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이용하는 치졸한 정치, 이제는 멈추자"

[2022 대선 플랜A] ⑤ 더불어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아니다, 틀을 거부한 새로운 대선을 만들자

2022년 대선을 앞둔 지금, 거대 양당의 행태는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정치판에선 소외된 시민을 대변할 정치인이 출현할 수 없다. 거대 양당의 기득권에 맞서 다당제와 연합정치를 추구해온 심상정(정의당)·안철수(국민의당), 그리고 김동연(새로운물결) 등 '제3지대' 대선 주자에게도 가혹하긴 마찬가지다. 거대 양당을 벗어난 '정치'는 꽉 막혀있는 게 현실이다.

변화의 문을 열고자 8명의 청년이 모였다. '대선전환추진위원회'(☞바로가기)는 거대 양당이 세운 성벽 너머 더 많은 시민을 위한 국민적 공론장을 만들고자 한다.

대통령을 만드는 건 거대 양당과 기성 정치인들이 아닌 이 글을 보는 바로 당신이다. 정치는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들을 위해 존재한다. 나와 당신, 그리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목소리를 낼 새로운 후보가 나타나길 바라며. 강요된 양자택일을 깨는 우리의 제안, 플랜A를 시작한다. 편집자.

① 대선이 걱정스러운 여러분께, "강요된 양자택일 말고 다자구도를" (☞바로가기)

② 다가오는 대선, 다시한번 연대해야 하는 이유 (☞바로가기)

③ "청년은 더 이상 특권층에 투표할 수 없습니다" (☞바로가기)

④ "'누가 되든 절망'이라 할지라도,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바로가기)

▲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규탄하는 '팀 해일'이 지난 8월 전국 순회 시위를 마치고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여성혐오에 편승한 정치를 규탄하는 1인 시위를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말하길, "현명한 리더십이 결여돼있을 때 민주주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했다. 아마 그가 지금의 한국를 본다면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을, 정치권이 가짜뉴스와 선동으로 진영 다툼의 도구로 악용하는 포퓰리즘 정치. '중우정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 문제가 터져나왔다. 중간층 없이 극단층이 기세를 부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구독하는 유튜브채널과 소셜미디어로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며 확증편향에 빠진다. 이 혼란한 시대에 정치권과 언론은 숟가락을 얹는다. 민주주의가 국민을 대변하기는커녕 대중을 이용하는 정권다툼의 도구가 된 상황 속에서, 중우정치로 변모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현명한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2022년 대통령 선거의 모습은 어떤가. 화천대유와 고발사주, 둘 중에 무엇에 투표해야 하나. 적폐인 줄 알면서도 '버리는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면 그것은 유권자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 잘못된 선택인 줄 알면서도 결국 '둘 중 하나'만을 고민해야 한다면, 이게 반복되고 있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촘촘히 판을 짜놓은 게 아닐까. 지금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구조인가.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이제 다음 단계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양당정치의 틀을 깨는 것은 필수적이다. 기득권 양당의 함정이 아닌 국민이 이끄는 정치의 판으로 새롭게 판을 뒤엎기 위해선, 지금 바로 당신의 액션이 필요하다.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 민주주의의 한계

민주주의, Democracy의 어원은 민중을 의미하는 Demos와 권력, 지배를 의미하는 Kratos가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 2조 제 1항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시민의 자유가 존중된 공정한 선거,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편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다수결의 원리, 관용과 협치 등을 지향한다.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배제되던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차별없이 모든 국민이 자유와 평등이 보장받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한 민주주의는 때로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기득권의 정치, 대중선동에 취약한 비이성의 정치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의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있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세 해전, 1930년대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2016년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사용했던 반(反)이민주의와 반(反)여성주의 정치 전략, 한국에서는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로 두드러진 정치권의 안티페미니즘 전략이 그 예이다.

'트럼프주의'는 유권자의 혐오와 차별의 정서를 자극해 대대적으로 집결시켰다. 한국에서도 계층과 세대, 특정계층의 분노, 사회적 혐오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철학자 플라톤은 중우정치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기를 얻기 위해 대중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 능력과 기여도를 반영하지 않는 기계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것, 사회적 질서를 무시하고 무절제로 점철되는 것, 엘리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비판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이 말은 놀랍게도 지금 대한민국 정치 그 자체이다. 민생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정권다툼에만 혈안이 된 여야(與野)에서는 우파도 좌파도 없다. 서로가 더한 적폐라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국민의 표는 국민의 뜻을 대변할 수 없다.

2021년의 가장 뜨거웠던 갈등의 핵심, '안티페미니즘'

올 한 해 동안 페미니즘을 향한 집중포화가 끊이지 않았다. 2021년 한국처럼 온라인 소비자 운동의 얼굴을 한 안티페미니즘 공격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4년 서구권에서 발발했던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이머 게이트' 또한 비슷한 예이다. '게이머 게이트' 사건은, "여성 게임 개발자 조이 퀸이 한 사이트의 남성 직원과 사적인 관계로 이익을 얻었다"라는 퀸의 전 남자친구가 제기한 허위주장에서 시작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게임계와 문화계 여성을 지목해 사이버불링하는 방식의 집단 폭력이 가해졌다. 한 사람을 마녀사냥하는 사이버폭력에 "문화계의 정의를 바로잡는다"라는 명분까지 더해졌다. 이때 집결한 '사이버폭력배'들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돌풍'을 일으킨 트럼프주의까지 밀접하게 이어졌다.

