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외주의와 노동운동의 때늦은 개화.' 이제는 정동으로 이사한 영등포 로터리의 옛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 서자, 문득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1997년 7/8월호에 썼던 글의 제목이 생각났다. 천재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유명한 창간사를 쓴 세계적인 좌파잡지인 이 잡지가 정리해고를 합법화하는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저항한 1997년 노동자총파업과 관련해,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해서 쓴 글이다.
글의 제목처럼 우리 노동운동은 '한국예외주의와 때늦은 개화'를 특징으로 한다. 해방정국의 전국노동자평의회 운동이 미군정에 의해 분쇄된 뒤 우리 노동운동은 어용노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7년 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한국노총이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이라는 체육관선거 수호선언에 지지성명을 발표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즉 2차 세계대전 후 유럽 등 다른 나라들이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좋은 시절'에 우리 노동운동은 분단 상황 속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그 같은 노동운동은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 동일방직 여성노동자투쟁, YH여성노동자 투쟁 등을 거쳐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했다('손호철의 발자국' 16. 울산 87년 노동자대투쟁', <프레시안> 2021년 4월 12일자 참조). 여기에도 '한국예외주의'가 적용된다.
이처럼 오래 죽어있던 노동운동이 1987년 민주화 이후 뒤늦게 꽃이 피고 만개하기 시작하자, 세계의 노동운동은 소련 동구가 망하고 반(反)노동적인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죽을 쑤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계 노동운동이 망할 때 우리만, 아니 한국과 남아공, 브라질 노동운동만 뒤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가 망했으니 반성을 하라고 하는데, 반성할 것이 있어야 하지요? 사회주의는커녕 근로기준법 지키고 먹고 살 수 있는 생활급 달라고 싸우고 있는 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인데."
1990년대 초 소련 동구가 몰락하자 학출(학생운동출신)으로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을 주도하는 등 노동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민중당 등 진보정당운동을 해온 김문수 등 일부 좌파지식인들이 전향을 선언하고 보수정당으로 향했다. 주류언론과 학계가 노동계에 대해서도 그간의 '급진성'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자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맞다. 좌파지식인들이 사회주의라는 관념적 목표를 가지고 투쟁했다면, 우리의 노동운동은 급진적이기는커녕 열악한 한국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임금인상, 작업조건 개선, 근로기준법 준수 등 '낮은 목표'를 가지고 싸웠다. 다만 정부와 기업이 이 같은 요구를 공권력 등으로 억압하는 것에 대항해 '전투적'으로 투쟁했다. 즉 기본적인 생존권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 방식의 '전투성'을 급진성과 사회주의로 잘못 비판한 것으로, 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임금인상과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전투적으로 추구하는 '전투적 조합주의'다.
이처럼 한국의 노동운동을 키운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라 한국자본주의의 현실이었기에 소련 동구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한국노동운동은 계속 성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성장한 노동운동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구성했고 정부의 복수노조금지 조항(한국노총 이외의 다른 노조를 금지하는)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조협의회(대노협),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등이 모여 1995년 민주노총을 출범시켰다.
"한국의 노동환경은 세계 최악이다". "한국의 노동법은 빨갱이 법이라 기업을 해먹을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노동운동가들은 입만 열면 앞의 발언을 했고 자본가들은 뒤의 발언을 했다. 어떻게 같은 현실에 대해 이렇게 정반대의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노사관계에는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노사관계라는 두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집단적 노사관계란 노동조합의 결성, 단체교섭, 파업과 같은 집단행동에 대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야만' 그 자체였다. 제3자 개입금지, 교원노조 금지, 공무원 노조 금지라는 '3금(禁)'이 대표적인 예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파업 중인 현대자동차노조에 가서 격려사를 했다가 제3자 개입금지로 고발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개별적 노사관계는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에 대한 것으로, 우리 법은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가 자유로운 선진국의 신자유주의적 노사관계와 달리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업인들이 빨갱이 법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은 선진국은 복지제도가 되어 있어 정리해고가 되더라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현실과 관련, 김영삼 정부는 정부, 한국노총, 민주노총, 경제단체가 참여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지금의 노사정위원회와 비슷한)를 만들어 복수노조를 허용하고 집단적 노사관계를 개혁하는 대신에 자본가들이 원하는 정리해고를 도입하는 등 개별적 노사관계를 개악하려 했다.
