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사태'가 부른 학생운동의 추락

[손호철의 발자국] 68. 서울 연세대 : '민주화의 주역' 학생운동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나는 대학시절 감옥을 가기 시작해 평생 운동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 한국정부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탄압에 대해,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한국 정부의 한총련 탄압을 규탄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남북관계가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과 관련된 조문 논쟁 후 급냉각한 1996년 8월 말, 베이징에서 만난 남북한 정치학자 모임에서 북한 학자들에게 한 내 발언이다. 이 모임 직전인 8월 13~20일 '연세대첩'이라고 부르는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가 벌어졌다. 한총련이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를 열며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등을 내걸고 경찰과 대치해 이과동이 불타고 단일 사건으로 최대 규모인 5848명이 연행된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미국 시카고 근처에 있는 유태인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의 도시 스코기에 극우단체 KKK가 집회를 신청한 것을 시가 불허했지만 대법원이 사상과 집회의 자유를 이유로 이를 허가한 것을 예로 들어 설사 한총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를 국가가 억압한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적 글을 발표한 뒤,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다.

회의에 참석하자, 북한 학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를 거론하며 "남한 파쇼도당의 애국적 학생 탄압"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기이하게도, 한국의 내로라하는 보수 학자들이 참석했지만,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북한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의 폭풍이 가라앉자 나는 말했다. "나는 한국 정부의 한총련 탄압을 비판했지만, 한총련 사태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무슨 개소리!!!" 북한 학자들이 다시 난리가 났다. "나는 한총련 탄압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한총련처럼 탄압해야만 하는 자율적인 학생운동 조직이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대한민국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한총련 탄압을 비판하지만, 당신들은 탄압하려고 해도 탄압할 한총련같은 자주적 조직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남북 간의 민간교류를 안 믿습니다. 당신들에게 민간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나름 여러 장점이 있지만, 한총련 탄압 비판 같은 촌극은 중단해야 합니다." 북한 학자들은 아무 반론도 펴지 못 했다.

▲ 한총련 연세대 사태 당시 경찰들이 포위해 학생들이 갇혔고 내부가 전부 불에 탔던 옛 종합관. 폐쇄했다가 강의실 부족을 이유로 리모델링해 교육과학관으로 쓰고 있다. ⓒ손호철

한총련 연대 사태의 중심이었던 연세대학교의 옛 종합관(현 교육과학관)과 과학관 앞에 서자, 연대 사태 나아가 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북한 학자들과의 설전이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다. 바로 이곳에서 전국에서 모인 2만 명의 학생들은 강력한 정부의 공권력 앞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끼니를 굶어가며 일주일을 버티며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총련 연세대 사태는,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고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는 자위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당시의 과격한 투쟁으로 같은 또래이자 일부는 재학 중 입대해 전투경찰로 배치된 동료들 10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1명이 죽었다. 이 같은 폭력사태가 생생하게 텔레비전으로 중계돼 국민들이 학생운동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조)센진." 한국 여학생에 대한 일본 학생들의 성희롱으로 시작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한국의 근대적인 학생운동의 출발점이다.

▲ 광주제일고등학교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사진

학생운동은 극우 정권인 이승만 정권하에서 다른 운동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결연히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다. 4‧19혁명 이래 학생운동은 우리의 민주화의 핵심 동력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투쟁(6.3사태), 3선 개헌 반대, 유신에 반대한 민청학련,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린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 4.19의 촉발점이 된 4.18 고대생 시위를 기념한 고려대학교 기념조형물 ⓒ손호철

박정희 사후에도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1987년 6월 항쟁 등 학생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의 고비마다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 억압적 독재 하에서 학생운동은 젊은 열정, 순수성 등이 모여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의 중요성은 '학생의 날'이 있는 나라가 우리와 폴란드 빼고는 없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목할 것은 단순한 민주화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던 진보운동이 1980년 광주학살이후 급속히 복원되는 데에도 학생운동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한국군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학살을 용인했다고 보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출발로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양키용병 군사교육 반대' 분신 등 반미운동을 전개했다. 소위 이후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주류인 반미적인 '자주파(NL, National Liberation의 준말)'가 등장한 것이다.

