군 입대 비리를 저질렀던 MC몽이라는 가수가 '내가 그리웠니'라는 신곡을 내자, 누리꾼들이 군가인 '멸공의 횃불'을 멜론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려 놓았던 적이 있다. 그들이 '멸공'을 활용하는 방법은 이런 식이다. 군 입대를 기피한 사람에게 '멸공의 횃불'이라는 군가를 선물한다. 그럴 때 '멸공'은 '공산주의자를 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징병제 코리아'를 강조하는 맥락 위에서 제 의미를 찾는다. 병역을 마치지 않으면 멸공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느냐며 정용진 씨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멸공'은 이처럼 병역 기피자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군 면제 비판에 '멸공'을 자유자재껏 활용하겠따는데 왜 그들에게는 '멸공'을 자유자재껏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가. '내가 말한 멸공'만 진짜 '멸공 챌린지'는 아니다. 절대 말의 무게를 가볍게 하지 말고, 말의 맥락을 자의적으로 거세하려 들지 말지어다.

'멸공 밈' 사건을 계기로, 최근 윤석열 후보의 '선거 전략'에 의구심이 가는 걸 멈출 수 없다. 아무래도 국민의힘 '청년 보좌역'들의 요구를 필터링하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윤석열 후보는 "한국 청년들이 중국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중국을 좋아하는 청년들은 어리둥절해 진다. '어떤 면'의 중국은 좋고 '어떤 면'의 중국은 싫다고 생각하는 청년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청년들이 중국의 이러이러한 면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고, 무작정 중국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여성가족부 해체' 발언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후보 측이 '여성가족부를 쇄신하지'고 하지 않고 '여성가족부를 박살내자'고 한 것도 '날 것의 청년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이유인 것 같은데 맥락이 없다. 앞뒤 자르고 '한줄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디어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서인 것 같지만, 마치 '즉흥적'이고 '맥락 없는' 것이 '미덕'인양 선거 운동을 벌이는 것은 별로 좋은 효과를 내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이 '2030청년들의 스타일'이라는 오해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 

정치인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 대해 귀를 열어 놓아야 하고, 자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어떤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지 유권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59년생 '아재'에게 '청년 정치'를 주문했더니, 청년들과 공감대를 찾는 '장년'의 후보가 아니라, '청년 연기'를 하는 '아재'가 돼 버렸다.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용진 씨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멸공' 이슈가 홍콩 언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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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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