이때 '게이머 게이트'를 주도했던 사이버폭력배들은 "게임·언론 윤리를 되찾자"라면서 여성에 대한 살인, 강간 등 갖가지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했다. 후에 수사기관과 언론이 조이 퀸에 대한 가짜뉴스가 전남자친구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 확인했지만 피해자를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가짜뉴스는 계속해서 유포돼 조이 퀸 개인을 향한 공격 이상으로 확대됐다. 게임 사이트에서 광고를 끌어내리는가 하면 몇몇 게임사는 페미니스트 직원을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아 실제로 그를 해고하기도 했다. 

게이머 게이트는 대안 우파 진영으로 이어져 내재된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키웠다. 게이머 게이트와 트럼프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를 양분 삼아 폭발적으로 결집했던 양상은 이미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모든 공공기관과 기업을 벌벌 떨게 했던 '집게손가락 논란'과 꼭 닮았다. 법과 수사기관은 피해자 보호에 실패했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논란은 점차 커졌다.

언론은 중립의 함정에 빠져 근거 없는 혐오를 전하고, 허위사실에 마이크를 내주면서 혐오의 확산에 힘을 보탰다. 전혀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 망상에 가까운 의혹은 언론이라는 발언권을 가지고 점차 '타당성 있는 주장'으로 보이게 됐다. 기업은 여기에 무릎꿇어 이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정치권은 이를 이용해 세력을 키웠다. 트럼프가 이용한 포퓰리즘이 그대로 재현된, 한국의 트럼프주의 그 자체였다.

여성이 더불어민주당에도, 국민의힘에도 투표할 수 없는 이유

안티페미니즘으로 '재미를 본' 국민의힘은 그 전략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대선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성폭력 무고죄 신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성평등을 위한다며 어디서 했는지도 모를 여성할당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한다. 여성혐오에 편승한, 참으로 게으르고 비열한 정치전략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이십대남자현상'이라고 부르며 지속적으로 '혐오를 해도 된다'라는 신호를 보낸 결과다.

그렇다고 '진보'를 대표한다 자처했던 더불어민주당은 다르던가. 여당은 그저 "어차피 여성은 더불어민주당을 뽑으니 남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라는 자세다. 이재명 후보는 버젓이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춰달라'라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대변되지 못하고 여성의 표는 주요한 것이 아닌 것마냥 치부된다.

트럼프주의가 젊은 백인 남성들을 집결시켰듯, 안티페미니즘은 현재 한국의 젊은 남성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집결시켰다. 혐오가 정치전략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에 혐오가 들불처럼 번질 때, 기득권이 만든 기득권 중심의 구조는 사회적 약자 간의 갈등으로 치환된다.

정치가 혐오를 권력다툼에 이용하는 이유. 그건 분명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대화와 토론의 공간을 배제와 폭력으로 채우기 위해서일 테다. 종교에 가까운 신념으로 똘똘뭉친, 강한 충성도를 가진 지지층과 팬덤을 가지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없이 극단적인 선악 구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평등의 가치과 시민적 공공성은 사라진다.

2021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젠더갈등'이었다면 2022년의 대선에서의 핵심은 '성평등'이 돼야만 한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피해자의 고발과 많은 시민운동으로 일어났다. 여성운동을 시작으로 중요한 의제가 된 인권의 가치, 진보된 사회의 변화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악마화로 인해 폄하되고 퇴보됐다.

안티페미니스트 세력과 이에 편승한 언론은 "페미니즘이 젠더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틀린 문장이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남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편승하여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한다.

페미니즘은 분명 여성과 남성, 이분법적인 성별을 넘어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는, 평등이라는 이름의 진보의 언어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페미니즘을 악마화하여 젠더갈등을 일으키는 정치를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소통하고 연대하며 세대와 계층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방안이 절실하다.

언론과 미디어권력이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지금도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쏟아진다. 정치권의 선동과 혐오정치를 비판하고 제도적 해법으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기득권 양당정치로 인해 짜여진 적폐의 판을 깨뜨려야 한다. 국민의 행동이 꼭 필요하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대중의 존재가 필요하다.

정치가 혐오를 전략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혐오가 아니라 차별과 폭력에 맞설 것이라고 단호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목소리를 내자. 대중이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강요된 양자택일에서 벗어나자. 어쩔 수 없어서 버리는 한 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한 표를 행사하자. 적폐세력의 정권다툼이 되어버린 기득권 양당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국민의 손으로 제3의 새로운 선택지를 창조하자. 정치, 이제는 민주주의가 이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