이에 반대해 소수파지만 민족해방보다는 계급혁명을 강조하며 '직선제 개헌이 아니라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한 CA그룹이 1986년 등장했다. 이들은 나중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소수파로 계급문제를 강조하는 '평등파(PD, People's Democracy)'로 발전하게 된다. 정의당의 노회찬 전 의원, 심상정 의원 등이 바로 평등파다.

자주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해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고 그 여세를 몰아 1987년 8월 전국적인 학생운동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결성하고 이인영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전대협은 1989년 임수경을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파견해 충격을 줬다.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 민주당의 핵심 586 정치인들이 바로 전대협 의장단 출신들이다.

학생운동은 1993년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총련으로 전환했다. 문제는 한총련이 10만 학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전대협의 대중노선을 버리고 소수정예 중심의 급진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특히 대중적 지도자인 의장단보다 이를 뒤에서 조정하는 핵심활동가 그룹의 입김이 강해지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강경 자주파인 주사파가 1995년 한총련을 장악했다(주사파는 1986년 서울법대생 김영환이 쓴 '강철서신'을 통해 처음 수입됐다. 그는 1991년 반잠수함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했고 2차 방북에선 김일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이후 전향해 뉴라이트 운동을 하고 있다).

▲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이 1993년 한총련 출범식을 가진 뒤 거리로 나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자료

한총련을 장악한 주사파는 온건자주파와 평등파를 다 숙청하고 강경노선 일변도로 나갔다. 그 결과가 바로 연세대 사태와 이로 인한 학생운동의 고립이다. 이후에도 한총련은 자기성찰을 통해 혁신을 하기보다는 지나가던 선반공을 프락치로 몰아 고문 살해하는 등으로 도덕적 추락의 길을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해 불법화하고 말았다.

한총련이 이처럼 몰락하자 주사파계의 혁신파가 중심이 되어 한대련(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됐을 뿐 아니라 통합진보당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비례대표후보 당내 부정선거와 관련된 2012년 5월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밝혀지며 더욱 추락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동력이었던 한국 학생운동은 이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전대협 출신 정치인들은 586의 중심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한총련·한대련 출신 정치인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제는 학생운동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힘이 약해졌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강경 자주파의 자살골이다. 3대 세습 등 너무 문제가 많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이에 기초해 강경노선을 추구하니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자명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도 살펴봐야 한다.

둘째, 학생운동의 몰락은 '비정상의 정상화'다. 우리처럼 노동운동 등이 아니라 학생운동이 사회에 중심 운동이 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우리의 오랜 역사적 전통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해방정국에서는 농민과 노동자가 중요했지, 학생운동이 뭐가 중요했는가? 해방 8년사를 통해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할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계급운동이 사라진 것이 학생운동이 중심운동이 되어온 이유다. 그러나 1987년 이후 계급운동이 성장하자 학생운동은 이제 별 볼 일이 없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한계 때문에 중심운동을 하지 못하는 학생운동이 계급운동의 소멸이라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중심운동이 되어온 '비정상'이 계급운동의 성장으로 이제 '정상화'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1997년 IMF 경제위기다. 이후 한국 사회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스펙' 전쟁이 전면화했고 학생들은 공동으로 학생운동을 하기 보다는 경쟁상대로 서로 경쟁하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586의 권력 독점과 타락은 젊은 대학생, 특히 남성 대학생들의 보수화를 가져오고 있다.

한총련 사태의 현장인 과학교육관과 과학관을 떠나 연세대 캠퍼스 다른 쪽에 있는 이한열 조각 앞에 서자, 한국 학생운동의 '지나친 몰락'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이제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이 우리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이한열에게 긴 묵념을 드렸다. 이제 한국의 학생운동은 정말 끝난 것인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형태와 방향은 무엇인가?

▲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주화에 학생운동이 기여한 공을 생각하게 하는 이한열 기념물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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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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