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날 때는 탄수화물 섭취 대신 막힌 속부터 풀자

[그녀들의 맛있는 한의학] 8화. 양푼 비빔밥과 아이스크림

"감정이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유독 화가 가장 심하다. 화가 나면 간의 기운이 성해져서 비장을 억압한다. 비장이 상하면 네 개의 장(간장, 폐, 심장, 신장)이 모두 상한다.

七情傷人 惟怒爲甚 盖怒則肝木 便克脾土 脾傷則四藏俱傷矣" - 동의보감 내경편 권1 신神 중에서 -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한밤중에 불 꺼진 부엌에서 양푼에 밥을 비비거나,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먹는 여성이 등장한다. 시댁의 구박과 남편의 무시,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사회와 직장에서의 차별 등이 이들을 냉장고 앞으로 내몬다. 분노에 차서 입 주변에 묻혀가며 밥과 아이스크림을 먹던 여인의 숟가락질은 갑작스레 켜진 전등불이나 또르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끝난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지도 화를 풀지도 못한 채 말이다.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화'는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외부의 상황이 불만족스러우면 스트레스를 받고, 이것은 신경계의 긴장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는 긴장을 통해 외부상황에 좀 더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통해 상황을 해결한다.

문제는 이 '화'가 지속되는 경우다. 스트레스 강도가 강해도 일시적이고 잘 해결 된다면 전체적인 건강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강도는 약하더라도 장기간 지속되는 스트레스는 우리를 늘 긴장하고 화가 난 상태로 만든다. 작은 일에도 과하게 반응하거나, 매사 짜증이 나고, 만성적인 소화불량과 불면에 시달리고, 항상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늘 화가 난 상태일지도 모른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교감신경이 과항진된 자율신경계의 불균형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는 화를 한의학은 간에 배속시켰다. 간은 혈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소설疎泄’이라고 표현하는 소통의 기능이다. 옛 사람들은 혈액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건, 감정이나 생각과 같은 무형의 것이건 간에 막히지 않고 잘 흘러야 한다고 봤고, 그 기능을 간으로 표현되는 시스템에 포함시켰다. 이 흐름이 막히거나 넘치면 병이 생기는데, 이로 인한 대표격이 화병과 중풍이다.

한밤중에 양푼에 밥을 비벼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먹는 것은 풀리지 않은 화의 표출이다. 탄수화물과 당의 섭취로 인한 혈당 상승이 주는 기분 고조, 포만감이 주는 안도감, 그리고 이것 정도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만족감으로 표출하지 못한 화를 달랜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적인 전략이 아님은 도중에 혹은 다 먹고 나서 스스로 알게 되고, 가끔은 우울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내지만, 개인적 경험으로는 위와 같은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에너지(힘)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도 인식하고 있고 답도 알고 있지만, 답을 실행하거나 행동을 지속할 힘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있던 에너지마저 소진하면 침울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화병에서 시작해서 우울증이 되거나 갑상선 기능항진증이 기능저하증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생각된다. 위의 동의보감 구절은 화에 의해 비장으로 대표되는 소화시스템의 기능이 떨어지면 에너지 공급이 줄고, 이것이 장기화되면 전신의 기능이 저하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즉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밥과 아이스크림, 때론 단것을 많이 먹는 것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나 보상보다는 소진한 힘을 채우려는 고독한 내적 투쟁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잠시의 평안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화를 풀어낼 수는 없다.

막힌 것은 소통하게 하고 몸과 정신의 뿌리가 되는 힘을 키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밤중 혹은 퇴근 후에 냉장고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맛밤. ⓒ고은정

그녀들을 위한 레시피 : 맛밤 

누구나 크고 작은 화를 내고 살지만 괜한 화를 내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화가 나는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지만 끓어오르는 화를 식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가 많을 뿐이라 생각한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분명하지만 그 대상이 너무 크거나 먼 거리에 있어 발만 동동 구를 때도 많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화를 묻어두고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 묻어둔 화가 쌓이면 나중에 내 안에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화병이라고 말한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느낌은 마음에서 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내 몸으로 온전히 전해진다. 불이 나면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재만 남는 것처럼 인체도 에너지가 소진되어 의욕이 떨어지고, 결국에는 전신의 기능이 저하된다고 하니 이보다 무서운 일은 없는 것 같다. 화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화가 날 때면 움직임을 최소로 하고 소리도 죽인 채로 머릿속을 비우고 아주 천천히 주변을 정리한다. 책상을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주방을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손이 아주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든다. 손이 바쁘고 몸이 고달파질수록 화로 들끓던 머리는 맑아지고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김치냉장고를 뒤져 밤을 꺼내서 겉껍질을 벗기고 손이 아픈 것을 참아가며 속껍질도 벗겼다. 그런 다음 과도를 이용해 밤의 모양을 다시 잡고 물을 넉넉히 부어 익혔다. 밤이 어느 정도 익은 후 간장과 조청, 설탕을 넣고 약한 불에서 다시 오래 조렸다. 밤이 폭 익고 간장의 색과 조청의 색을 입어 갈색이 된 후 윤기를 더해 반짝이기까지 한다. 완성된 맛밤을 한 알 한 알 천천히 예쁜 그릇을 골라 담고 식탁에 앉는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밤을 입에 넣으니 한숨이 사라지고 절로 웃음이 나온다.

담당자의 실수로 산지시장에도 없는 철 이른 식재료를 구하러 다니느라 하루를 다 보내고 돌아온 내 안의 화를 달래기에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맛이다.

<재료>

깐 밤 400g, 물 3컵, 간장 1큰술, 조청 2큰술, 설탕 2큰술

<만드는 법>

1. 깐 밤을 냄비에 담고 물을 붓고 끓인다.

2. 밤이 끓는 동안 생기는 거품을 걷어낸다.

3. 밤이 반 정도 익고 물도 반 이상 줄어들면 간장과 조청, 설탕을 넣는다.

4. 밤이 다시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가끔 뒤적인다.

5. 밤에 간장의 색이 들고 조청과 설탕이 졸아들면 불을 끄고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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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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