헌데 이 안이 국회로 가자 여당이 1996년 12월 16일 새벽 이 합의안 중 집단적 노사관계 개혁 부분을 빼버리고 개별적 노사관계 개악안을 안기부법 개악안과 함께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는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야기해 3206개 노조의 359만7011명이 참여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정치총파업으로 발전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에 굴복해 정리해고 합법화를 취소했고 민주노총을 합법화했다.
승리의 기쁨은 잠시에 불과했다. 노개위안이 1997년 IMF 경제위기와 이를 통해 집권한 김대중 정부를 통해, 이어 노무현 정부를 통해 관철되고 만 것이다.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지만, 김대중 정부는 정부와 노동·자본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노사정위를 만들어 정리해고를 제도화하는 대신 교원노조(전교조)를 합법화시켜 줬다.
민주노총은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이 이에 합의해줬다가 대의원들의 반발로 합의가 무산되고 배 대행은 사퇴하고 말았다(이후 민주노총은 일부 온건파들의 참여 주장에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제3자 개입금지를 폐지하고 많은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공무원노조를 합법화해주는 대신 파견근로를 대폭 확대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노사관계를 전면화시켰다.
민주노총은 이 같은 신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민주노동당이 그것이다. 특히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해 제3당으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비례대표에 노동자대표를 진출시키는 등 일정한 지분을 행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성공'은 재앙이 되고 말았다. 다수파인 '자주파(반미와 통일운동을 중시하는)'가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그중 일부가 당내 사정을 북한에 보고한 '일심회 사건'이 터지면서 소수파인 '평등파(계급문제를 중시하며 PD라고도 부른다)'가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분당의 한계를 절감한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이 다시 진보신당을 탈당해 민주노동당, 유시민의 개혁당과 합쳐 통합진보당(통진당)을 만들었다. 이 역시 부정선거와 폭력 사태로 파국을 맞고 정의당과 진보당으로 분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진보정당의 분열구도 속에서 민주노총은 2010년 정동에 있는 경향신문 건물로 이전해 '영등포시대'를 마감하고 '정동시대'의 막을 열었다. 종래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통일된 정치방침을 가지고 있던 민주노총은 이후 정파의 입장에 따라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를 달리함으로써 통일된 정치방침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보정당에 대한 정치방침의 혼란은 현장의 경제적·실리적 조합주의를 강화시키면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기존 '보수'정당, 정확히 표현해 자유주의정당으로 옮겨 가고 이들 정당에 대한 지지기반이 확장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와 함께 중심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산별노조 건립이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이 개별 기업에 묶여 있는 한,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독일과 같은 산별노조 건립을 추구하고 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1997년 경제위기는 출신지역, 성별, 개별 기업 등으로 이미 분열되어 있는 한국의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견근로자 등으로 더욱 분할시켜 버리고 말았다.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가지고 있지만 '생존적 절박함'이 약하다면, 생존적 절박함에 처해 있는 비정규직은 전략적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는 홈플러스 매장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파견근로를 확대하는 등 노동법을 개악하면서 이곳에 있던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해 큰 문제가 된 바 있다. 영화 '카트'로도 만들어진 이 역사적 현장 앞에 서자 이 같은 노동자계급의 분열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민주노총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양적인 면에서도, 2019년 말 현재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04만 5000명(이중 25% 정도가 비정규직이다)으로 한국노총의 101만8000명을 앞설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역시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근로자 등의 심각한 분열 속에서 운동의 방향을 잡아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고령화에 따른 정년연장 문제를 둘러싼 노동자계급 내부의 세대 간의 갈등, AI(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에 따른 택배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들의 급증 등 노동의 성격과 노동시장의 변화 등 민주노총이 안고 있는 과제는 아찔하기만 하다. 나아가 기후위기 등에 따른 화석문명의 종식과 관련된 산업구조변화(내연기관 자동차의 도태와 전기자동차의 부상 등)와 '미투 운동'으로 상징되는 젠더혁명에 대한 노동운동의 선제적 대응이 절실하다.
노동운동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따가운 것도 큰 문제다. 20세기 초 탁월한 좌파 혁명가였고 헤게모니와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그람시는 노동자계급이 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면 국민대중이 노동운동의 발전을 그 사회의 발전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대중들이 삼성의 발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민주노총의 발전이 대한민국의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동자계급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노동운동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현실과 과제가 너무도 엄중하기에 답답한 마음을 안고, 정동에 있는 민주노총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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